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협상은 전쟁이다
저는 협상에서 사랑받을 생각이 없습니다. 이길 생각입니다.
입주 당일, 아르테미스 이사회가 소집됐다.
서윤은 캘린더 알람이 울리는 것을 확인하면서 이미 짐을 트럭에 실어 보내고 있었다. 개인 소지품은 많지 않았다. 책 두 박스. 노트북. 그리고 10년째 버리지 못한 항공 마일리지 카드 봉투—대전에서 서울로 올라오던 날 처음 탄 비행기의 탑승권이 들어 있었다. 트럭에 실지 않았다. 그것만은 직접 들고 갔다.
PH129 청담. 한강변 복층 펜트하우스. 엘리베이터가 전용 층에서 열리면서 바로 현관으로 연결됐다.
설희는 이미 와 있었다.
"오셨군요."
설희가 돌아봤다. 오늘은 재킷이 아니었다. 흰 셔츠에 와이드 팬츠. 머리를 반만 묶은 모습이 어제보다 5도쯤 온도가 낮아 보였다.
집 안에서는 갑옷을 벗나.
"늦었습니까."
"10분요."
"이사회가 길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서윤이 박스를 내려놓으려다가 멈췄다. 설희가 박스를 봤다가 서윤을 봤다가 다시 박스를 봤다.
"책입니다."
"알아요."
"가져다 두세요."
설희가 먼저 걸어들어갔다. 서윤은 박스를 들고 따라갔다.
한강이 통유리 너머로 펼쳐져 있었다. 석양이 강 위에 내려앉고 있었다. 서윤은 그 풍경을 2초간 봤다.
진짜 잘 나오겠다. 사진에.
"침실은 두 개입니다. 왼쪽이 서윤 씨 것입니다."
서윤이 왼쪽 방 문을 열었다. 창에 커튼이 없어서 한강이 이쪽에서도 보였다.
"충분합니다."
"서재는 공용입니다. 일정 겹칠 경우 통보해주세요. 주방도요. 저는 아침 일찍 씁니다."
"저도 비슷합니다."
"좋군요."
침묵이 왔다. 어색한 종류의 침묵이었다. 서윤은 그것이 낯설었다. 어색한 침묵이 낯선 게 아니라, 자신이 그것을 어색하게 느낀다는 사실이.
"커피 있습니까."
"뭘로요."
"블랙."
"에티오피아 예가체프와 콜롬비아 후일라 중에서요."
서윤이 잠깐 설희를 봤다.
"……에티오피아요."
설희가 주방으로 들어갔다. 서윤은 통유리 앞에 섰다. 한강이 눈높이와 맞았다. 52층 사무실에서는 내려다봤다. 이곳에서는—
같은 높이였다. 서울과.
"아르테미스 이사회. 뭐라고 했습니까."
"이의는 없었습니다. 수치가 명확하니까요. 내부 반발 두 명. 예상 범위 안입니다."
커피 향이 났다. 서윤은 그 냄새를 맡으며 잠깐 눈을 감았다가 떴다.
설희가 컵을 들고 나왔다.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미래 쪽은요."
"내일 임시 이사회입니다. 승현이 주도할 거예요."
"어떻게 대응할 겁니까."
"아직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서윤이 컵을 들었다. 한 모금. 뜨거웠다.
좋다.
"계약서 수정안을 어제 밤새 준비했죠."
설희가 답하지 않았다. 답하지 않는 게 답이었다.
"그러면서 동거 조항은 넣지 않았습니다. 왜요."
설희가 창밖을 봤다. 한강 위로 불빛이 하나둘 켜지고 있었다.
"제 집이니까요."
"그것뿐입니까."
"그것뿐입니다."
거짓말이라는 걸 서윤은 알았다. 설희도 알았다. 서윤은 더 캐묻지 않았다.
그게 더 이상했다.
───
다음 날 오전 열 시. 임시 이사회.
설희가 회의실에 들어서는 순간, 공기가 달라졌다. 이사 열두 명. 서윤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네 명. 반이 안 됐다.
승현이 상석에 앉아 있었다. 부드러운 미소.
"설희야. 어서 와."
"오빠."
설희는 승현에게서 가장 먼 자리에 앉았다.
"오늘 안건은 간단해. 경영 공백 최소화를 위한 임시 대표이사 선임 건이야. 외부 전문 경영인을—"
"반대합니다."
설희가 말했다. 빠르게.
이사회가 조용해졌다.
승현의 미소가 0.5초 굳었다. 아주 미세하게.
"설희야, 아직 설명이—"
"외부 전문 경영인 영입에 반대합니다."
설희가 파일을 꺼냈다.
"대신 새로운 안건을 제출합니다. 아르테미스 홀딩스와의 전략적 합병 및 공동 CEO 체제 전환 건입니다."
회의실이 술렁였다.
"아르테미스."
승현이 천천히 말했다. 발음 하나하나를 씹어 내뱉듯.
"강서윤 대표 말하는 거야."
"그렇습니다."
"법무팀 검토가 없잖아. 절차 위반이—"
"절차를 말씀하시니 한 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설희가 끼어들었다. 목소리가 높아지지 않았다.
"이사회 안건 명의 변경은 누가 승인한 겁니까. 아버지가 쓰러진 날 오후, 제 이름으로 된 안건이 부사장님 명의로 바뀌었습니다. 이것도 절차였습니까."
정적.
승현의 손이 테이블 위에서 멈췄다.
이사들이 서로를 봤다. 중립이었던 사람들의 눈빛이 흔들렸다.
"아르테미스와의 합병 시너지 분석입니다. 미래 오프라인 유통망과 AI 배송 인프라의 결합. 3년 내 영업이익 34퍼센트 상승 시뮬레이션입니다."
숫자가 테이블 위로 퍼졌다. 이사들이 자료를 집었다.
"계약은 이미 체결됐습니까."
"어제 서명했습니다."
"강서윤 대표가 동의한 거야?"
설희가 계약서 사본을 놓았다. 강서윤의 서명이 찍혀 있었다.
이사들이 그 서명을 봤다.
"15퍼센트."
승현이 반복했다. 천천히.
"가문의 지분 구조를 바꾸는 사안이야. 이사회 결의가 필요해."
"그래서 지금 이사회를 소집한 겁니다."
설희가 말했다. 목소리가 흔들리지 않았다.
"의결하겠습니까. 하지 않겠습니까."
───
찬성 일곱. 반대 셋. 기권 둘.
승현은 표결 직전에 화장실을 핑계로 자리를 비웠다. 그가 없는 동안 찬성 표가 한 개 더 늘었다.
이사회가 끝나고 설희는 복도에 혼자 섰다.
심장이 뛰고 있었다. 이번엔 숨기지 않았다.
됐다. 첫 번째 방어선을 통과했다.
그런데 더 떨렸다. 이사회실 안에서보다.
핸드폰이 울렸다.
서윤이었다.
"결과는."
"찬성 일곱입니다."
침묵이 왔다. 그리고 서윤이 말했다.
"수고했습니다."
두 글자였다. 그런데—
설희는 숨이 한 박자 멈췄다. 수고했다는 말이. 이사회가 끝나고 처음으로 자신에게 하는 말이.
아버지는 한 번도 저 말을 하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목소리가 평소보다 낮았다.
"오늘 저녁 7시. 기자 브리핑 전에 두 사람이 같은 자리에 서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서윤이 말했다.
"한 기자가 질문을 넣을 겁니다. 준비하세요."
"어떤 질문이요."
서윤이 뜸을 들였다.
"두 분이 사랑하는 사이입니까."
설희의 손이 멈췄다.
"……준비하겠습니다."
전화가 끊겼다.
두 분이 사랑하는 사이입니까.
연기를 해야 한다. 계약 조항이다. 알고 있다. 그런데 왜 이 질문이 이렇게 무겁게 내려앉는 거야.
설희는 걸음을 뗐다.
감정은 나중에 처리하면 된다.
───
저녁 6시 45분. 기자 브리핑 15분 전.
서윤이 대기실에 들어섰다. 설희가 거울 앞에 서 있었다. 네이비 수트. 진주 귀걸이. 머리는 완전히 내려 어깨에 흘렸다.
서윤은 설희의 뒤에 섰다. 거울에 두 사람이 동시에 들어왔다.
"준비됐습니까."
"네."
"아까 이사회에서 잘 하셨습니다. 준비가 빨랐어요."
"어젯밤 시뮬레이션을 열두 번 했습니다."
"알고 있었습니다."
설희가 돌아봤다.
"어떻게요."
"눈 아래 컨실러가 두 겹이더군요."
설희는 말이 없었다. 서윤이 그것까지 봤다는 게 불쾌했다. 아니—
불쾌하지 않았다. 그게 더 이상했다.
"연기 준비는 됐습니까."
"됩니다. 거리를 좁히고, 시선을 유지하고, 필요하면 손을 잡겠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서윤이 한 걸음 다가왔다. 설희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늘 처음으로 같은 편에 섰습니다, 우리."
"승현이 다음 수를 놓을 겁니다. 크로노스가 움직일 겁니다. 그 모든 것에서 흔들리지 않으려면—"
서윤이 손을 내밀었다.
"지금 한 번 연습해도 됩니까."
설희는 그 손을 봤다. 넓은 손. 깔끔한 손톱. 아무 장신구도 없는.
설희의 손이 움직였다.
서윤의 손 위에.
서윤의 손이 감겼다. 천천히. 힘이 적당했다. 너무 세지도 약하지도 않은. 마치 이 동작을 전에도 해본 것처럼.
설희의 맥박이 서윤의 손에 전달되고 있을 것이다.
"연습치고는. 합격입니까."
"……합격입니다."
서윤의 목소리가 1도 낮아졌다. 설희는 그것을 알아챘다.
"백설희 씨."
"아까 이사회에서. 승현이 '설희야'라고 불렀을 때 표정이 변하지 않았습니다."
"……."
"연습인지 진짜인지 모르는 표정으로. 지금 그 표정이 다시 나오려 하고 있습니다."
설희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서윤이 손을 놓았다. 먼저 문을 향해 걸어갔다.
문 앞에서 멈췄다.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이 결혼은 감정이 아니라 합병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서윤이 말을 이었다. 여전히 등을 보인 채로.
"합병이 진심이 될 때가 있습니다. 회사도, 사람도."
"나갑시다."
설희는 서윤의 뒷모습을 봤다.
심장이 세게 뛰었다. 억누를 수가 없었다.
이건 계약이다. 알고 있다.
그런데 왜 '수고했습니다' 두 글자보다 지금 이 침묵이 더 선명하게 박히는 거야.
설희는 걸음을 뗐다. 문을 나섰다.
───
복도가 환하게 밝았다. 기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카메라 플래시가 보였다.
서윤이 설희 옆에 나란히 섰다. 어깨가 거의 닿을 거리. 설희가 한 걸음 앞서려는 순간, 서윤의 손이 설희의 손목을 스쳤다.
스쳐 지나가는 정도였다. 계약서에 명시된 수준이었다.
그런데 설희의 몸이 멈췄다.
카메라 셔터가 울렸다.
기자 한 명이 마이크를 들이밀었다.
"두 분은 정말 사랑하는 사이입니까."
설희가 카메라를 봤다. 한 박자. 숨을 들이쉬었다.
옆에서 서윤이 말하기 전에, 설희가 먼저 답했다.
"그것은—"
설희가 서윤을 봤다. 서윤도 설희를 봤다.
이 시선이 계산인지 진심인지 설희는 구별하지 못했다.
"중요한 질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같은 방향을 보고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카메라가 또 셔터를 눌렀다.
그 순간, 서윤이 아주 조용히 말했다. 마이크에 닿지 않을 목소리로.
"백설희 씨. 좋습니다. 결혼하죠."
설희는 카메라를 보면서 굳은 표정을 유지했다.
내부에서 무언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플래시가 쏟아졌다.
그 순간—
서윤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두 사람의 손이 아직 닿아 있었다. 서윤이 핸드폰을 꺼냈다. 화면을 확인했다.
미간이 0.5초 좁아졌다.
설희가 그것을 봤다.
"뭡니까."
서윤이 화면을 설희 쪽으로 기울였다.
속보 알림이 떠 있었다.
[속보] 크로노스캐피털·MBK 연합, 미래리테일 공개매수 선언—지분 22% 확보 목표
설희의 심장이 폭락했다.
카메라 플래시가 계속 터졌다. 두 사람의 얼굴을 담으면서.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싼 계약이 시작됐다.
그리고 전쟁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