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돌아갈 곳의 냄새
열쇠는 작았다. 엄지손톱보다 조금 큰 크기. 황동색이었지만 광택이 죽어 있었다. 오래된 열쇠. 서아는 윤호의 손바닥 위에 놓인 그것을 봤다.
"네가 찾는 거, 아직 안 버렸을 것 같아서."
윤호가 말했다. 아침 열 시. 서아의 집 앞 골목이었다. 어젯밤 비는 그쳤지만 아스팔트가 아직 젖어 있었다. 물기 위로 햇빛이 반사돼 눈이 부셨다.
"이게 뭔데."
"네 아버지 보관함 열쇠. 명동 쪽 유산 보관소 있잖아. 예전에 이모네 가게 서류 맡긴 데."
서아의 눈이 열쇠에 머물렀다. 명동 유산 보관소.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회사 다닐 때 개인 서류를 맡기던 곳. 보관함 계약은 아버지 명의였고, 서아는 한 번도 열어본 적이 없었다. 아버지가 사라진 뒤에는 보관료가 밀려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찾아가지 않았다.
"보관료는?"
"내가 냈어."
서아가 윤호를 봤다. 윤호는 서아를 보지 않았다. 골목 끝을 보고 있었다. 차가 없었다. 오늘은 감시 차량이 보이지 않았다. 한서진이 어젯밤 AP구파 접근을 차단한 뒤, 배치가 바뀐 것일 수 있었다.
"얼마야."
"월 3만 원. 14개월치."
42만 원. 서아의 지갑에 만 원 두 장이 남아 있었다. 윤호는 그걸 알고 있을 것이다. 서아의 형편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금액을 먼저 말한 것이다. 서아가 물어보기 전에. 빚진 느낌을 줄이려는 배려. 서아는 그 배려가 고마우면서 목이 조였다.
"갚을게."
"됐어."
"갚는다고."
윤호가 처음으로 서아를 봤다. 웃으려다 멈췄다. 어젯밤 골목에서의 얼굴과 달랐다. 낮의 윤호는 평소에 더 가까웠다. 하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눈 아래 그림자가 아직 남아 있었다.
"가져. 열어보고 필요한 거 있으면 가져가."
서아가 열쇠를 받았다. 황동이 손바닥에 닿았다. 차갑지 않았다. 윤호의 체온이 옮겨져 있었다.
"같이 안 가?"
"내가 가면 보관소 아저씨가 신분증 달라고 해. 네 아버지 명의니까 네가 가야 돼."
맞았다. 명의자 가족만 접근 가능한 보관소였다. 윤호가 보관료를 대신 내면서도 보관함을 열지 않은 이유. 열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열지 않은 것이었다. 서아의 것은 서아가 여는 게 맞다고 판단한 것.
"고마워."
"그 말 하지 마."
윤호가 돌아섰다. 두 걸음 걷다가 멈췄다. 뒤를 보지 않고 말했다.
"네가 돌아올 데는 없어질 수도 있어. 그래도 열쇠는 네가 가져."
서아는 그 등을 봤다. 윤호의 어깨가 넓었다. 어젯밤 비에 젖었던 후드 자리에 오늘은 낡은 면 재킷이 걸려 있었다. 윤호가 모퉁이를 돌았다. 사라졌다. 서아는 열쇠를 주머니에 넣고 집으로 들어갔다.
신분증과 수첩, 전화기를 챙겼다. 가방을 메고 나왔다. 명동까지 지하철로 30분. 서아는 강남역으로 걸었다.
지하철 안에서 은솔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아버지 보관함 열쇠 나왔어. 지금 명동 가는 중.' 은솔의 답이 30초 만에 왔다. '사진 다 찍어. 원본 절대 안 돼.'
명동역 3번 출구. 도보 5분. 유산 보관소는 지하 1층에 있었다. 간판이 작았다. '명동 종합 보관 서비스.' 유리문을 밀고 들어갔다. 로비가 좁았다. 카운터 뒤에 50대 남자가 앉아 있었다. 안경을 쓰고 신문을 보고 있었다.
"보관함 열람하러 왔습니다."
남자가 신문을 내려놓고 서아를 봤다. 서아가 신분증을 내밀었다.
"윤서아. 계약자 윤태국 님의 가족 맞으십니까?"
"딸입니다."
남자가 컴퓨터를 확인했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좁은 로비에서 울렸다.
"보관함 B-17. 보관료 완납 상태시네요. 열람실 안쪽에 있습니다."
열람실은 카운터 옆 복도를 지나 오른쪽이었다. 형광등 두 개. 접이식 테이블 하나. 의자 두 개. 벽면에 보관함이 줄지어 있었다. 금속 문에 번호가 붙어 있었다. B-17은 하단 세 번째. 서아는 열쇠를 넣고 돌렸다. 자물쇠가 뻑뻑했다. 14개월 동안 열리지 않은 것이다. 두 번째 시도에서 열렸다.
안에 상자가 하나 있었다. 종이 상자. A4 크기보다 약간 큰 규격. 무게가 있었다. 서아는 상자를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았다. 테이프가 붙어 있었지만 접착력이 죽어 있었다. 손으로 떼어냈다.
상자를 열었다. 서류가 쌓여 있었다. 서아의 손이 멈추지 않았다. 한 장씩 꺼냈다. 법무사 사무실에서 서류 정리하던 습관이 손에 남아 있었다. 위에서부터 순서대로. 꺼낸 순서를 유지하는 것.
첫 번째 묶음. 물류회사 재직증명서, 급여명세서, 연말정산 서류. 아버지가 재무팀장으로 일하던 시절의 것. 2014년부터 2017년까지. 서아는 급여명세서를 한 장씩 넘겼다. 월급 480만 원. 중견 물류회사 재무팀장의 급여. 이 돈으로 서아를 키우고 집세를 내고 살았다. 23억의 채무를 질 만한 규모가 아니었다.
두 번째 묶음. 장부 철이었다. 서아의 손가락이 멈췄다. A4 크기의 갱지에 손으로 쓴 것이었다. 아버지의 글씨. 메모지의 글씨와 같았다. 하지만 이쪽이 더 정돈돼 있었다. 시간을 들여 쓴 글씨.
서아는 장부 첫 장을 읽었다. 날짜, 금액, 거래처 코드. 세 열이 반복됐다. 날짜는 2015년 3월부터 시작했다. 금액은 수백만 원 단위. 거래처 코드는 알파벳과 숫자의 조합. 서아는 코드를 보는 순간 숨이 짧아졌다.
KC가 있었다. KC-0315. KC-0422. KC-0617. 메모지에 적혀 있던 것과 같은 체계. 하지만 장부에는 메모지보다 훨씬 많은 번호가 적혀 있었다. 한 페이지에 열두 개. 장부가 스물세 장. 최소 200건 이상의 거래였다.
아버지가 채권 조각의 이동을 기록하고 있었다. 단순한 명의자가 기록을 남길 이유는 없었다. 기록을 남겼다는 건, 추적하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서아는 전화기를 꺼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한 장씩. 장부 전체. 표지부터 마지막 장까지. 사진을 찍으면서 내용을 읽었다. 눈이 숫자를 훑는 속도가 빨랐다. 법무사 사무실에서 채무 서류를 분류하던 감각이 손과 눈에 남아 있었다.
열다섯 번째 장에서 멈췄다. 금액 열에 다른 패턴이 나타났다. 앞의 열네 장은 수백만 원 단위였다. 열다섯 번째부터 금액이 뛰었다. 3억 2천만. 5억 8천만. 7억 1천만. 단위가 바뀌었다. 날짜는 2016년 2월.
2016년. 메모지 뒷면의 날짜. 2016.03.17. 금액이 뛴 시점과 한 달 차이. 서아는 수첩에 적었다. '2016.02 금액 급등. 2016.03.17 메모지 날짜. 1개월 간격. 사건 연결 가능성.'
장부를 계속 넘겼다. 스물한 번째 장. 금액 옆에 메모가 적혀 있었다. 아버지의 글씨. '이전 완료. 확인 불가.' 네 단어. 서아는 그 네 단어를 세 번 읽었다. 이전 완료. 무엇의 이전인지. 확인 불가. 무엇을 확인할 수 없었는지.
스물세 번째, 마지막 장. 서아의 손가락이 종이 위에서 멈췄다.
도장이 찍혀 있었다. 빨간 인주. 오른쪽 하단. 원형 도장. 서아는 그 도장을 들여다봤다. 한자가 새겨져 있었다. 네 글자. 서아는 한자를 읽을 줄 알았다. 법무사 사무실에서 등기부등본의 한자를 매일 읽었다.
한성회가 아니었다.
한성회의 도장은 '翰城會'였다. 세 글자. 서아는 그 도장을 서류에서 수십 번 봤다. 이 도장은 네 글자였다. 다른 조직이었다. 서아는 한자를 수첩에 옮겨 적었다. 획이 복잡했다. 정확하게 적기 위해 두 번 확인했다.
사진을 찍었다. 도장 부분만 확대해서 세 장. 전체 페이지로 한 장. 클라우드에 올렸다.
상자 안에 서류가 더 있었다. 세 번째 묶음. 봉투에 담긴 것들. 영수증, 명함, 메모지 조각들. 서아는 하나씩 꺼내 사진을 찍었다. 명함 중 하나가 눈에 걸렸다. '명동 종합 금융 자문.' 개인 명함이었다. 이름은 박종구. 직함은 없었다. 전화번호만 적혀 있었다.
서아는 명함을 봉투에 다시 넣었다. 상자의 모든 서류를 원래 순서대로 되돌려 넣었다. 상자를 보관함에 넣고 잠갔다. 열쇠를 주머니에 넣었다. 원본은 여기 둔다. 사진이 있으니 충분했다.
열람실을 나왔다. 카운터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다 보셨습니까?"
"네. 감사합니다."
보관소를 나와 지상으로 올라왔다. 명동 거리가 시끄러웠다. 관광객과 직장인이 섞여 있었다. 서아는 그 사이를 걸으며 은솔에게 전화를 걸었다.
"찾았어. 장부 철이 있었어."
"뭐가 들어 있어?"
"KC 코드가 200건 넘게 기록돼 있어. 그리고 2016년 2월에 금액이 급등해. 수백만 원에서 수억 원으로."
전화기 너머로 은솔이 숨을 참는 소리가 들렸다.
"그게 채권 조각 이동 기록이면, 네 아버지가 직접 추적한 거야."
"나도 그렇게 봐. 그리고 마지막 장에 도장이 찍혀 있어. 한성회 도장이 아니야."
"뭐?"
"네 글자야. 사진 보낼게."
서아는 도장 사진을 은솔에게 보냈다. 걸으면서. 명동 거리의 소음이 전화기를 통해 은솔에게도 들렸을 것이다.
"서아야, 이거 진짜면 한성회 말고 다른 데가 관여했다는 거잖아."
"응. 아버지 빚이 한성회 단독이 아닐 수 있어."
서아는 그 말을 하면서 걸음이 느려졌다. 아버지의 빚. 한성회가 만든 것이라고 생각했다. 주명철 고문이 아버지를 방패막이로 쓴 것이라고. 하지만 장부의 도장은 다른 가능성을 가리키고 있었다. 한성회 바깥의 누군가. 제3세력.
"은솔아, 도장 한자 해석 좀 해줘. 내가 수첩에 적었는데 정확한지 확인해야 해."
"사진 받으면 바로 볼게. 근데 서아야, 조심해. 한성회 모르게 움직이고 있는 거 들키면 안 돼."
서아는 전화를 끊었다. 명동역 입구에서 멈춰 섰다. 지하철 계단을 내려가려다 뒤를 돌아봤다. 아무도 따라오지 않았다. 적어도 눈에 보이는 범위에서는.
계단을 내려갔다. 교통카드를 찍고 플랫폼에 섰다. 전화기를 열어 장부 사진을 다시 봤다. 열다섯 번째 장. 금액이 뛴 지점. 2016년 2월. 한 달 뒤 메모지 뒷면의 날짜. 아버지는 금액이 뛰는 걸 보고, 날짜를 따로 기록해둔 것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표시하려고.
지하철이 왔다. 탔다. 자리에 앉았다. 창밖에 터널 벽이 지나갔다.
전화기가 울렸다. 모르는 번호. 서아는 받지 않았다. 두 번째 울렸다. 같은 번호. 세 번째. 서아는 받았다.
"윤서아 씨."
오민재였다. 번호가 다른 건 다른 전화기를 쓴 것이었다.
"네."
"오늘 오전에 명동에 가셨습니까."
서아의 등이 의자에서 떨어졌다. 알고 있었다. 오민재가 서아의 이동을 추적하고 있었다. 감시 차량이 보이지 않았던 건, 없어진 게 아니라 방식이 바뀐 것이었다.
"보관함을 열어봤습니다."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었다. 오민재는 이미 알고 있었다. 부정하면 오히려 의심을 키울 뿐이었다.
"보관함의 내용물은요."
"아버지 개인 서류입니다."
전화기 너머로 0.5초의 침묵이 있었다. 오민재가 다음 말을 고르고 있었다.
"다음부터는 말하고 움직이십시오."
서아는 그 문장의 무게를 쟀다. 명령이었다. 하지만 위협은 아니었다. 오민재의 톤은 언제나 같았다. 경어 안에 선을 넣는 방식. 한서진은 명령했고, 오민재는 경고했다. 서아는 그 차이를 알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보관함의 서류는 가져오셨습니까?"
"원본은 보관함에 뒀습니다."
다시 0.5초. 원본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건, 원본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었다. 사본을 만들었다는 뜻이었다. 오민재도 알 것이다.
"알겠습니다."
전화가 끊겼다. 서아는 전화기를 무릎 위에 놓았다. 지하철이 다음 역에 멈췄다. 사람이 타고 내렸다. 서아는 움직이지 않았다.
오민재가 서아의 이동을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어젯밤 감시 차량이 사라진 게 아니라, 더 정밀한 방식으로 바뀐 것이었다. 차량이 아니라 전화기 위치. 교통카드 기록. 서아는 보이지 않는 망 안에 있었다. 피부에 닿지 않지만 사방에 있는 망.
강남역에 내렸다. 계단을 올라 밖으로 나왔다.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봤다. 황동색. 윤호의 체온은 이미 식어 있었다. 서아의 체온이 대신 옮겨져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골목 입구에서 멈췄다. 윤호가 서 있던 자리. 아침의 물기는 말라 있었다. 아무 흔적도 없었다. 서아는 그 자리를 지나쳐 걸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갔다. 가방을 내려놓고 수첩을 펼쳤다. 장부 사진을 노트북에 옮겼다. 화면에 띄워놓고 처음부터 다시 봤다. KC 코드. 날짜. 금액. 도장.
도장의 네 글자가 화면에서 빛났다. 한성회가 아닌 이름. 아버지의 빚이 한 곳에서 온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가능성. 서아는 그 가능성을 수첩에 적었다. '제3세력. 도장 확인 필요. 은솔 회신 대기.'
수첩을 닫았다. 창밖을 봤다. 오후의 햇빛이 골목에 비스듬히 들어와 있었다. 내일이면 삼성동으로 간다. 한서진의 집. 이 골목에서 멀어진다. 윤호의 우산이 닿지 않는 곳으로.
서아는 책상 서랍을 열었다. 윤호의 비닐우산이 접혀 들어 있었다. 편의점 태그가 아직 달려 있었다. 2,500원. 서아는 우산을 꺼내지 않았다. 서랍을 닫았다.
전화기를 들었다. 윤호에게 메시지를 썼다. '열쇠 고마워. 내일부터 좀 멀리 가게 될 것 같아. 연락은 할게.' 보내기를 눌렀다. 답은 오지 않았다. 서아는 기다리지 않았다. 윤호는 답장이 늦는 사람이 아니었다. 답을 하지 않는 것이 답이었다.
장부의 마지막 페이지를 다시 열었다. 도장. 빨간 인주. 네 글자. 한성회 바깥의 이름.
서아는 그 도장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화면이라 차갑기만 했다. 아버지가 이 도장을 봤을 때 무슨 생각을 했을지 서아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상자에 넣어 보관함에 잠가둔 건, 버리지 못한 것이 아니라 남겨둔 것이었다. 누군가 열어주기를.
서아는 노트북을 닫지 않았다. 내일까지 해야 할 것이 남아 있었다. 삼성동 입성 전에 정리할 것들. 수정안 최종본, 특별한정승인 신청서 초안, 그리고 이 도장의 정체.
밖에서 바람이 불었다. 창문 틈으로 골목의 냄새가 들어왔다. 젖은 아스팔트와 건조한 먼지가 섞인 냄새. 이 골목의 냄새. 서아는 그 냄새를 한 번 깊이 들이쉬었다.
돌아올 수 있을지 모르는 곳의 냄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