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 중앙, 부유섬 셀레스티아 고원 위에 세워진 아스테리아 마법학원의 지하실은 늘 축축한 한기로 가득했다. 레오노르 드 발레리우스는 거대한 암석 벽면을 따라 흐르는 레아의 혈관 곁에 섰다. 벽을 짚은 손바닥을 타고 고대 마력의 진동이 뼈마디까지 전해졌다. 수로를 흐르는 붉은 마력의 인광이 그녀의 은빛 머리카락에 기괴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손끝이 잘게 떨렸다. 레오노르는 황급히 오른손을 등 뒤로 숨기며 뒷짐을 졌다. 발레리우스 가문의 장녀에게 떨림은 곧 패배를 의미했다. 전생의 파편이 예리한 유리 조각처럼 뇌리를 긁고 지나갔다. 차가운 찻잔, 입안을 감돌던 비릿한 금속성 향기, 자신을 내려다보던 아버지의 무심한 눈동자까지. 이곳은 지상과 단절된 고립된 성채였다. 학기 말 성운 축제 전까지는 누구도 이 결계를 벗어날 수 없었다. 레오노르는 수로 속에서 소용돌이치는 마력의 흐름을 응시했다. 가문의 정략결혼 도구로 팔려 가기 전, 이 왜곡된 힘을 제어할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뒷짐을 진 손가락이 옷감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체내의 에테르가 혈관을 타고 역류하며 목 안쪽이 바짝 타들어 갔다. 심장 부근에서 시작된 열기가 전신으로 뻗어 나가며 근육을 비틀었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마력이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내벽을 긁어대는 감각에 신음이 잇새를 비집고 나오려 했다.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대신 서늘한 공기의 흐름이 먼저 피부에 닿았다. 어둠이 짙게 깔린 수로 저편에서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레오노르는 본능적으로 턱을 치켜올리며 표정을 갈무리했다. “이런 구석진 곳에서 무얼 하는 거지, 발레리우스의 영애께서.” 낮게 깔린 목소리가 에코 챔버의 소음 사이를 뚫고 들어왔다. 카시안 폰 카이저였다. 그는 제국의 규율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벽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있었다. 흐트러진 흑발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가 레오노르의 일거수일투족을 훑었다. 레오노르는 대답 대신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카시안은 학원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이었다. 7인 평의회의 감시를 비웃으며 금지된 구역을 제집처럼 드나드는 자였다. 그가 한 걸음 다가올 때마다 레오노르의 발끝이 뒤로 물러나려 했다. “길을 잃었을 뿐이에요, 카이저 경.” “길을 잃은 것치고는 시선이 너무 탐욕스럽군.” 카시안의 시선이 그녀의 등 뒤로 향했다. 숨기고 있는 손의 떨림이 옷감의 파동을 타고 전달된 모양이었다. 그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거리를 좁혔다. 레오노르의 콧등에 그의 서늘한 체취가 닿았다. “그 결벽증적인 태도도 이제 한계인가 보지.” 카시안이 손을 뻗어 레오노르의 옆 벽면을 짚었다. 거대한 체구가 그녀를 가두는 벽이 되었다. 레오노르는 숨을 들이켰다. 폐부 깊숙이 들어온 공기가 마력을 자극했다. 에테르가 팽창하며 가슴팍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가문의 명예를 떠올렸다. 냉정함을 유지해야 한다는 침묵의 서 구절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하지만 눈앞의 남자가 내뿜는 압도적인 존재감은 이성적인 판단을 마비시켰다. 카시안의 손가락이 레오노르의 뺨 근처를 스치듯 지나갔다. “레오노르 드 발레리우스, 네 안의 그 뜨거운 것이 곧 터져 나올 것 같군.” 카시안의 목소리는 조롱과 확신이 뒤섞여 있었다. 그는 그녀의 방어 기제를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레오노르는 자신의 마력 등급이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9급 마법사의 안정이 무너지고 붉은 전조가 망막에 어른거렸다. “무례하군요. 비키세요.” “비키면, 저 수로에 몸이라도 던질 생각인가?” 카시안의 물음에 레오노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는 이미 그녀가 왜 이곳에 왔는지 알고 있었다. 혈통 순수성 법령에 묶여 가문의 소모품이 되느니, 금지된 마력을 흡수해서라도 운명을 비틀고 싶어 하는 절박함을 말이다. 레오노르는 뒷짐 지고 있던 손을 앞으로 가져왔다. 하얗게 질린 손가락 끝은 이제 숨길 수 없을 만큼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수로의 마력이 그녀의 진동에 공명하듯 물결쳤다. 웅웅거리는 소음이 고막을 압박했다. “당신이 상관할 바가 아니에요. 난 발레리우스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을 거니까.” “그 이름이 널 죽이고 있다는 생각은 안 해봤나.” 카시안이 상체를 숙였다. 그의 그림자가 레오노르를 완전히 집어삼켰다. 학원의 엄격한 감시 체계가 이 에코 챔버 안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오로지 두 사람의 거친 숨소리와 수로의 물소리만이 공간을 채웠다. 레오노르는 그의 가슴팍을 밀쳐내려 했지만, 손바닥에 닿은 단단한 근육의 감촉에 오히려 손가락이 오그라들었다. 남녀 간의 접촉은 장갑을 벗지 않는 한 손 접촉까지만 허용된다는 에티켓 가이드가 떠올랐다. 지금 이 상황은 이미 사교계에서 매장당하고도 남을 일탈이었다. 카시안은 그녀의 저항을 비웃듯 오히려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숨결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레오노르의 뒷목에 소름이 돋았다. 신체적 접촉이 길어질수록 체내의 에테르 오버로드가 가속화되었다. “폭주는 감정에서 시작되지. 네가 그토록 부정하는 그 감정 말이야.” 카시안의 손이 레오노르의 어깨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도망칠 구멍은 없었다. 레오노르는 질식할 것 같은 압박감 속에서 전생의 기억을 되새겼다. 순종적으로 죽어갔던 그 비참한 결말을 반복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카시안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두려움을 분노로 포장하려 애쓰며, 가느다란 목소리를 쥐어짰다. “당신도 결국 평의회의 개일 뿐인가요? 날 감시하러 온?” “난 개보다는 늑대에 가깝지. 주인을 물어뜯는.” 카시안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그는 레오노르의 어깨에 놓았던 손을 내려 그녀의 허리춤에 걸린 마력 제어구를 건드렸다. 금속성 마찰음이 고요한 지하실에 날카롭게 울렸다. 제어구가 해제되는 순간, 억눌려 있던 마력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레오노르의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심장 박동이 고동칠 때마다 마정석이 타들어 가는 듯한 통증이 전신을 훑었다. 이것이 에테르 오버로드의 전조였다. 카시안은 고통에 일그러지는 그녀의 얼굴을 흥미롭다는 듯 관찰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숙여 레오노르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가져다 댔다. “이 학원의 밑바닥에 무엇이 흐르는지 알려주지. 네가 믿는 그 혈통의 진실 말이야.” 카시안의 입술이 움직일 때마다 금지된 마법 체계의 단어들이 고막을 파고들었다. 제국이 수백 년간 은폐해온, 감정과 마력의 진정한 상관관계에 대한 비밀이었다. 그것은 레오노르가 평생 배워온 모든 가치관을 뿌리째 뒤흔드는 독이었다. “아르크투루스의 혈통만이 특권을 누리는 이유. 그리고 네가 왜 이토록 괴로워해야 하는지.” 말소리가 끝남과 동시에 레오노르의 왼쪽 쇄골 아래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가문의 충성을 맹세하며 새겼던 발레리우스의 인장이었다. 평소라면 은은한 빛을 내야 할 인장이 갑자기 검게 변하며 살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아, 아악!” 레오노르의 입에서 억눌린 비명이 터져 나왔다. 검게 타오르는 인장은 가문의 배신자를 처단하려는 듯 그녀의 생명력을 갉아먹었다. 카시안의 속삭임이 인장의 저주를 깨운 것이 분명했다. 그녀의 몸이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카시안은 추락하는 그녀를 단단히 붙들어 안았다. 검은 연기가 인장에서 피어오르며 지하실의 습한 공기와 섞였다. 레오노르는 흐릿해지는 정신 속에서도 카시안의 눈동자가 기묘한 희열로 번뜩이는 것을 보았다. 그는 비명을 지르는 인장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쳐 올렸다. 서늘한 마력이 검은 불꽃을 덮어눌렀다. 하지만 인장의 저주는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카시안의 마력을 먹어 치우며 더 거세게 요동쳤다. “이제 선택해, 레오노르.” 카시안이 타오르는 그녀의 가슴팍을 지시하며 명령했다. “가문의 인형으로 죽을 건지, 아니면 내 손을 잡고 이 위선을 부술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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