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화. 첫 번째 무게
D-105. 토요일. 정명희의 생신이었다.
한남동 본가. 현관을 열자마자 장미향이 먼저 왔다. 거실 중앙에 장미 서른 송이. 청담동 블룸하우스. 태욱의 형수 윤서진이 시켰을 것이다. 형수는 늘 꽃으로 공간을 먼저 점령했다.
연화는 현관에서 실내화로 갈아 신었다. 핸드백을 어깨에 걸친 채였다. 안에 보조 기기가 있었다. 비행기 모드, 녹음 앱 대기. 아직 누르지 않았다.
식탁은 열두 인용이었다. 태욱의 형 강태현 가족, 태욱과 연화, 정명희. 참석 인원 일곱. 연화가 도착한 건 열한 시였다. 형수보다 한 시간 늦었다. 의도적이었다. 형수가 먼저 동선을 잡고, 연화는 세팅 보조로 들어간다.
주방으로 들어갔다. 형수가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갈비찜 냄비 두 개.
"왔어? 전은 네가 해줘."
지시인데 부탁의 형태를 빌렸다. 태욱과 같은 문법이었다.
"네, 언니."
앞치마를 걸쳤다. 도마 위에 호박, 고추, 새우. 밀가루와 달걀이 옆에 놓여 있었다. 가사도우미가 해놓고 간 것이다. 형수는 마무리만 했다. 이따 식탁에서는 형수가 준비한 것이 된다. 연화가 부친 전은 형수의 상에 올라간다.
전을 부치기 시작했다. 기름이 지글거렸다. 핸드백은 주방 입구 의자 위에 놓여 있었다. 녹음을 시작할까. 아직은 아니었다. 태욱이 와야 했다.
열두 시 반. 태욱과 태현이 도착했다. 태현의 얼굴이 그을려 있었다. 골프. 태욱은 셔츠를 갈아입은 상태였다.
정명희가 거실에서 나왔다. 은색 브로치가 달린 재킷. 머리가 올려져 있었다. 집 안에서도 늘 준비된 사람이었다.
"어머니, 생신 축하드립니다."
태욱이 먼저 인사했다. 꽃다발을 건넸다. 장미가 아닌 백합. 형수의 장미와 다른 종류. 장남의 아내가 거실 꽃을 놓고, 차남이 직접 어머니에게 꽃을 건넨다.
연화는 주방에서 전을 옮기고 있었다. 정명희가 주방을 지나갔다. 연화를 보지 않았다.
"서진아, 수고했어."
형수가 고개를 숙였다. 연화는 전 접시를 들고 서 있었다. 정명희의 시선이 연화를 스쳤다. 스치기만 했다. 멈추지 않았다.
식사가 시작됐다. 핸드백을 식탁 옆 의자에 놓았다.
식탁 대화는 태현이 주도했다. 골프, 어머니 건강, 회사. 연화는 듣고, 고개를 끄덕이고, 빈 잔을 채웠다.
태욱이 와인을 따랐다. 정명희의 잔에 먼저, 형수의 잔에 다음. 연화의 잔은 비어 있었다. 연화는 스스로 병을 들어 따랐다. 아무도 보지 않았다.
그때 정명희가 말했다.
"연화야."
사람들 앞에서는 '연화 씨'. 가족끼리만 있을 때는 '연화야'. 후자가 더 위험했다.
"네, 어머님."
"다음 주에 재단 자선행사 있는 거 알지?"
"네."
"올해는 네가 리셉션 동선 좀 잡아줘. 작년에 서진이가 했는데, 올해는 규모가 커져서."
형수가 수저를 내려놓았다. 눈이 좁아졌다. 연화는 그 변화를 봤다. 형수가 빼앗긴 게 아니었다. 하기 싫은 일을 넘긴 것이다. VIP 좌석 배치, 동선 확인, 사전 답사, 당일 현장 대기. 형수는 이름만 올리고, 연화가 실무를 한다.
"알겠습니다."
식사가 끝났다. 연화는 주방에서 설거지를 했다. 형수는 거실에서 정명희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가사도우미가 없는 토요일이었다.
물소리 아래에서 생각했다. 오늘 녹음은 실패였다. 가족 식사에서 태욱은 '좋은 남편'이었다. 통제는 둘만 있을 때 작동했다.
접시를 마지막으로 헹궜다. 행주로 손을 닦았다.
거실로 나왔다. 형수는 화장실에 간 듯했다. 태현과 태욱은 서재에 들어가 있었다. 정명희와 연화, 둘만 남았다.
정명희가 연화를 봤다.
"요즘 밖에 자주 나가더라."
태욱이 보고한 것이었다. 연화의 외출 빈도를. 전 타임라인에서는 눈치채지 못했던 구조였다.
"하경이 이사 준비를 도와주고 있어요. 전세 만기가 가까워서요."
정명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더 묻지 않았다. 답을 들으려고 물은 게 아니었다. 내가 알고 있다는 신호였다.
정명희가 찻잔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자선행사 건. 이번엔 내 말대로만 움직여."
연화의 손이 무릎 위에서 멈췄다.
"네 판단은 넣지 마. 올해는 보는 눈이 많아."
목소리는 낮았다. 둘만 있을 때만 쓰는 어조. 형수에게는 '수고했어'를 주고, 연화에게는 이것을 준다.
"알겠습니다, 어머님."
형수가 돌아왔다. 공기가 바뀌었다. 정명희가 화제를 돌렸다.
오후 세 시. 태욱의 차를 타고 돌아왔다.
차 안에서 태욱이 말했다.
"어머니가 자선행사 동선 부탁했지?"
"네."
"잘해줘. 올해 규모가 커서 어머니 신경 많이 쓰고 계셔."
연화는 창밖을 봤다. 정명희에게서 '네 판단은 넣지 마'를 듣고, 태욱에게서 '잘해줘'를 듣는다.
핸드백이 무릎 위에 있었다. 차 안. 둘만 있었다.
손이 핸드백 지퍼에 닿았다. 열었다. 보조 기기를 만졌다. 화면이 켜지지 않도록 측면 버튼만 확인했다. 비행기 모드. 녹음 앱 실행. 빨간 원. 소리 없이 녹음이 시작됐다.
"재단 행사가 언제예요?"
목소리는 평소와 같았다.
"다음 주 목요일. 리허설은 화요일이래."
"화요일에 제가 가면 되는 거죠?"
"어머니한테 연락해봐."
"오늘 직접 말씀드릴 걸 그랬어요."
"아까 바빴잖아. 설거지하느라."
자연스러운 톤이었다. 사실을 말하는 목소리. 하지만 그 사실 안에 구조가 있었다. 연화가 설거지를 하는 동안 형수는 거실에서 정명희와 이야기했다.
연화는 더 밀지 않았다.
한남동에 도착했다. 현관을 열고 들어갔다. 신발을 벗는데 태욱이 말했다.
"아, 내일 저녁에 약속 있으니까."
"네."
"늦을 수도 있어."
태욱은 이미 거실로 들어가고 있었다. 등만 보였다. 전 타임라인에서, 태욱이 '늦을 수도 있어'라고 말한 날의 절반 이상은 외도였다.
지금은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이 말도 녹음되고 있었다.
"알겠어요."
침실로 들어갔다. 문을 잠갔다. 보조 기기를 꺼냈다. 녹음 정지. 23분 14초.
짧았다. 하지만 남았다.
이어폰을 꽂았다. 되감았다.
"아까 바빴잖아. 설거지하느라."
태욱의 목소리. 부드럽고 아무 문제가 없는 톤. 어제의 47분 23초와 합치면 달랐다. 카드 사용을 확인하는 남편. 아내의 설거지를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남편. 외출 빈도를 어머니에게 보고하는 남편.
서지혁에게 파일을 보냈다. 두 번째 녹음. 23분 14초.
답이 왔다. "월요일에 성수동으로 오십시오. 두 건 같이 검토합니다."
D-103. 월요일. 성수동 사무실.
서지혁이 이어폰을 꽂고 있었다. 연화가 맞은편에 앉았다. 첫 번째 파일. 47분 23초. 특정 구간에서 멈췄다.
연화의 목소리. "제가 뭘 살 때마다 물어보시는 거예요?"
태욱의 목소리. "물어보면 안 돼? 부부잖아."
서지혁이 이어폰을 빼고 연화를 봤다.
"여기입니다."
두 번째 파일을 실행했다. 또 다른 구간에서 멈췄다.
태욱의 목소리. "아까 바빴잖아. 설거지하느라."
서지혁이 노트북을 닫지 않았다. 두 파일의 재생 시간이 나란히 떠 있었다.
"한 번이면 관심입니다. 반복되면 통제입니다."
건조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 건조함 안에 확신이 있었다.
"정명희의 발언은 녹음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서면 진술이 필요합니다." 서지혁이 연화를 봤다. "한하경 씨가 연화 씨의 생활을 직접 관찰한 적 있습니까."
"하경이요?"
"동생의 증언은 녹음의 맥락을 보강합니다."
연화는 잠시 멈췄다. 하경을 끌어들이는 것. 서지혁에게 연결한 것도 하경이었다. 하지만 법정에 세우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하경이한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요."
"한하경 씨에게 결정권이 있습니다."
하경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경이 법정에 서면, 태욱의 시선 안으로 들어온다. '아내의 동생'에서 '적의 편'이 된다.
"생각해볼게요."
서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더 밀지 않았다.
"녹음은 계속하십시오. 최소 다섯 건. 같은 패턴이 반복되면 법원이 습관이 아니라 통제로 봅니다."
서지혁이 노트북을 닫았다. 서류 가방에서 A4 한 장을 꺼냈다. 상단에 '증거 진행 현황'.
당사자 녹음 — 2건 확보. 추가 3건 이상 필요.
서면 진술 — 한하경 대기. 의뢰인 결정 필요.
사흘 전까지 아무것도 없었던 목록이었다.
"서 변호사님."
서지혁이 연화를 봤다.
"이 두 건이, 지금 상태로 법원에 가면 어떻게 돼요?"
"기각 가능성 높습니다."
위로가 없는 답이었다.
"하지만 다섯 건이 쌓이면 달라집니다."
연화는 종이를 접었다. 핸드백에 넣었다. 서지혁이 일어섰다.
"한 가지 더." 문 앞에서 멈췄다. "정명희 여사도 녹음 대상입니다. 시어머니의 압박이 패턴으로 잡히면, 혼인 파탄 원인이 가문 구조로 확장됩니다."
"정명희는 태욱보다 조심할 겁니다."
"그래서 더 가치가 있습니다. 조심하는 사람이 실수할 때 증거력이 높습니다."
서지혁이 나갔다. 문이 닫혔다.
연화는 혼자 남았다. 창밖으로 성수동 오후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다. 열흘 전 이 책상 위에는 불법 앱 화면이 떠 있었다. 지금은 '증거 진행 현황' 종이가 놓여 있었다.
핸드폰을 들었다. 하경에게 전화했다. 세 번 울리고 받았다.
"언니? 월요일 낮에 웬일이야?"
"하경아, 오늘 저녁에 볼 수 있어?"
"갑자기? 무슨 일이야?"
"할 이야기가 있어."
하경이 잠깐 침묵했다.
"이태원 그 냉면집? 여섯 시?"
"응."
저녁 여섯 시. 이태원.
냉면집은 작았다. 테이블 여덟 개. 월요일 저녁이라 손님이 적었다. 연화가 먼저 와서 구석 자리에 앉았다. 하경이 들어왔다. 병원 유니폼 위에 얇은 카디건. 퇴근 직후였다.
"뭐야 언니, 얼굴이 왜 그래."
"피곤해 보여?"
"많이."
물냉면 둘을 시켰다. 냉면이 놓이자 연화가 가위를 들었다. 면을 자르면서 말했다.
"서 변호사가 너한테 부탁할 게 있을 수도 있어."
하경의 젓가락이 멈췄다.
"무슨 부탁?"
"진술서. 내 결혼 생활을 관찰한 내용으로."
하경이 연화를 봤다. 표정이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법정에 서라는 거야?"
"진술서까지야. 법정에 서는 건 나중 문제고."
"나중 문제가 아닌데."
하경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화난 게 아니었다.
"내가 진술서 쓰면, 형부가 알게 되잖아."
"소송이 시작되면 어차피 알게 돼."
"그래도."
하경이 냉면 그릇을 밀어놓았다. 한 젓가락도 먹지 않았다.
"언니가 그 집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나는 알아. 명절마다 부엌에서 나오지 못하는 거, 형부가 전화 안 받으면 안절부절하는 거, 시어머니가 뭐라고 하면 웃으면서 참는 거."
하경의 손이 테이블 위에서 주먹이 됐다.
"근데 그걸 종이에 쓴다는 건 다른 거야. 언니 아픔을 남의 눈에 보여주는 거잖아."
연화는 하경을 봤다. 하경의 눈이 붉어지고 있었다. 목 안쪽이 뜨거워졌다. 삼켰다.
"안 해도 돼."
"그런 말 하려고 부른 거 아니잖아."
하경이 물을 마셨다. 숨을 내쉬었다. 다시 연화를 봤다.
"쓸게."
"하경아."
"쓴다고."
하경의 목소리가 단단해졌다. 결정한 뒤의 목소리.
"대신 조건 있어."
"뭔데."
"주말에 나랑 밥 먹어. 매주. 이기든 지든."
연화는 대답하지 못했다. 목이 막혀서가 아니었다. 하경의 조건이 너무 쉬워서였다. 밥을 먹자. 매주. 이기든 지든. 이 조건 안에 하경의 모든 마음이 들어 있었다.
"알겠어."
"약속이야."
"약속이야."
연화가 냉면을 한 젓가락 집었다. 하경도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 면이 차가웠다. 8월 밤이었지만, 그 차가움이 목을 타고 내려갔다.
식사가 끝났다. 하경이 계산했다. 이태원 골목의 가로등 아래에 나란히 섰다.
"언니."
"응."
"이기지 못해도, 나는 네 편이야."
가로등 불빛이 하경의 얼굴을 반쪽만 비추고 있었다. 서른한 살. 재활병원에서 하루 종일 환자를 돌보고, 저녁에 언니의 이혼 진술서를 쓰겠다고 한다.
"고마워."
10년간 태욱에게 감사를 표현하는 건 복종이었다. 하경에게 감사를 표현하는 건 연결이었다. 같은 단어가 다른 무게를 가졌다.
하경이 오른쪽으로, 연화가 왼쪽으로 걸었다. 택시를 잡았다. 한남동.
차 안에서 서지혁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한하경 진술서, 진행합니다."
답이 1분 뒤에 왔다.
"수요일에 양식 보내겠습니다."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창밖으로 한강이 보였다. 어둠 위에 도시의 불빛이 흩어져 있었다.
집에 도착했다. 현관을 열었다. 거실이 어두웠다. 태욱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어제의 '늦을 수도 있어'. 오늘이 그 내일이었다.
불을 켜지 않았다. 어두운 거실을 지나 침실로 들어갔다.
수첩을 펼쳤다. 한 줄만 적었다.
화요일. 자선행사 리허설. 정명희와의 첫 단독 접촉.
펜을 놓았다.
정명희는 오늘 말했다. '네 판단은 넣지 마.' 그 문장이 녹음되지 않은 것이 아까웠다. 하지만 다음 기회가 온다. 정명희가 실무를 맡긴 자리에서는 조심할 이유가 줄어든다.
수첩을 닫았다. 이불을 덮지 않았다. 침대 끝에 앉은 채 어둠을 봤다.
내일은 D-102.
화요일, 자선행사 리허설에서 처음으로 정명희의 말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