제10화
내부 차단
증거는 감정이 없어서 더 잔인했다.
도현은 노트를 펼쳤다. 어젯밤 서버룸에서 적은 것들. D-2의 빈칸. D-1의 BK-04. BK-03과 BK-04의 동시 접속. 왼손 글씨가 비뚤었다. 떨림이 잉크에 남아 있었다.
새 페이지를 펼쳤다. 상단에 적었다.
GPS 차단 경위 — 1차 분석.
하나. D-1 밤 11시 47분, BK-04(오영민)가 GPS 관제 모듈에서 위치 추적 파라미터를 수정. 납치 당일 GPS 차단의 직접 원인.
둘. 같은 시간, BK-03(이준)이 동일 모듈에 동시 접속. 오영민의 작업을 실시간 확인 가능한 위치.
셋. D-2 접근 기록 통째로 삭제. 시퀀스 4건 공백.
세 문장. 72시간의 지옥이 세 문장으로 압축되어 있었다.
종이 한 장으로 사람 하나를 망가뜨릴 수 있다.
그리고 지금, 종이 위의 이름 두 개가 나를 망가뜨리고 있다.
*
도현은 공식 루트를 택하지 않았다.
박성호에게 요청한 접근 권한 목록은 압박용이었다. 진짜 수는 다른 곳에 두었다. 기획조정실장의 연간 보안 감사 리포트 요청권. 분기별 서버 접근 통계를 IT 인프라팀에서 직접 추출하는 루틴 보고. 별도 결재가 필요 없었다.
이준이 확보해둔 별도 회선으로 IT 인프라팀 김 과장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보안 프로토콜 2단계의 통신 제한을 우회하는 경로.
이준이 준 경로를 이준을 조사하는 데 쓰고 있다.
냉소가 올라왔다.
메시지 내용: "2분기 서버 접근 통계 리포트 조기 추출. 금일 15시까지 직통 회신. 범위: 블랙팀 보안 서버."
루틴 업무의 일정을 당긴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 리포트에는 D-2의 삭제 기록 복구 흔적이 포함될 수 있었다. IT 인프라팀 백업 서버에는 블랙팀의 미러 로그가 남아 있었다. 도현이 3년 전 직접 구축한 이중 백업 체계.
자신이 만든 시스템이 자신을 구하고 있다. 이번에는.
*
오후 1시. 병원에서 타워로 이동하는 차 안.
이준이 운전석에 앉았다. 1화와 같은 구도. 룸미러 속에서 이준의 눈이 보였다.
BK-03. 그 문자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이준의 계정이 오영민과 같은 시간, 같은 모듈에. 막으려 했거나, 방조했거나, 공모했거나. 어느 쪽이든 이준은 알고 있었다.
"이준."
룸미러 속 시선이 올라왔다가 내려갔다. 0.3초.
도현은 질문을 삼켰다. 증거가 한 조각 더 필요했다. IT 인프라팀의 리포트. 백업 서버의 미러 로그. 그것이 오면 D-2의 빈칸이 채워진다.
채워지면, 이 남자에게 더 이상 삼킬 질문이 남지 않게 된다.
이준의 운전은 정확했다. 가속도 감속도 필요한 만큼만. 반 걸음. 0.5초. 7초 주기. 그리고 D-1 밤 11시 47분의 동시 접속. 이 남자의 모든 것이 정확했다.
우연은 정확하지 않다.
*
15시 02분. 김 과장의 회신이 도착했다.
타워 37층 집무실. 이준은 문 밖에 세웠다. 표준 경호 배치. 도현은 파일을 열었다. 47페이지. D-2로 직행했다.
블랙팀 서버 접근 로그 — 백업 미러.
D-2.
기록이 있었다.
삭제된 네 건의 로그가 백업 서버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D-2, 14:22 — BK-01(박성호): 서버 정기 점검.
D-2, 15:07 — BK-02(김재훈): 경호 스케줄 업데이트.
D-2, 22:31 — BK-04(오영민): GPS 관제 모듈 접근. 작업: 추적 주기 변경(실시간 → 6시간 간격).
D-2, 22:31 — BK-03(이준): GPS 관제 모듈 접근. 작업: 열람.
D-2에도 동시 접속이 있었다. D-1뿐이 아니었다. 이틀 연속.
오영민: 추적 주기 변경.
이준: 열람.
이 남자는 오영민이 내 GPS를 무력화하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틀 동안.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도현은 파일을 닫았다. 손이 멈췄다. 1초. 파일의 무게가 아니라, 파일 너머의 무게가 손을 잡았다. 30센티미터의 밤. 호흡을 세던 새벽. 이준의 맥박이 손바닥에 닿던 감각. 그 모든 것이——이 남자가 납치를 알고도 막지 않은 사실 위에 쌓여 있었다.
*
도현은 문을 열었다.
이준이 문 경첩 반대쪽에 서 있었다. 항상 그 위치. 오늘은 다르게 보였다. 보호의 자세가 아니라 은폐의 자세처럼.
"들어와."
이준이 들어왔다. 문이 닫혔다. 도현은 책상에 기대어 섰다. 이준은 문 앞. 거리 4미터. 반 걸음이 아니라 4미터.
"날 판 건, 우리 쪽이야."
낮고, 평탄하고, 감정이 없는 목소리. 이준은 움직이지 않았다.
"GPS 차단은 내부 IP에서 발생했어. 블랙팀 서버에서." 도현은 이준을 똑바로 보았다. "BK-04가 GPS 관제 모듈에 접근했을 때, BK-03도 같은 모듈에 있었어. 이틀 연속. 작업 내용——열람."
도현은 한 걸음 나아갔다. 4미터가 3.5미터가 되었다.
"지켜보고 있었다는 뜻이야. 오영민이 내 위치 추적을 무력화하는 걸. 실시간으로."
이준의 호흡이 바뀌었다. 깊게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쉬는. 통제된 호흡이 아니라, 통제하려는 호흡.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침묵이 내려왔다. 에어컨 소리. 유리벽 너머의 도시. 그 모든 소리 위에 침묵이 올라앉았다.
*
이준이 입을 열었다.
"도련님."
그 한마디뿐이었다. 설명도, 변명도, 부정도 아닌. 72시간의 폐공장에서 문을 부수고 들어온 순간과 같은 호칭. 그때의 '도련님'은 구원이었다. 지금의 '도련님'은——
도현은 그 차이에 이름을 붙일 수 없었다.
"설명해." 도현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이 남자 앞에서 목소리가 갈라진 것이 처음이 아니었지만, 이번에는 다른 이유였다. "막지 않은 이유를."
이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1초. 2초. 3초.
도현은 그 초를 셌다. 습관이었다. 3초의 침묵은 이준에게 긴 시간이었다. 0.5초 단위로 반응하는 남자의 3초.
이준의 시선이 올라왔다.
내리깔고 있던 시선이. 도현의 눈을 보았다. 세 번째. 폐공장에서 한 번. 병원 어둠 속에서 한 번. 그리고 지금.
시선을 마주한 순간, 도현은 보았다.
이준의 눈 안에 있는 것을. 무표정이 아니었다. 무표정 아래에 눌러놓은 것이 있었다.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 봉합 자리를 응시하던 0.5초, 30센티미터가 무너진 새벽, 도현의 손목을 허용했던 밤——그 모든 순간의 밑바닥에 깔려 있던 것이.
도현은 한 걸음 물러섰다.
물러선 것은 공포가 아니었다. 이해의 가장자리에 닿았기 때문이었다. 이해하면 안 되는 것의 가장자리에.
이준이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도련님'이 아니었다.
"저 없이는 못 잡습니다."
낮은 목소리. 팩트처럼. 그러나 도현은 알았다. 이 문장이 팩트가 아니라 제안이라는 것을. 거래. 이 남자가 내미는 손.
배신자를 잡으려면, 배신을 알고 있던 자의 도움이 필요하다. 도움을 받으려면 이 남자를 곁에 두어야 한다. 곁에 두면, 30센티미터가 다시 시작된다.
도현은 이준을 보았다.
이준은 도현을 보았다.
시선이 부딪힌 채, 아무도 먼저 내리깔지 않았다.
도현이 입을 열었다.
"이준. 넌 알고 있었어?"
질문을 던진 순간, 이준의 호흡이 한 박자 늦었다.
도현은 그 한 박자를 세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대답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대답을 듣고도 이 남자를 밀어내지 못할 자신이, 더 두렵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