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화 72시간
눈을 뜨자, 세상이 철 냄새로 가득했다.
피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공포보다 먼저 든 생각은 이것이었다.
누가 날 팔았지.
통증도, 절망도 아닌——거래의 구조를 파악하려는 본능. 차도현은 자신이 그런 종류의 인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손목에 감긴 케이블 타이가 살을 파고들었다. 양손을 등 뒤로 묶은 방식. 손목 사이 간격 3센티미터 이하——회전 자체를 차단하는 결속법. 경찰 출신이거나, 그 이상이거나.
도현은 고개를 들었다. 삼킨 침에서 피 맛이 났다.
폐공장이었다. 천장 슬레이트 사이로 새는 빛이 콘크리트 바닥에 비스듬히 내려왔다. 각도로 보아 오후 3시에서 4시 사이.
물방울이 떨어졌다. 어딘가에서, 규칙적으로. 도현은 그 소리를 세기 시작했다. 세는 것이 아직 자신이 무너지지 않았다는 증거였기 때문이다.
*
발소리가 들렸다.
두 명. 한 명은 묵직하고 불규칙한 걸음. 다른 한 명은 가볍고 일정한 간격——훈련받은 사람의 보폭.
도현은 고개를 숙인 채 눈을 감았다. 의식이 돌아왔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는 없었다.
"깨면 연락해. 위에서 타이밍 보고 있으니까."
위에서. 그 단어가 귓속에 걸렸다. 청부범이 쓰는 단어가 아니었다. 보고 체계가 있다는 뜻.
"GPS는 끊겼고?"
"내부에서 처리됐어. 깔끔하게."
도현의 손가락이 등 뒤에서 멈췄다.
내부에서.
화성그룹 보안 시스템 안에 접근 권한을 가진 누군가가, 위치 추적을 의도적으로 차단했다는 뜻이었다. 보안팀, 비서실, 기획조정실. 자신의 GPS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실질적으로 다섯.
다섯 명 중 하나가 나를 팔았다.
가벼운 걸음의 남자가 다가왔다. 군화 코가 시야에 들어왔다——270 사이즈, 전투화 계열. 밑창에 붉은 점토질. 성수동 일대.
"알아요, 깨어 있는 거."
도현은 눈을 떴다. 정면을 올려다보지는 않았다. 시선을 먼저 주는 것은 협상에서 불리한 쪽이 하는 행동이다.
"몸값?" 도현의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지만 떨리지는 않았다. "그건 형식이겠지. 진짜 목적은 나를 망가뜨리는 거야."
남자의 동공이 왼쪽으로 1밀리미터 움직였다.
맞았다.
*
빛이 기울었다. 두 번째 밤이 왔다.
화성그룹의 위기 프로토콜에 의하면, 임원급 실종 시 12시간 이내에 보안팀 투입, 24시간 이내에 경찰 공조가 원칙이었다. 도현은 그 프로토콜을 직접 설계한 사람이었다.
서른여섯 시간이 지났다는 것은, 두 가지 중 하나를 의미했다. GPS가 없어 추적에 실패하고 있거나, 프로토콜 자체가 가동되지 않았거나.
아버지는 알고 있을까.
차승만 회장은 아들의 안전에도 우선순위를 매기는 사람이었다. 장남 도진이 실종되면 전 팀이 즉시 투입될 것이다. 차남인 자신에게도 같은 속도가 적용될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 사실이 케이블 타이보다 깊은 곳을 잘랐다.
세 번째 아침이 왔다가, 기울었다.
물은 두 번 주어졌다. 음식은 없었다. 판단력이 흐려지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도현은 자신의 판단력이 실제로 흐려지고 있다는 것을 인지했다. 물방울 세는 것을 두 번 놓쳤다.
나는 대체 가능한 아들이니까.
그 생각은 납치범의 어떤 말보다 정확하게 도현을 잘랐다. 화성그룹 기획조정실장은 교체 가능하다. 도현이 아니어도 그 자리에 앉을 수 있는 인간은 셋쯤 있었다. 형이 추천하고, 도현이 직접 떨어뜨린 사람들.
손목의 감각이 사라졌다.
물방울이 떨어졌다.
세지 않았다.
*
세 번째 밤.
공장 안의 공기가 달라졌다.
묵직한 걸음의 남자가 전화를 받는 빈도가 잦아졌다. 가벼운 걸음의 남자는 도현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입구 쪽을 반복적으로 확인했다. 경계의 방향이 바뀌었다. 도현을 감시하는 것에서, 무언가의 접근을 경계하는 것으로.
"시간 됐어. 옮겨."
"차가 아직——"
"닥쳐. 지금 당장."
가벼운 걸음의 남자가 처음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전문가가 초조해지는 순간——상황이 계획에서 벗어났다는 뜻.
그때, 소리가 아니라 공기가 먼저 바뀌었다.
철 냄새 사이로 다른 바람이 밀려들었다. 화약과 금속의 바람.
문이 부서졌다.
경첩이 위아래 동시에 떨어져 나갔다. 한 번의 타격. 철제 문짝이 콘크리트를 쓸며 불꽃을 일으켰고, 그 불꽃이 어둠을 0.5초간 갈랐다.
그 0.5초 안에 도현이 본 것.
실루엣. 하나.
188 전후. 넓은 어깨. 오른손에 금속 파이프——문을 부순 도구. 왼손은 비어 있었다. 비어 있는 왼손이 더 위험해 보였다.
가벼운 걸음의 남자가 반응했다. 훈련받은 사람답게 빨랐다.
실루엣이 더 빨랐다.
뼈와 힘줄이 꺾이는 소리. 짧고, 건조하고, 결정적인. 두 번째 남자의 외침이 완성되기 전에 두 번째 소리가 겹쳤다.
4초.
도현은 그 4초를 세었다. 습관이었다.
*
정적.
철과 화약과 피가 뒤섞인 공기 속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가볍지도 묵직하지도 않은——소리를 내되, 필요한 만큼만 내는 걸음.
세 걸음. 두 걸음. 한 걸음.
무릎을 꿇는 소리. 도현의 앞에서.
손이 닿았다. 케이블 타이에——이번에는 정확한 도구를 가진 손. 니퍼 날이 플라스틱을 한 번에 잘랐다.
혈류가 돌아왔다. 손끝이 타는 것 같았다.
도현은 고개를 들었다. 어둠 속에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달빛이 턱선의 윤곽만을 그렸다. 표정이 없는 것이 아니라, 표정이 필요 없는 사람의 얼굴.
"도련님."
낮은 목소리. 매일 아침 차 문을 열어주고, 3걸음 뒤에서 따라오고, 시선을 내리깔고 외부를 주시하던 사람. 이름을 부른 적은 거의 없었다. 그림자에게 이름은 필요 없으니까.
그런데 그 그림자가, 72시간 동안 아무도 부르지 않았던 호칭을 불렀다.
"일어나실 수 있습니까."
질문이 아니었다. 이미 한 팔로 도현의 체중을 지탱하고 있었다.
도현은 그 손을 뿌리쳤다.
혼자 일어섰다. 무릎이 꺾였다. 벽을 짚었다. 두 번째 시도에서 간신히 중심을 잡았다. 시야가 흔들렸지만 시선은 흔들리지 않았다.
"보고해."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러나 도현은 그것이 첫 마디여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감사가 아니라 명령. 그래야 무너지지 않는다.
어둠 속에서 그 사람이 고개를 숙였다. 3걸음 뒤가 아닌 1걸음 앞에서.
"블랙팀 이준. 도련님 수습 완료."
이준.
도현은 그제야 그림자의 이름을 떠올렸다.
공장 밖으로 나왔다. 밤공기가 폐를 찔렀다. 성수동의 밤은 공장 폐수와 강물이 섞인 냄새가 났다. 철 냄새가 아닌 공기. 그것만으로 다리가 풀릴 뻔했다.
이준이 반 걸음 뒤에서 따랐다. 평소의 세 걸음이 아니라 반 걸음. 쓰러지면 잡을 수 있는 거리.
도현은 걸었다.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면, 그 손의 온기를 떠올릴 것 같았다.
차 앞에서 멈췄다. 이준이 문을 열었다. 항상 그래왔듯이.
"이준."
처음이었다. 그 이름을 입 밖에 꺼낸 것이. 이준의 손이 문 손잡이 위에서 멈췄다.
"왜 혼자 왔어."
이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도현은 그 침묵의 무게를 재었다. 대답하지 못하는 것과 대답하지 않는 것은 다르다.
이준은 후자였다.
그리고 도현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그 침묵 속에 묻힌 72시간의 진짜 의미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