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조건
눈이 마주친 순간, 이준은 세 가지를 읽었다.
첫째, 눈동자가 흔들리지 않았다. 긴장하고 있었지만 숨기려 하지 않았다. 숨기지 않는다는 것은 두 가지 중 하나다. 숨길 줄 모르거나, 숨기지 않는 것 자체가 전략이거나.
둘째, 자세가 곧았다. 등받이에 기대지 않았다. 돈이 필요한 사람은 보통 움츠러든다. 몸을 작게 만든다. 서은아는 그러지 않았다. 어깨가 좁았지만 펴고 있었다. 공항 사진에서 보았던 그 좁은 어깨. 하지만 방향이 달랐다. 숙인 어깨와 편 어깨는 같은 너비라도 다른 사람이다.
셋째, 테이블 위에 놓인 손. 깍지를 끼지 않았다. 양손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면접관 앞의 자세가 아니었다. 기다리는 사람의 자세였다. 이미 결정을 내린 사람의 자세.
3초. 이준은 그 안에 결론을 내렸다. 무너지는 사람은 아니었다.
의자를 당겨 앉았다. 박대건은 오지 않았다. 설계한 사람은 현장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도 박대건의 방식이었다. 설계자는 무대 위에 서지 않는다. 무대 위에 서는 것은 배우의 일이다.
"강이준입니다."
이름을 말했다. 보통은 그것만으로 대화의 주도권이 넘어온다. 15년 동안 그래 왔다. '강이준'이라는 세 글자를 말하면 상대의 눈이 약간 커지고, 목소리가 반 톤 높아지고, 자세가 달라진다. 후배 배우, 투자자, 감독, PD, 기자. 매번. 예외 없이.
"서은아입니다."
눈이 커지지 않았다. 목소리가 높아지지 않았다. 자세가 달라지지 않았다.
이준은 그녀를 다시 보았다. 방금의 3초와는 다른 시선으로. 3초의 관찰이 아니라, 3초의 재평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그리고 침묵. 이준은 침묵을 무기로 쓸 줄 아는 사람이었다. 먼저 말하는 쪽이 지는 게임. 15년 동안 그 게임에서 진 적이 없었다. 시크릿 룸의 간접 조명이 테이블 위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서은아의 손가락 그림자가 길었다. 피아노를 치는 손이라고 생각했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주문한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왔다. 웨이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가 나갔다. 3초. 그 3초 동안 바깥의 소리가 흘러들었다. 재즈 피아노. 누아르의 배경음악. 문이 닫히자 다시 정적이었다.
10초. 20초. 30초.
서은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계약서는 읽었습니다."
이준의 손가락이 테이블 위에서 멈췄다. 읽었다. 이미 읽었다는 뜻이었다. 박대건이 보냈다는 뜻이었다. 자신에게 준 봉투와 같은 내용일 것이다. 아니 — 다를 수도 있었다. 갑이 을과 병에게 같은 계약서를 보여주리라는 법은 없으니까.
"조건을 확인하셨습니까."
"네. 확인했습니다."
목소리가 고요했다. 떨림이 없었다. 5억의 빚을 지고, 해체 위기의 그룹을 이끌고, 남의 위장 연애 상대로 불려 나온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이준은 그 고요함의 출처를 생각했다. 체념인가. 결심인가. 둘은 비슷하게 고요하지만 방향이 다르다. 체념은 가라앉고, 결심은 단단해진다.
"그리고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이준은 고개를 기울이지 않았다. 기울이면 관심을 보이는 것이 된다. 관심은 주도권을 내주는 것이다.
"뭡니까."
"어젯밤 기사 사진, 조수석에 있던 사람이 저입니까?"
공기가 멈춘 것 같았다. 이준은 그녀를 보았다.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질문의 의미를 생각했다. 사진 속 인물이 자신인지 묻는 것이 아니었다. 사진 속 인물이 자신으로 '설정되어' 있는지 묻는 것이었다. 차이는 컸다. 전자는 무지이고, 후자는 이해다.
이 사람은 구조를 파악하고 있었다.
"아닙니다. 당신이 아닙니다."
"알고 있습니다."
안다고 했다. 이준은 입을 다물었다.
"사진은 합성이거나 다른 사람이겠죠. 하지만 내일부터 저인 것이 되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서은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이준은 잠깐 — 아주 잠깐 — 불편했다. 표정이 변하지 않는 것은 자신의 영역이었다. 15년 동안 쌓아온 영역. 이 사람이 그 안에 서 있었다.
☆
서은아가 말했다.
"조건이 있습니다."
이준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마셨다. 조건. 빚이 5억인 사람이 조건을 말한다. 박대건이 들었다면 웃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준은 웃지 않았다. 조건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무너지지 않았다는 뜻이니까.
"말씀하시죠."
"루나틱을 살려주세요."
이준은 잔을 내려놓았다. 소리가 나지 않았다.
"해체를 막아달라는 뜻입니까."
"아뇨. 해체는 이미 결정됐습니다."
목소리가 흔들리지 않았다. 결정됐다고 말할 때 흔들리지 않는 것은 이미 울 만큼 울었다는 뜻이다. 이준은 그것을 알았다. 15년 동안 사람을 봐왔으니까.
"남은 건 마지막 앨범 하나예요. 제대로 된 무대 한 번. 멤버들이 다음 단계로 갈 수 있는 발판. 그걸 만들어주세요."
이준은 서은아를 보았다. '루나틱'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 눈이 달라졌다. 0.5초 동안. 빛이 아니었다. 깊이였다. 무대 위 사진에서 보았던 그 눈. 센터에 서서 카메라를 정면으로 보던 그 눈이 0.5초 동안 돌아왔다. 연습실 영상에서 막내의 어깨를 잡던 손과 같은 방향의 빛이었다.
이준은 15년 동안 사람의 눈을 읽어왔다. 투자자의 눈, 감독의 눈, 상대 배우의 눈. 진심인지 거짓인지 구별하는 것은 호흡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서은아의 눈은 진심이었다. 0.5초의 변화가 증거였다. 의지로 통제할 수 없는 시간. 연기가 아닌 시간.
"제 관할 밖의 일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강이준이라는 이름이 붙으면 관할이 바뀌는 일이 있죠."
틀린 말이 아니었다. 걸그룹의 마지막 앨범. 이준의 이름이 붙으면 — 정확히는, 이준의 연인이라는 타이틀이 붙으면 — 미디어의 관심이 몰린다. 관심이 몰리면 음원 차트에 반영된다. 차트에 오르면 무대가 생긴다. 무대가 생기면 이력이 남는다. 단순한 산술이었다.
이준은 서은아의 요구를 다시 생각했다. 마지막 앨범. 제대로 된 무대 한 번. 발판. 세 단어. 자신을 위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빚이 5억인 사람이 자신의 빚을 탕감해달라고 하지 않았다. 멤버들의 다음 단계를 요구했다. 이준은 그것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 몰랐다. 이타심인가. 전략인가. 전략이라면 훌륭한 전략이었다. 이타심이라면 — 이준은 그 단어를 오래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동시에 위험도 계산했다. 위장 열애 자체가 하나의 도박이다. 거기에 상대 그룹의 컴백까지 엮이면 변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팬덤 반응, 미디어 노출 빈도, 기자들의 취재 밀도. 변수가 늘면 통제력이 떨어진다. 통제력이 떨어지면 구멍이 생긴다. 구멍이 생기면 —
이준은 계산했다. 3초. 5초. 8초. 계산이 끝나지 않았다. 드문 일이었다. 보통 3초면 끝난다. 8초가 걸렸다는 것은 변수가 계산 범위를 넘었다는 뜻이거나, 다른 무언가가 계산을 방해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서은아의 표정이 — 처음으로 — 미세하게 변했다. 입꼬리가 아주 조금. 거절이 아니라 보류. 그 차이를 읽은 것이었다. 거절이 아닌 것에서 가능성을 읽는 사람.
"감사합니다."
☆
서은아가 가방에서 봉투를 꺼냈다. 투명한 봉투. 같은 봉투였다. 서명란에 이름이 적혀 있었다. '서은아'. 깔끔한 글씨. 획이 단정했다. 떨림이 없었다. 5억의 빚을 진 손으로 쓴 글씨치고는 너무 단정했다.
이준은 자신의 봉투를 꺼냈다. 펜을 꺼냈다. 펜을 쥔 순간, 습관처럼 한 가지를 확인했다. 서은아의 계약서 페이지 수. 그녀의 봉투가 반투명해서 보였다.
열네 페이지.
이준의 것은 열두 페이지였다.
2페이지의 차이. 이준은 펜을 들고 서명했다. 3초. 이름 석 자. 깔끔하게. 2페이지가 무엇인지 묻지 않았다. 지금은 아니었다. 하지만 기억해두었다. 박대건은 을과 병에게 다른 계약서를 보냈다. 그것은 사실이 되었다. 어떤 사실이든 기억해두면 언젠가 무기가 된다.
두 개의 봉투가 테이블 위에 나란히 놓였다. 투명한 봉투 안에 담긴, 투명하지 않은 관계.
☆
식사는 하지 않았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 그것으로 30분이 끝났다.
서은아가 먼저 일어섰다. 이준은 앉아 있었다. 일어서서 배웅하는 것은 관심의 표현이고, 앉아 있는 것은 비즈니스의 종료다. 이준은 비즈니스의 종료를 선택했다.
서은아가 문 앞에서 멈췄다.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하나만 더요."
이준은 잔을 들었다.
"사진 속 여자가 저는 아니라고 하셨잖아요."
"네."
"그러면 사진 속 여자는 누구예요?"
이준의 손이 멈췄다. 잔이 입술에 닿기 직전에.
그 질문은 이준도 하지 않은 질문이었다. 박대건에게도, 자신에게도. 조수석의 여자가 서은아가 아니라면 누구인가. 합성인가. 다른 사람인가. 그것을 왜 묻지 않았을까. 묻지 않은 것이 아니라 묻지 않기로 한 것이었다. 박대건의 설계를 의심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으니까.
하지만 서은아는 물었다. 이준이 묻지 않기로 한 질문을.
"…모릅니다."
처음으로 솔직한 대답이었다. 계산이 아닌 대답. 이준은 자신이 '모른다'고 말했다는 사실에 놀랐다. 3초 안에 계산을 끝내는 사람이. 15년 동안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척해온 사람이.
서은아가 돌아보았다. 처음으로. 누아르의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 그녀의 눈이 이상하게 선명했다. 시크릿 룸에 들어왔을 때와 같은 눈이었지만, 무엇인가 하나가 더해져 있었다. 이준은 그것을 읽으려 했다. 읽을 수 없었다. 0.5초가 아니라 2초를 보았는데도.
"찾아보세요."
서은아가 문을 열고 나갔다. 문이 닫혔다. 시크릿 룸에 이준 혼자 남았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얼음이 다 녹아 있었다. 이준은 녹은 얼음물을 보며 생각했다. 조수석의 여자. 모르는 얼굴. 사진은 진짜였다. 자신이 운전석에 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조수석의 여자를 모른다. 자신의 기억에 구멍이 있거나, 누군가 구멍을 만들었거나.
서은아가 말했다. 찾아보라고. 그 말이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 두 글자가 이상하게 선명했다. 누아르의 조명 아래에서 본 그녀의 눈처럼.
이준은 태블릿을 꺼내 사진을 다시 열었다. 새벽에 보았던 기사 사진. 조수석의 여자. 확대했다. 더 확대했다. 픽셀이 깨졌다. 쪽머리, 턱선, 입꼬리의 선. 서은아가 아니라는 것은 확실했다. 그러면 누구인가. 합성이라면 왜 합성했는가. 다른 사람이라면 왜 자신의 차에 타고 있었는가. 기억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질문이 늘어났다. 이준은 질문이 늘어나는 것을 싫어했다. 답이 줄어든다는 뜻이니까.
휴대폰이 진동했다. 최지훈.
[강이준 씨. 조수석 여성 신원 확인 완료했습니다. 내일 기사 나갑니다.]
이준은 화면을 보았다.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것을 알아챈 것은 자신뿐이었다. 확인 완료. 최지훈은 이미 알고 있었다. 사진 속 여자가 누구인지. 이준은 모르는데, 최지훈은 알고 있었다.
시계를 보았다. 2시 47분. 24시간 중 5시간 35분이 지나 있었다.
이준은 전화를 걸었다. 박대건에게가 아니었다. 최지훈에게였다. 7년 동안 한 번도 받지 않았던 기자의 전화를, 이번에는 자신이 걸었다. 신호음이 두 번 울렸다.
"강이준 씨?"
최지훈의 목소리는 놀라지 않았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만나죠."
2초의 침묵. 최지훈의 침묵은 박대건의 침묵과 달랐다. 박대건의 침묵은 계산이었다. 최지훈의 침묵은 저울질이었다. 기자는 정보의 가치를 저울질한다. 2초. 충분한 시간이었다.
"…좋습니다."
전화를 끊었다. 시크릿 룸을 나왔다. 계단을 올라가는 동안 한 가지를 생각했다. 이 게임의 규칙이 처음 생각했던 것과 다르다는 것을. 박대건이 설계한 판 위에 자신이 모르는 말이 하나 더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의 정체를 아는 사람이 세 명 있었다. 박대건, 최지훈, 그리고 — 어쩌면 서은아.
청담동의 오후 햇살이 눈부셨다. 지하에서 올라온 눈에는 모든 빛이 과했다. 이준은 눈을 가늘게 뜨고 도윤의 차를 찾았다. 차는 정확히 20미터 앞에 세워져 있었다. 7년째 변하지 않는 거리.
이준은 걸어가면서 주머니 속의 봉투를 만졌다. 열두 페이지. 서은아의 것은 열네 페이지. 2페이지의 차이. 그리고 사진 속 모르는 얼굴. 24시간의 카운트다운. 찾아보라는 두 글자.
변수가 너무 많았다. 이준은 변수를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15년 동안 변수를 제거하며 살아왔다. 스캔들이 터질 구멍을 막고, 기사가 될 틈을 메우고, 감정이 새어나올 균열을 봉인하며. 그런데 지금 변수가 한꺼번에 쏟아지고 있었다. 사진 속 모르는 얼굴. 24시간의 카운트다운. 열네 페이지의 계약서. 찾아보라는 두 글자. 그리고 — 가장 큰 변수는 숫자가 아니었다. 시크릿 룸에서 본 눈이었다. 0.5초 동안 돌아왔던 무대 위의 눈. 2초를 보고도 읽지 못했던 마지막 눈빛.
— 그때는 그것이 시작인 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