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법은 칼이 아니라 순서다
서초동 사거리에서 내렸다.
D-116.
법무법인 정연은 서초역 3번 출구에서 도보 5분 거리에 있었다. 연화는 그 5분을 두 번 걸었다. 한 번은 건물 앞까지 갔다가 돌아왔고, 한 번은 건너편 카페 유리창 너머로 건물 입구를 바라봤다. 출입구 옆에 법무법인 간판이 작게 붙어 있었다. 명함에 적힌 주소를 확인한 건 행사 다음 날이었다. 수첩에 번호만 옮기고 명함은 버렸다. 사진도 찍지 않았다. 아이클라우드 동기화는 태욱이 설정해준 것이었다.
세 번째로 건물 앞에 섰을 때, 발이 멈추지 않았다. 회전문을 밀었다. 바깥의 습기가 유리 한 장 뒤로 끊겼다.
로비는 서늘하고 정돈돼 있었다. 대리석 바닥에 구두 소리가 울렸다. 안내 데스크 뒤로 법무법인 이름이 금속 글자로 박혀 있었다. 정연(正淵). 바를 정에 연못 연. 감정이 들어올 자리가 없는 공간이었다.
"예약 없이 오셨어요?"
안내 직원의 목소리가 정중했지만, 시선은 연화를 한 번 훑었다. 옷차림을 보는 눈이었다. 에르메스 스카프, 샤넬 플랩백, 페라가모 펌프스. 돈이 있는 여자의 차림이었다. 다만 결혼반지를 끼고 있는 여자가 혼자 법무법인에 오는 건, 보통 한 가지 이유다.
"서지혁 변호사님을 뵙고 싶습니다."
"성함과 연락처를 남겨주시면―"
"한연화라고 전해주세요."
직원이 내선을 들었다. 30초. 수화기를 내려놓는 동작이 약간 빨라졌다. 연화라는 이름에 반응한 건지, 서지혁이 빠르게 받은 건지는 알 수 없었다.
"12층으로 올라가시면 됩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거울을 봤다. 얼굴이 아니라 손을 봤다. 떨리지 않았다. 전 타임라인에서 변호사를 만난 건 모든 게 끝나고 난 뒤였다. 이미 서명한 서류를 들고, 되돌릴 수 없는 것들의 목록을 확인하러 갔었다. 그때는 고르는 쪽이 아니라, 고름을 당하는 쪽이었다. 숫자가 올라갔다. 7, 8, 9. 오늘은 울러 온 게 아니다.
12층. 문이 열렸다. 복도 끝에서 여자가 걸어왔다. 작은 체구. 검은 정장. 셔츠 위 단추까지 잠근 차림. 여유를 뺀 걸음. 구두 굽이 낮았다. 빠르게 움직이기 위한 선택이었다.
"한연화 씨?"
"네."
여자가 연화를 봤다. 아래에서 위로. 정명희와 같은 방향이었지만, 읽는 것이 달랐다. 정명희는 포장 상태를 봤다. 이 여자는 가격표를 봤다.
"나수빈입니다. 서 변호사님 어소시에이트요."
악수를 내밀지 않았다. 연화도 내밀지 않았다.
"이쪽으로요."
나수빈이 앞서 걸었다. 복도 양쪽으로 유리벽 사무실이 늘어서 있었다. 모니터 불빛이 형광등보다 밝았다. 이 건물 안의 사람들은 타인의 문제를 직업으로 삼고 있었다.
나수빈이 회의실 문을 열고 커피를 물었다.
"괜찮습니다."
"아메리카노 나갈게요."
연화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문을 닫기 전에 한마디 더 했다.
"사모님들이 제일 자주 망치는 건, 너무 빨리 끝내고 싶어 한다는 거예요."
문이 닫혔다. 연화는 닫힌 문을 봤다. 차가운 보조가 아니었다. 이 여자도 패턴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회의실은 작았다. 8인용 테이블에 의자 네 개. 창밖으로 서초동 빌딩 숲이 보였다. 테이블 위에 서류는 없었다. 화이트보드도 비어 있었다. 기록이 남지 않는 방이었다.
3분 뒤, 서지혁이 들어왔다. 차콜 그레이 셔츠에 넥타이 없이 첫 번째 단추만 풀린 차림. 행사장에서는 자리에 묻히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여기서는 공간 자체가 그의 것이었다.
"오셨군요."
의자를 당겨 앉았다. 연화 맞은편.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빨리 오셨습니다."
"늦기 전에 오라고 하셨잖아요."
서지혁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웃음은 아니었다.
"기억하고 계셨군요."
나수빈이 커피를 들고 돌아왔다. 연화 앞에 아메리카노, 서지혁 앞에 물. 연회장에서도 물만 마시던 사람이었다. 나수빈이 서지혁 옆에 앉아 노트북을 열었다.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다. 연화를 보는 시선에 온도가 없었다.
서지혁이 말했다.
"비공식입니다. 수임 여부는 오늘 정하지 않아요."
"알고 있어요."
"그러면 듣겠습니다."
연화는 커피잔에 손을 대지 않았다.
"결혼 10년 차예요. 남편은 대한그룹 전략기획본부 전무입니다."
나수빈의 타이핑 소리가 멈췄다. 0.3초. 다시 이어졌다. 대한그룹이라는 이름이 이 방의 온도를 바꾼 것이었다.
"이혼을 준비하고 있어요."
"남편이 알고 있습니까?"
"아니요."
질문이 이어졌다. 짧고 정확했다. 혼인 기간, 자녀 유무, 유책 사유, 폭력 여부. 의사가 환자의 통증 부위를 묻는 톤이었다. 서지혁은 중간에 끊지 않았다. 펜을 들고 있었지만 적지는 않았다. 기록은 나수빈의 몫이었다.
연화는 필요한 만큼만 대답했다. 태욱의 외도를 언급했다. 경제적 통제를 설명했다. 가스라이팅이라는 단어는 쓰지 않았다. 구체적인 상황을 말했다.
"생활비는 남편 카드로만 결제해요. 제 명의 계좌에는 월 50만 원이 입금돼요. 아이 용돈 명목이에요."
연화는 커피잔 가장자리를 엄지로 눌렀다. 차갑지도 않은 종이컵이었다. 이 액수보다 가벼운 것이 테이블 위에 있었다.
"아이는 없어요."
나수빈의 타이핑이 또 멈췄다. 이번엔 조금 더 길었다.
서지혁이 물었다.
"증거는요?"
"아직 없어요."
"아직, 이라고 하셨습니다."
연화는 서지혁의 눈을 봤다.
"모을 겁니다."
서지혁이 의자 등받이에 기댔다. 처음으로 질문이 아닌 말을 했다.
"어떻게요?"
"남편 서재에 잠긴 서랍이 있어요. 열쇠는 양복 안주머니에 있고요. 세탁소에 보내는 날 주머니를 확인하면 복제할 수 있어요."
침묵이 왔다. 서지혁의 펜이 멈췄다.
"서랍 안에 두 번째 휴대폰이 있을 가능성이 높아요."
나수빈이 노트북 너머로 연화를 봤다. 가격표를 보던 눈이 아니었다. 이 여자가 어디까지 파악하고 온 건지를 재고 있는 눈이었다.
서지혁의 표정은 바뀌지 않았다.
"그 방법은 쓰지 마세요."
"왜요?"
"비밀침해입니다. 그렇게 확보한 건 재판에서 힘을 잃어요."
연화의 손이 무릎 위에서 접혔다. 전 타임라인의 장면이 겹쳤다. 태욱의 서재. 두 번째 휴대폰. 몰래 찍은 사진들. 그것들을 봉투에 넣어 변호사에게 건넸을 때, 돌아온 대답은 네 글자였다. '증거 능력 없음'. 이의를 제기할 수도 없었다. 불법 취득 증거는 법정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제출한 것 자체가 불리한 심증이 됐다. 그때 모은 것들은 전부 잘못된 방법이었다. 증거가 아니라, 자기 패소의 이유를 모은 것이었다.
"당사자 녹음은요?"
"본인이 참여한 대화를 녹음하는 건 비교적 안전합니다. 몰래 장치를 부착하거나 앱을 설치하는 건 안 됩니다."
"비교적, 이라고 하셨어요."
서지혁이 연화를 봤다. 2초. 단어를 골라 듣는 사람이라는 걸 확인하는 시선이었다.
"정확하시네요."
서지혁이 말을 이었다.
"이기고 싶으시면, 증거를 모으지 말고 증거가 살아남게 하세요."
연화의 등이 곧아졌다. 전 타임라인의 어떤 변호사도 이 말을 해준 적이 없었다. 다 끝나고 나서야, 왜 졌는지 설명해주는 사람들뿐이었다. 이 남자는 지는 법을 알려주는 게 아니라 이기는 순서를 말하고 있었다.
"무엇을 확보했느냐보다, 어떻게 확보했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연화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서지혁이 펜을 집었다.
"지금부터는 남편의 물건이 아니라, 남편의 빈 시간을 보세요. 서랍이 아니라 일정입니다. 공개된 일정과 실제 동선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그 빈 시간이 첫 번째 단서가 됩니다."
연화의 시선이 펜 끝을 따라갔다. 서지혁이 메모지에 한 줄을 적어 테이블 위로 밀었다.
'수요일 저녁 공백 — 공개 일정 대조(회사 공시, 행사, 의전 스케줄)'
"빈 시간은 채워진 시간보다 많은 걸 말해줍니다."
연화가 메모를 집었다. 글씨가 작고 정확했다. 정명희의 필체와는 달랐다. 접어서 핸드백에 넣었다.
나수빈이 노트북을 닫았다. 소리가 건조했다.
"대한그룹이면 상대 법률 대리인이 태산이에요."
연화를 보지 않고 서지혁에게 말한 것이었다. 태산. 국내 최대 법무법인. 소송 전문 변호사만 200명이 넘는 곳이었다.
"알고 있습니다."
서지혁의 대답이 짧았다. 나수빈은 더 말하지 않았다. 노트북을 닫은 타이밍이 의미를 가졌다. 기록할 필요가 없거나, 기록하고 싶지 않거나.
"수임 결정은 서두르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만 협의이혼 절차를 먼저 밟지 마세요. 신청하는 순간 3개월 숙려기간이 돌아가고, 그 시간은 상대에게도 주어집니다."
끝내려고 꺼낸 카드가 상대의 준비 시간이 됐었다. 전 타임라인에서 연화가 가장 먼저 한 일이 협의이혼 신청이었다. 감정이 절차를 앞질렀다. 그 3개월 동안 태욱은 자산을 옮겼다.
"알겠습니다."
연화가 일어섰다. 커피잔에는 끝까지 손을 대지 않았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서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배웅이 아니라 거리를 유지하는 방식이었다.
복도에서 나수빈이 따라왔다. 엘리베이터 앞까지. 버튼을 누르고 기다렸다. 나수빈이 옆에 서 있었다. 키가 연화의 어깨 높이였다. 작은 체구에서 나오는 에너지가 크기와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솔직히 여쭤볼게요."
숫자판을 보면서.
"재벌가 이혼이면 대형 로펌도 있어요. 왜 정연이에요?"
"서 변호사님이 대한그룹 구조를 아시니까요."
"그건 이해충돌 리스크이기도 한데요."
"알아요."
나수빈의 눈이 좁아졌다. 짧은 침묵이 있었다.
"아시면서 오신 거예요?"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문이 열렸다.
"내부를 아는 사람이 제 편이 되면, 리스크인 동시에 레버리지예요."
나수빈이 대답하지 않았다. 연화가 엘리베이터에 탔다. 문이 닫히기 전, 나수빈의 표정이 보였다. 냉소가 아니었다. 처음 보는 것을 처리하는 얼굴이었다. 들어오는 쪽이 아니라, 나가는 쪽에서 인상을 남긴 것이었다.
1층. 정문을 나왔다. 서초동 오후 햇살이 얼굴에 닿았다. 로비의 서늘함이 피부 위에서 걷혔다. 연화는 선글라스를 꺼내 썼다. 건물을 등지고 걸었다. 세 번 망설였던 거리가 짧아져 있었다. 발걸음이 달랐다.
핸드백 안에서 접힌 종이 두 장이 만져졌다. 서지혁의 메모지와, 어젯밤 수첩에서 뜯은 메모. 태욱의 주간 일정과 서재 열쇠의 위치를 적은 것이었다.
수첩 메모를 꺼내 펼쳤다. '서재 열쇠 — 양복 안주머니' 줄을 펜으로 그었다. 쓰지 못할 정보가 아니라, 쓸 차례가 아닌 정보였다. 서랍을 여는 게 아니라, 서랍이 열릴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야 했다. 나머지 일정은 남겨뒀다. 월요일 오전 본사. 화요일 오후 외부 미팅. 수요일 저녁 공백.
메모 두 장을 겹쳐 접어 핸드백에 넣었다.
서초역 계단을 내려갔다. 지하의 찬 공기가 8월의 열기를 잘랐다. 개찰구를 찍기 전, 연화는 걸음을 멈추고 휴대폰을 꺼냈다.
대한그룹 홈페이지. 공시/행사 탭. 이번 주 일정을 열었다. 월요일 이사회, 화요일 전략기획본부 세미나, 목요일 IR 미팅, 금요일 임원 워크숍.
수요일은 비어 있었다.
공식 일정에 없는 저녁. 태욱의 수첩에만 적혀 있는 공백. 공개된 정보와 태욱의 실제 동선 사이에 빈칸이 하나 생긴 것이었다.
연화는 행사팀 대표 번호를 저장했다. '대한그룹 행사팀'. 아직 전화를 걸 단계는 아니었다. 하지만 번호가 저장된 순간, 계획이 실행으로 한 칸 넘어갔다.
휴대폰이 울렸다. 하경이었다.
"언니, 주말에 시간 돼?"
"왜?"
"밥이나 같이 먹자. 언니 얼굴 좀 보게."
목소리에 잠기 대신 걱정이 묻어 있었다. 연화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 목소리가 그리웠다는 걸 알아차렸다.
"토요일 저녁."
"좋아. 성수동 쪽 어때? 새로 생긴 데 있어."
성수동. 전 타임라인에서 아지트를 잡았던 동네. 아직은 아무 의미 없는 지명이었다. 아직은.
"거기로 하자."
전화를 끊었다. 개찰구를 지났다. 플랫폼에 서서 오늘을 정리했다. 불법 증거는 칼이 아니라 독이다. 협의이혼은 아직 꺼내지 않는다. 물건이 아니라 빈 시간을 본다. 수요일 저녁, 공식 일정에 없는 공백. 거기서부터 시작한다.
지하철이 들어왔다. 문이 열렸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수요일 저녁. 첫 번째 빈칸이 생겼다. 이제 채울 차례였다.
문이 닫혔다. 지하철이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