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새해
새해 0시가 되면, 누군가의 인생은 끝난다.
이 업계에서는 모두가 그걸 알고 있었다. 매년 같은 시간에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달라지는 것은 제물의 이름뿐.
시상식이 끝나고 한 시간이 지났다.
청담 펄리스 2층 VVIP 라운지. 연말 시상식 뒤풀이 장소는 해마다 같았다. 같은 샴페인, 같은 소파, 같은 웃음소리. 달라지는 건 자리 배치뿐이었다. 올해도 강이준은 가장 안쪽 자리에 앉았다.
업계 서열의 꼭대기. 15년 동안 스캔들 한 번 없이 쌓아올린 자리. 그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이 방에 없었다.
"이준 선배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후배 배우가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이준은 잔을 기울이며 미소를 만들었다. 정확히 3초. 눈이 웃지 않는다는 걸 이 거리에서 알아볼 사람은 없었다.
"고마워요. 좋은 작품 기대하겠습니다."
후배가 물러갔다. 또 다른 후배가 다가왔다. 아까와 똑같은 표정, 똑같은 인사. 이준은 똑같은 미소로 똑같은 답을 돌려주었다. 이 자리에서 필요한 것은 진심이 아니었다. 정확한 타이밍의 정확한 표정이었다. 그것만 있으면 됐다. 15년 동안 그래 왔으니까.
한도윤이 뒤에서 물잔을 건네주었다. 이준은 받지 않았다. 이 자리에서 물을 마시면 술을 못 마시는 사람처럼 보인다. 술을 못 마시는 사람은 약점이 있는 사람이다. 약점이 있는 사람은 자리를 잃는다. 물잔 하나에도 계산이 필요한 곳이었다.
맞은편 소파에서 웃음소리가 터졌다. 올해 신인상을 받은 배우였다. 스물넷. 눈이 반짝거렸다. 3년 후에도 저렇게 웃을 수 있을까. 이준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의미 없는 생각이니까. 대신 손목시계를 보았다.
11시 47분. 13분 남았다.
해마다 새해가 되면 하나의 기사가 터진다. 모두가 알고 있었다. 모두가 기다리고 있었다. 올해의 제물이 누구일지. 이 방에 있는 사람들 중 누구라도 될 수 있었다. 그래서 모두가 웃고 있었다. 요즘처럼 자연스럽게.
이준은 잔에 담긴 샴페인을 보았다. 기포가 올라오다 사라졌다. 올라오다 사라졌다. 자신이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올해도 아니었고, 내년도, 그 다음 해도 아니었다. 스캔들이 터질 구멍 자체가 없었다. 15년 동안 단 하나의 구멍도 만들지 않았으니까.
그게 15년 관리의 대가였다.
휴대폰이 진동했다. 박대건.
[내일 아침 8시. 본사.]
그게 전부였다. 새해 첫날 아침에 부르다니. 두 가지 중 하나. 대형 투자 안건이거나, 대형 사고이거나. 박대건은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올 것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 확신이 불쾌했다. 그리고 그 확신이 틀린 적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준은 화면을 끄고 주머니에 넣었다.
"나가자."
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박자 늦은 반응. 도윤은 항상 그랬다. 이준이 먼저 일어나면 반 박자 뒤에 따라서는 사람. 7년째 그 박자가 틀린 적은 없었다.
☆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카드키를 찍지 않으면 층수 버튼이 작동하지 않는다. 청담 펄리스의 보안은 그 정도였다. 도윤이 카드를 찍고 버튼을 눌렀다.
"형, 오늘 박 대표님 문자 봤어요?"
"봤어."
"…무슨 일일까요?"
이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가 지하 2층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자 주차장의 차가운 공기가 흘러들었다.
드롭오프 존에 세워둔 차까지. 파파라치가 단지 밖에서 대기하더라도 차 안의 인물을 확인할 수 없는 구조. 이 동선을 아는 사람은 도윤뿐이었다. 7년치 베테랑의 특권.
차에 타자 도윤이 시동을 걸었다. 주차장을 빠져나가면서 말했다.
"형,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손목시계를 보았다. 11시 58분.
"…고마워."
창 밖으로 서울의 밤이 지나갔다. 청담대교를 건너는 동안 한강 위로 불빛이 흔들렸다. 2분 뒤면 새해. 어딘가에서 폭죽 소리가 날 것이고, 어딘가에서 기사가 올라올 것이었다. 누군가의 새해는 폭죽으로 시작하고, 누군가의 새해는 기사로 시작된다.
이준은 눈을 감았다. 잠을 자야 했다. 내일 아침 여덟 시까지 본사. 박대건은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올 것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눈을 감았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한강 위의 불빛이 눈꺼풀 너머로 깜박였다. 자정을 알리는 폭죽 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도윤이 라디오를 틀었다가 이준의 표정을 보고 껐다. 새해 카운트다운을 하는 진행자의 목소리가 1초 만에 끊겼다.
새해가 시작되었다. 차 안은 조용했다. 강남대로의 가로등이 차례로 지나갔다. 이준은 가로등을 세지 않았다. 대신 내일 아침 박대건의 얼굴을 떠올렸다. 투자 안건일 때의 얼굴과 사고일 때의 얼굴. 둘 다 같았다. 박대건은 어떤 상황에서도 같은 얼굴을 하는 사람이었다.
이준은 눈을 뜨지 않았다.
☆
새벽 세 시에 휴대폰이 울렸다.
도윤이었다. 새벽 세 시에 전화하는 사람은 그밖에 없었다.
"형, 팩트인사이트 기사 올라왔어요."
목소리가 평소와 달랐다. 반 톤 높았다. 도윤은 긴장하면 목소리가 올라가는 사람이었다.
이준은 침대 옆 테이블에서 태블릿을 집었다. 화면이 켜졌다. 제목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단독〕 강이준, 열애 인정 — 상대는 해체 위기 걸그룹 멤버
사진이 있었다. 한강 잠원지구. 차 안에서 찍은 것치고는 해상도가 높았다. 운전석에 자신, 조수석에 여자. 얼굴이 반쪽만 보였다. 창문 쪽머리와 턱선, 미세하게 보이는 입꼬리의 선.
이준은 사진을 확대했다. 천천히. 픽셀이 흐려졌지만 충분했다. 운전석의 자신은 분명했고, 조수석의 여자는 — 모르는 얼굴이었다.
얼굴을 모른다는 것은 두 가지를 의미했다. 진짜가 아니거나, 자신의 기억 밖의 사람이거나. 둘 다 같은 결론이었다. 누군가 짠 것이다.
기사 본문을 스크롤했다. '관계자에 따르면 두 사람은 수개월째 만남을 이어온 것으로 알려졌다.' 관계자. 이준은 그 단어의 무게를 알고 있었다. 이 업계에서 '관계자'는 보통 당사자 측 사람이었다. 자신의 측근 중에 이런 정보를 흘릴 사람은 없었다. 그러면 반대쪽이다.
댓글이 이미 수백 개였다. 새벽 세 시인데. 이 업계의 팬들은 잠을 자지 않는다.
— 강이준이 연애를? 15년 만에? ㄹㅇ?
— 사진 보니까 진짜인듯... 팩인 기사잖아
— 아이돌이면 누구? 이름 왜 안 나와?
— 조수석 여자 얼굴 반쪽만 보이는데 분석 가능?
이준은 댓글을 더 읽지 않았다. 댓글은 팩트가 아니라 감정이다. 감정에는 정보가 없다.
손목시계를 보았다. 3시 4분. 초침이 움직이는 것을 3초간 지켜보았다.
"박 대표님 연락 됐어?"
"…안 받으십니다."
"회사 통해서 얘기하시죠."
태블릿을 엎었다. 3초면 충분했다.
도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형… 진짜예요?"
창 밖으로 한남동의 새벽이 보였다. 매봉산 능선 너머로 하늘이 희미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3시간 전에는 어두웠던 하늘이 이미 달라져 있었다.
"아니야."
목소리는 평소와 같았다. 그게 더 문제였다. 진짜였다면 목소리가 달라졌을 것이다. 이준은 그렇게 생각했다. 아직은.
전화를 끊고 다시 천장을 보았다. 박대건이 전화를 받지 않는 이유를 생각했다. 받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으니까. 아침 여덟 시에 부른 이유도 같았다. 기사가 터질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기사가 터지기 전에 부른 것이 아니라, 터진 후를 위해 부른 것이다.
이준은 천장을 보며 계산했다. 기사 업로드 시각, 새벽 2시 47분. 박대건의 문자, 어제 밤 11시. 기사보다 세 시간 빨랐다. 알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혹은 — 설계했다는 뜻이었다.
몸을 일으켜 창가로 갔다. 한남동의 새벽은 고요했다. 건물 사이로 보이는 하늘이 검은색에서 남색으로 바뀌고 있었다. 커튼을 치지 않은 창문에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15년 차 톱스타의 얼굴. 광고판에서 튀어나온 듯 흠 없는 얼굴. 그 얼굴이 지금 새벽 세 시에 한남동 아파트 창문에 비치고 있었다.
이준은 자신의 눈을 보았다. 차가웠다. 그건 다행이었다. 차가운 것은 통제되고 있다는 뜻이니까.
잠은 오지 않았다.
☆
블랙홀 엔터테인먼트 본사. 17층 대표실.
박대건은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새해 첫날 아침이었지만 와이셔츠에는 구김 하나 없었다. 위기일수록 여유로운 사람. 이준은 그 여유가 어디서 오는지 잘 알고 있었다.
"앉아. 봤지?"
이준은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커피는 거절했다. 대화에 필요한 것만 받아들이는 것이 그의 방식이었다.
"모르는 얼굴입니다."
"당연하지."
박대건이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소리가 나지 않았다.
"내가 짰으니까."
공기가 바뀌었다.
이준은 박대건을 보았다. 15년 동안 이 사람의 얼굴을 봐왔다. 투자 결정을 내릴 때, 신인을 버릴 때, 거짓말을 할 때.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은 진심이었다. 그리고 진심일 때의 박대건이 가장 위험했다.
"이유를 듣겠습니다."
박대건이 탁자 위의 리모컨을 눌렀다. 벽면 스크린에 화면이 떴다. 실시간 검색어 순위, 포털 뉴스 배치, 커뮤니티 반응 모니터링 화면. 숫자들이 붉은색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강이준 열애', '강이준 여자친구', '강이준 아이돌'. 새해 첫날부터 자신의 이름이 이런 단어들과 붙어 다니고 있었다.
"차서린."
이준의 손가락이 무릎 위에서 멈췄다.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3년 전에 끝난 관계. 완벽하게 정리했다고 생각했는데, 정리된 것은 이준 쪽뿐이었던 모양이다. 마지막으로 본 그녀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한남동 주차장. 하이힐 소리가 콘크리트에 부딪히는 소리. 돌아보지 않았다. 이준은 사람이 돌아서면 보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때도 그랬다. 그래서 그 뒷모습만 기억에 남았다.
"어제 저녁 인터뷰를 했어. 내일 저녁 여성지에 실린다. '강이준과의 3년, 그리고 배신.' 제목은 확정이야."
"…뭐라고 했습니까?"
"전부 다 해. 보호처분도 없이 하더구나. 이 기사 나가면 네 광고 10개가 전부 흔들린다. 계약서에 뭐라고 돼 있는지 알잖아."
알고 있었다. 품위유지조항. 위반 시 계약금의 2배에서 3배. 브랜드 10개 합산이면 위약금만 수십억. 업계에서 그런 숫자가 거론되는 사람은 한 손에 꼽힌다. 이준은 그 안에 들었다. 15년이 걸렸다. 그리고 차서린의 인터뷰 하나로 그 15년이 흔들릴 수 있었다.
"그래서요."
목소리는 평소와 같았다.
"덮으려고 하는 겁니다."
박대건이 미소를 지었다. 투자 결정을 내릴 때의 얼굴.
"얼에 얼을 덮는 거지."
박대건이 서랍에서 봉투를 꺼냈다. 투명한 봉투 안에 문서가 들어 있었다. 투명한 봉투, 투명한 의도.
"열애설을 열애설로 덮는다. 차서린 기사가 나가기 전에, 니가 먼저 열애를 인정해. 다른 사람과."
"위장입니까."
"당연하지."
박대건이 봉투를 테이블 위에 놓았다.
"상대는 정해두었어. 해체 직전 걸그룹 멤버. 빚이 5억. 안 할 이유가 없어."
이준은 봉투를 보았다. 열지 않았다.
"계약기간은요."
"차기작 방영 종료까지. 6개월."
"위약금은."
"안에 다 있어."
박대건이 커피를 들었다. 여유로웠다. 모든 것을 설계한 사람의 여유. 이준은 그 여유를 15년 동안 봐왔다. 처음에는 안심이 되었고, 나중에는 익숙해졌고, 지금은 — 그냥 그런 것이었다.
"이름이 뭐예요?"
"서은아. 걸그룹 루나틱 리더."
이준은 그 이름을 반복하지 않았다.
☆
봉투를 집었다. 투명한 비닐 사이로 문서의 글자가 보였다. 깔끔한 활자. 감정이 들어갈 틈 없는 글씨. 열두 페이지. 위약금 조항만 세 페이지였다.
박대건은 역시 철저했다. 사람을 묶는 방법을 잘 아는 사람이니까. 이 봉투가 준비된 시점을 생각했다. 사진이 나온 시점이 아니라 그 전부터. 자신이 이 방에 들어오기 전부터 모든 것이 정해져 있었다.
페이지를 넘겨보지 않았다. 보지 않아도 될 내용이었다. 중요한 건 구조였다. 박대건이 이걸 준비했다는 것. 기사가 나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 아니 — 기사를 터뜨린 것이 박대건 자신일 수도 있다는 것.
천천히 봉투를 내려놓았다.
"하나만 묻겠습니다."
박대건이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그 사람은 알고 있습니까. 자기가 무엇에 끼워지는지."
"빚이 5억인 사람에게 무슨 설명이 필요해?"
그러니까 아무것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빚이 5억인 사람은 선택할 수 없다. 선택할 수 없는 사람에게는 설명할 필요도 없다. 박대건의 논리는 항상 그랬다. 깔끔하고, 잔인하고, 정확했다.
이준은 일어섰다.
"하겠습니다."
말이 밀려나온 것은 아니었다. 계산이었다. 항상 그랬듯이. 차서린의 기사가 나가면 피해는 측정 불가. 위장 열애로 덮는 것이 피해 최소화 루트. 단순한 산술. 감정이 들어갈 자리는 없었다.
박대건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너야. 빠르고 정확해."
이준은 코트를 입었다. 문손잡이에 손을 얹은 순간, 박대건이 말했다.
"모레 두 시. 누아르에서 만나. 본인이 온다."
이준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괜찮습니다."
문을 열고 복도로 나왔다. 한도윤이 벽에 기대어 기다리고 있었다. 얼굴을 보니 잠을 못 자고 온 것 같았다. 이준은 자고 온 것 같았다. 자고 오지 않았지만.
"형, 괜찮아요?"
"여덟 시 반에 누아르 예약 잡아줘. 시크릿 룸."
"…누구 만나는데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카드키가 인식되고 1층 버튼에 불이 들어왔다.
이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기억할 필요가 없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6개월이면 끝나는 이름.
—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