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혈혈(萬血穴)의 공기는 언제나 축축했다.
지상보다 기압이 세 배는 무겁게 짓누르는 이 구덩이 안에서 설무한은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을 허벅지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등은 반듯했다. 눈은 감겨 있었다. 그것만 보면 수련자처럼 보였다.
늑골 안쪽이 달랐다.
전날 밤, 얼굴을 천으로 가린 남자가 혈사곡 입구에 쓰러져 있었다. 설무한이 그의 가슴에 손을 얹었을 때, 경맥 안에서 세 갈래로 뒤엉킨 극독의 진기가 느껴졌다. 오래된 독이었다. 누군가 오랫동안, 조금씩, 공들여 심어놓은 종류의 독이었다.
그는 이성대환공을 발동했다.
옮겨온 진기가 지금도 늑골 사이를 긁어댔다. 손톱도 아니고 발톱도 아닌, 뭔가 날카롭고 뜨거운 것이 안쪽에서 긁는 감각. 설무한은 단장심결의 첫째 구결을 천천히 읊조렸다. 숨을 들이쉬는 데 여섯 박자, 내쉬는 데 여덟 박자. 고통을 내보내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더 깊이 밀어 넣는 방법이었다.
역설적이게도 그게 유일한 방법이었다.
검붉은 토양에서 올라오는 탁기가 코를 찔렀다. 이 땅에는 수십 년 치의 독기가 스며들어 있었다. 그의 독기도, 그 이전에 여기서 정화 수련을 했던 누군가의 독기도. 만혈혈은 그런 곳이었다. 다들 뭔가를 버리고 가는 장소.
설무한이 오른손을 들어 관자놀이에 갖다 댔다.
꾹.
한 번 누르고, 손을 내렸다.
늑골 아래쪽에서 무언가가 조금 잦아들었다.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단전 쪽으로 진기를 모아 독을 한 겹씩 감쌌다. 마치 생선 가시를 발라내듯, 서두르지 않고, 한 올씩.
새벽 첫 빛이 절벽 위에 걸렸다.
그 빛이 만혈혈 바닥까지 닿는 데는 한참이 걸렸다. 설무한은 그 빛이 자신의 손등을 건드리는 순간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떴다. 경맥 안의 독기는 아직 완전히 정제되지 않았지만, 이십사 시간의 제한까지는 여유가 있었다.
그는 몸을 일으켰다. 무릎이 뻐근했다. 긴 밤이었다.
단애절벽을 타고 올라오는 길에 철형목 가시 하나가 소매를 긁었다. 설무한은 찢어진 부분을 내려다봤다가, 그냥 걸음을 옮겼다.
폐인촌까지는 걸어서 한 식경 거리였다.
마을 입구 쪽에서 연기가 올랐다.
설무한의 발걸음이 멈췄다. 아침에 밥을 짓는 연기가 아니었다. 색이 달랐다. 검은빛이 섞인, 뭔가 마른 것이 타는 냄새가 바람에 실려왔다. 그는 턱을 조금 당기며 주변을 살폈다.
움직이는 인기척이 다섯.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설무한이 걸음을 빠르게 했다. 뛰지는 않았다. 이성대환공으로 옮겨온 진기가 아직 정제 중이었다. 급격히 내공을 운용하면 늑골이 먼저 터졌다.
폐인촌의 첫 번째 움막이 시야에 들어왔다.
지붕이 불타고 있었다.
그 앞에 칠성검문의 복장을 한 검수 다섯이 서 있었다. 허리에 칠성문이 새겨진 검패를 찬 자들이었다. 그중 하나가 늙은 여인의 머리채를 잡고 있었다. 여인의 한쪽 다리는 이상한 방향으로 꺾여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움막과 불타는 지붕 사이, 좁은 땅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다시 묻겠다. 설무한이 어디 있느냐."
검수 하나가 차갑게 말했다. 목소리에 억양이 없었다. 업무처럼 들리는 목소리였다.
노파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이빨이 빠진 입으로 뭔가를 웅얼거렸다.
검수가 노파를 발로 걷어찼다.
쿵.
노파가 쓰러지면서 그녀가 짚고 있던 지팡이가 흙먼지 속으로 튕겨나갔다.
그 소리를 들은 순간, 설무한의 경맥이 반응했다.
의도한 것이 아니었다. 이성대환공은 오랜 세월을 거치며 반쯤 굳어버린 무공이었다. 노파의 부러진 갈비뼈에서 뿜어나오는 고통의 기운이 공기를 타고 퍼졌고, 그 기운이 설무한의 경맥을 건드렸다.
늑골 안쪽에서 불이 켜지는 것 같았다.
전날 밤 옮겨온 극독과 지금 막 들어오려는 고통의 기운이 뒤엉키며 내단이 팽창하기 시작했다. 오른쪽 귀 뒤가 뜨거워졌다. 낙인이 있는 자리였다. 그 부분이 진동하듯 떨렸다.
설무한은 이를 꽉 깨물었다. 손등의 핏줄이 솟아올랐다.
'지금은 아니다.'
그는 단장심결로 팽창하는 내단을 눌렀다. 한 번, 두 번, 세 번. 혈폭의 전조가 밀려왔다가 간신히 가라앉았다. 그의 발이 흙을 밟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다섯 검수 중 하나가 먼저 돌아봤다.
"저자다."
소리가 짧았다. 그리고 검수들의 손이 일제히 검 손잡이로 옮겨갔다.
설무한은 멈추지 않았다.
"설무한. 칠성검문의 명을 받아—"
"노파를 일으켜 세워라."
설무한이 말했다. 낮고 평평한 목소리였다.
검수들이 잠깐 굳었다. 그 틈을, 설무한은 그냥 걸어 들어갔다.
첫 번째 검수가 검을 뽑아 수평으로 그었다. 설무한은 상체를 낮추며 그 검 아래를 지나쳤다. 그의 오른손이 검수의 손목을 잡아 비틀었다. 뼈가 비틀리는 소리. 검이 땅에 떨어졌다. 설무한은 그 검수의 어깨를 밀어 다음에 달려오는 검수에게 부딪히게 했다.
두 사람이 겹쳐 쓰러졌다.
남은 셋이 포위 형태로 움직였다. 칠성검문의 검법은 합동전에 적합하게 만들어진 것이었다. 한 명이 치고, 다른 이가 빈틈을 파고드는 방식. 세 개의 날이 정삼각(正三角)으로 좁혀 들어오는 칠성합벽진(七星合壁陣)의 초식이었다.
그들이 동시에 검을 찔러왔다.
설무한은 왼팔로 오른쪽에서 오는 검을 걷어냈다. 소매가 찢어졌다. 피가 흘렀다. 그는 거기에 시선을 주지 않았다. 걷어낸 팔 그대로를 앞쪽 검수의 명치로 밀어 넣었다. 이것이 이성대환공의 부수적 용법이자, 칠성합벽진의 중심을 무너뜨리는 단 하나의 길이었다. 삼각의 꼭지점을 먼저 찌르면 진 전체가 흩어진다는 것을, 그는 전생에서 몸으로 익혔다. 파진거(破陣擧)였다. 마지막 검수가 뒤에서 검을 내려쳤고, 설무한은 옆으로 비켜서며 그자의 팔꿈치를 꺾어 올리는 절관절(折關節)로 받아쳤다.
검이 공중에서 방향을 잃었다.
설무한의 손바닥이 그 검수의 가슴에 닿았다.
의도하지 않은 접촉이었지만, 이성대환공이 반응했다. 검수의 내공이 역류하며 설무한의 경맥으로 흘러들었다. 압축된 칠성검문의 진기가 이미 팽창해 있던 내단과 충돌했다.
설무한의 발이 흙바닥을 박찼다.
가슴 안쪽에서 뭔가 터질 것 같은 압박감이 왔다. 그는 즉각 내공을 손끝으로 몰아 그 진기를 밖으로 밀어냈다. 검수가 튕겨나가며 움막 벽에 등을 박았다. 벽이 허물어졌다.
다섯 검수 모두 땅에 쓰러져 있었다.
설무한은 그 자리에 선 채로 숨을 눌렀다. 왼팔에서 피가 흙으로 떨어졌다. 경맥 안에서는 아직도 무언가가 뒤엉켜 있었다. 칠성검문의 진기가, 전날 밤의 극독이, 노파의 고통의 잔기(殘氣)가 한꺼번에 뒤섞여 있었다.
'실수했다.'
접촉해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다. 정화 수련이 끝나기 전에 다른 내상을 흡수하는 것은 이미 그 자신이 가장 잘 아는 금기였다.
그는 오른손으로 관자놀이를 누르며 단전을 다시 잠갔다.
바닥에는 노파의 지팡이가 있었다.
낡고 끝이 닳아 있었다. 오래 짚은 흔적이 역력했다. 설무한은 그것을 집어들었다. 흙이 묻어 있었다. 그는 소매 끝으로 흙을 닦았다가, 어차피 소매도 찢어진 것을 보고 멈췄다.
노파는 땅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무릎이 좋지 않은 사람처럼, 다리를 조금 옆으로 비틀어 깔고 있었다. 설무한이 지팡이를 내밀었다.
노파는 잠시 그의 얼굴을 봤다가, 말없이 지팡이를 받았다.
"갈비뼈."
설무한이 말했다.
"하나가 금이 갔다. 며칠은 누워 있어야 한다."
노파가 헛웃음 같은 것을 냈다.
"누울 자리가 있어야지. 움막을 봐요."
설무한이 뒤를 돌아봤다. 움막의 지붕은 이미 반쯤 무너져 있었다. 아직 연기가 올랐다. 마을 사람들이 서로 기대어 앉아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감사도, 원망도 아닌, 오래 지쳐 있는 사람들 특유의 무표정함이 있었다.
설무한은 그 시선을 오래 받지 않았다. 시선이 모이는 것이 불편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보다 더 불편한 것이 있었다.
그 눈빛들 안에 담긴 고통의 잔기(殘氣)가, 아직도 정제되지 않은 그의 경맥을 자꾸 건드렸다.
바람이 불었다. 타다 만 움막의 재가 날렸다.
설무한은 왼팔의 상처를 내려다봤다. 깊지 않았다. 그는 무릎을 꿇고 땅에 손바닥을 짚으며 천천히 내공을 하단전으로 가라앉혔다. 검붉은 흙이 손바닥에 묻었다. 차가웠다.
"고통을 옮기는 것은 내 업보이나."
그가 낮게 말했다. 스스로에게 하는 말인지, 쓰러진 검수들에게 하는 말인지 구분이 없었다.
"네놈들의 비명까지 대신 들어줄 생각은 없다."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설무한은 쓰러진 검수들의 품을 뒤졌다.
무기를 거두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다섯이 폐인촌까지 온 데는 이유가 있었다. 명이 있으면 명서(命書)가 있었다. 칠성검문처럼 서열이 엄격한 곳은 구두 명령만으로 외부 임무를 수행하지 않았다.
세 번째 검수의 품에서 봉인된 죽통(竹筒)이 나왔다.
설무한은 죽통의 봉인을 뜯었다. 안에서 접힌 종이가 나왔다. 그는 종이를 폈다.
문서 안에 붉은 낙관이 찍혀 있었다.
의선각(醫仙閣).
설무한의 눈이 그 낙관 위에서 멈췄다. 그는 종이를 더 읽었다. 짧은 문서였다. 지시는 간결했다. 설무한의 소재를 확인하고, 이동하지 못하도록 묶어두라는 것. 그리고.
사흘 후 부각주 남궁설(南宮雪)이 직접 방문할 것이니 그가 도주하지 못하도록 확보하라.
바람이 다시 한 번 불었다.
설무한의 손가락이 종이 위에서 미세하게 멈췄다. 오른쪽 귀 뒤, 낙인이 있는 자리가 발작하듯 뜨겁게 달아올랐다. 단순히 내공의 충돌 때문이 아니었다. 살기(殺氣)였다. 그것도 방금 전의 검수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서늘하고도 정교한 죽음의 기운이 뒤통수를 찔러왔다.
사흘이라던 기한은 기만이었다.
경고는 없었다. 뒤통수의 한기가 날을 세우는 것을 느낀 찰나, 설무한은 상체를 비틀며 허리춤의 단검에 손을 뻗었다. 발을 떼는 것이 먼저였는지, 피가 터진 것이 먼저였는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쿨럭. 검은 피가 입술 사이를 뚫고 터져 나왔다. 한 번이 아니었다. 억눌렸던 것들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것처럼, 두 번째 분출이 목구멍 안쪽 벽을 긁으며 올라왔다. 이성대환공의 부작용이 칠성검문의 진기와 맞물려 단전을 난도질하기 시작한 것이다. 늑골이 안쪽에서 뒤틀리는 감각이었다. 뼈가 부러지는 것이 아니라, 뼈와 뼈 사이에 박힌 무언가가 열 개의 손가락으로 동시에 비틀어지는 것설무한은 떨리는 손으로 바닥에 떨어진 지팡이를 움켜쥐려 했으나, 그림자는 이미 코앞까지 육박해 있었다. 무겁게 가라앉은 공기를 가르며 나타난 그 자의 얼굴이 연기 사이로 드러나는 순간——설무한의 손가락이 굳었다. 이 목소리를, 이 눈빛을, 그가 어찌 잊을 수 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