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화
숨
숨이 막히는 건 공포 때문만이 아니었다.
회의실 밖 복도는 넓고 차가웠다. 유리벽 너머로 서울의 스카이라인이 펼쳐져 있었다. 37층에서 내려다보는 도시는 질서 정연해 보였다. 빌딩의 격자, 도로의 직선, 움직이는 점들. 모든 것이 계산 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도현은 그 질서가 거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72시간 전까지 자신도 저 격자 안에서 계산 가능한 점이었으니까. 그런데 누군가가 GPS를 끄는 것만으로 그 점은 사라졌다.
복도 끝에서 구두 소리가 들렸다.
발소리는 권력을 데리고 왔다.
도현은 그 소리를 알았다. 이준의 반 걸음도, 박성호의 관리자 걸음도 아닌——맞춤 구두의 정확한 리듬. 확신으로 걷는 사람의 보폭. 도현의 등이 긴장했다. 돌아보기 전에 이미 알고 있었다.
"도현아."
차도진.
화성그룹 장남. 전략기획본부장. 형.
도현은 돌아보았다. 도진이 복도 한가운데 서 있었다. 네이비 수트, 타이핀, 왼손 주머니에 손. 포즈가 아니라 습관. 이 남자는 서 있는 것만으로 공간을 지배하는 종류의 인간이었다.
도진의 눈이 도현을 훑었다. 위에서 아래로. 시선이 손목의 붕대에서 0.3초 머물렀다가 올라왔다. 미소가 올라왔다. 따뜻하지 않은 미소.
"약해졌네."
*
그 두 글자가 복도를 가로질렀다.
도현은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바꿀 수 없었다. 바꾸는 순간 인정이 되니까. 대신 시선을 고정했다. 도진의 눈을 똑바로.
"오랜만이야, 형."
"72시간 만이지." 도진이 한 걸음 다가왔다. "아버지가 걱정하시더라. 많이."
많이. 도현은 그 단어를 분석했다. 차승만 회장이 '많이' 걱정한다는 것은, 도진의 입을 통해 나온 문장이다. 아버지가 직접 전화한 것이 아니라, 형이 전하고 있다는 것.
아버지는 아직 직접 오지 않았다.
36시간 동안 프로토콜이 작동하지 않았던 이유. 아버지가 '직접' 반응하지 않았을 가능성. 폐공장에서 이미 계산한 것이었다. 대체 가능한 아들.
도현은 그 생각을 밀어냈다.
"리스크는 관리하면 돼." 도진이 유리벽 너머를 보면서 말했다. "네가 잘 알잖아. 기획조정실장이."
리스크. 도진은 납치를 '사건'이 아니라 '리스크'로 불렀다. 감정을 빼고, 수치를 넣고, 관리 가능한 변수로 전환하는 언어. 도현이 쓰는 언어와 같았다. 형제는 같은 문법으로 말했다.
차이가 있다면, 도현은 자기 자신에게 그 문법을 쓰고, 도진은 타인에게 쓴다는 것이었다.
"걱정해 줘서 고맙네." 도현의 목소리가 평탄했다. "그런데 형, 하나만."
도진이 시선을 돌렸다. 도현을 보았다.
"그날, 누가 내 GPS를 건드렸지?"
*
도진의 미소가 변하지 않았다. 그것이 대답이었다.
미소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그 질문을 예상하고 있었다는 뜻이거나, 질문 자체가 의미 없다고 판단한다는 뜻이었다.
"GPS?" 도진이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보안팀 관할 아닌가. 블랙팀이."
"블랙팀 서버 접근 권한자가 네 명이야. 아까 회의에서 목록 요청했어."
"그래? 성실하네." 도진의 눈이 웃었다. 입은 웃지 않았다. "근데 도현아——"
도진의 시선이 도현의 어깨 너머로 흘렀다. 이준이 서 있는 방향으로.
"그건 네 전담이 더 잘 알겠지?"
도현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주머니 속에서. 도진이 던진 문장은 정보가 아니라 칼이었다.
형은 이준을 의심하고 있다.
아니. 형은 내가 이준을 의심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도진이 다시 입을 열었다. 목소리를 낮추고. 도현에게만 들리도록.
"이준이라고 했지. 블랙팀에서도 좀 특이한 친구더라. 단독 구출, 비공식 병원 확보, 인수인계 거부." 도진이 도현을 보았다. "누가 시켰을까. 아버지? 블랙팀장? 아니면——스스로?"
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었다. 도진이 나열한 것들은 도현이 이미 분석한 것들이었다. 그런데 형의 입에서 나오니 무게가 달랐다. 정보가 아니라 해석이 붙어 있었다.
"이준은 전담 경호원이야." 도현이 말했다. 목소리에 감정을 넣지 않았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그래." 도진이 미소를 유지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면 좋겠다."
도진이 돌아섰다. 걸었다. 맞춤 구두의 리듬이 복도에 울렸다가 사라졌다.
도현은 그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움직이지 않았다.
*
도진이 사라진 뒤.
복도에 도현과 이준만 남았다. 유리벽의 빛이 과도하게 들어왔다. 맥박이 빨라지려는 것을 느꼈다. 잡았다.
이준이 반 걸음 뒤에 서 있었다. 도진의 말에도 표정이 바뀌지 않았다. '네 전담이 더 잘 알겠지'라는 말에도. '스스로'라는 단어에도. 무표정.
무표정이 의미하는 것은 두 가지다.
감정이 없거나, 감정을 숨기는 데 숙련되었거나.
도현은 이준을 곁에 두고 싶어지는 자신을 자각했다. 도진이 떠나고, 복도가 비고, 빛이 과도한 이 순간——이준의 존재가 닻이 되고 있었다. 그 자각이 불쾌했다. 불쾌한 것은 의존 자체가 아니라, 도진이 그 의존을 정확히 읽었다는 것이었다.
"서 있지 말고 보고 준비해."
도현은 이준을 보지 않고 말했다. 차갑게.
이준이 고개를 숙였다. "어떤 보고를 원하십니까."
"블랙팀 서버 접근 로그. 네가 아는 경로로. 공식 라인 말고."
이준이 0.5초 침묵했다.
그 0.5초는 도현이 이미 익숙한 무게였다. 비공식 경로로 서버 로그를 확보하라는 것은, 도현이 공식 라인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선언이었다. 아까 받은 보안 알림이 그 이유였다. BK-01이 도현의 접근 등급을 '제한적 열람'으로 낮춘 것.
"알겠습니다."
간결하게. 추가 질문 없이.
*
엘리베이터가 내려갔다.
37층에서 지하 주차장까지. 밀폐된 금속 상자 안에서 도현은 도진의 마지막 말을 다시 분석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면 좋겠다."
좋겠다. 희망의 형태를 한 경고. 도진은 도현과 이준의 관계를 보고 있었다. 반 걸음의 거리를. 그것을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지만, 도진은 알고 있었다.
도현은 엘리베이터 안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았다. 수트, 안경, 넥타이. 기획조정실장의 외형. 그 뒤에, 반 걸음 뒤에, 이준이 서 있었다. 거울 속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0.3초. 이준이 먼저 시선을 내렸다.
도현은 거울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문이 열렸다. 지하 주차장의 콘크리트 바닥이 보였다.
도현은 0.5초 멈췄다.
콘크리트. 형광등. 밀폐된 공간. 폐공장의 감각이 스쳤다. 0.5초만. 도현은 숨을 들이마시고 걸음을 옮겼다.
혼자 확인한다.
도현은 그 결론을 세운 채 차를 향해 걸었다. 이준이 반 걸음 뒤에서 따랐다.
그런데 반 걸음이 좁아졌다. 미세하게. 도현이 멈추지 않았는데 이준의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도현은 돌아보지 않았다.
"도련님."
이준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평소보다 가까운 거리에서.
"혼자 움직이실 생각이시면——"
도현이 멈췄다. 돌아보았다.
이준의 눈이 올라와 있었다. 내리깔고 있어야 할 시선이. 거기에 도현이 읽을 수 있는 것이 하나 있었다. 경고가 아니었다. 알고 있다는 신호.
도현은 이준을 보았다. 이준은 도현을 보았다.
숨이 막히는 이유를, 이 남자가 알고 있다는 게 더 끔찍했다.
도현은 입을 열지 않았다. 차 문을 열고 탔다. 이준이 운전석에 앉았다.
도현의 결심은 세워졌다. 그리고 이준은 그 결심을 읽었다. 혼자 움직이기도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