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왕은 다시 태어난다 세종 4년(1422년) 5월. 조선의 상왕(上王), 태종 이방원은 수강궁(壽康宮)의 어두운 침전에서 타오르는 촛불의 마지막 심지를 응시하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이틀째 그치지 않는 궂은비가 내리고 있었다. 먼지가 내려앉은 궁궐의 공기는 무거웠고, 노왕(老王)의 가슴을 짓누르는 숨결은 거칠었다. 사방을 메운 것은 화려한 권력의 향기가 아니라, 평생을 따라다닌 지독하고도 비릿한 죽음의 냄새였다. ‘주상에게는…… 피 묻은 짐을 남기지 않으려 했다만.’ 이방원은 힘겹게 눈을 감았다. 감긴 눈꺼풀 위로 그가 평생을 걸어온 혈로(血路)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선죽교의 밤을 적셨던 정몽주의 선혈, 어린 이복동생들의 비명, 그리고 처가와 사돈까지 멸했던 숙청의 칼날들. 세상은 그를 **‘피의 군주’**라 칭했다. 그가 눈만 한 번 부라려도 삼정승 육판서들이 바닥에 이마를 찧었고, 그의 그림자만 비쳐도 대전의 공기는 숨 막히는 압력에 얼어붙었다. 하지만 그는 단 한 순간도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그것은 단순한 살육이 아니라, 이제 막 싹을 틔운 조선이라는 국가를 반석 위에 올리기 위한 정교한 ‘설계’였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그는 냉혹한 무장이기 이전에, 고려의 과거에 급제한 엘리트 지식인이었다. 혁명 이후에도 그는 칼보다는 붓을 들어 국가의 기틀을 설계했다. 6조 직계제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 양안(量案)과 호적을 정비하여 국가의 재정을 투명하게 관리했다. 일국을 통째로 다스려본 그에게 조선은 거대한 하나의 장부와 같았고, 그는 그 장부의 숫자를 한 치의 오차 없이 통제하던 철저한 지배자였다. 하지만, 정작 왕의 가슴 한구석은 북방의 동토보다 황량했다. 천하를 손에 넣었으나, 그는 단 한 사람의 인정만은 얻지 못했다. 환영처럼 눈앞에 아른거리는 것은 평생을 갈구했으나 끝내 등을 돌린 아버지, 태조 이성계의 싸늘한 뒷모습이었다. ―방원아, 너는 내 아들이 아니다. 그저 권력에 미친 괴물일 뿐이지. 임종의 문턱에서 들려온 그 환청은 어떤 칼날보다 예리하게 가슴을 꿰뚫었다. 과거에 급제하여 아버지의 유일한 자랑이 되고 싶었던 소년 시절의 꿈은, 혁명이라는 이름 아래 산산조각 났다. 아버지는 끝내 그를 아들로 보지 않았고, 태종은 아버지를 이기기 위해 스스로 악귀가 되어야 했다. “……아바님.” 메마른 입술 사이로 서글픈 신음이 새어 나왔다. 일국을 다스리던 노회한 영혼이 마침내 한계를 맞이했다. 의식이 암전(暗轉)되는 순간, 그가 느낀 마지막 감정은 국가를 세운 성취감이 아닌, 버림받은 자식의 지독한 회한이었다. “……도련님! 백운(白雲) 도련님! 제발 눈 좀 떠보세요!” 누군가 어깨를 사정없이 흔드는 감각에 이방원은 눈을 떴다. 차가운 수강궁의 냉기가 아니었다. 폐부를
찌르는 것은 은은한 백단향과 아늑한 나무의 숨결. 눈을 뜨자마자 보인 것은 눈물범벅이 된 낯선 소년의 얼굴이었다. ‘이곳은…… 어디인가? 나는 분명 숨을 거두었거늘.’ 몸을 일으키려던 이방원은 그대로 굳어버렸다. 제 몸이 아니었다. 수십 년간 병장기를 휘둘러 굳은살이 박여 있던 두터운 손은 사라지고, 고사리처럼 작고 매끄러운 손바닥이 보였다. 짧은 팔다리, 기껏해야 여덟 살 정도로 보이는 어린아이의 체구. 습관처럼 턱수염을 쓰다듬으려던 방원의 손이 허공을 휘저었다. 보들보들한 솜털만 만져지는 매끄러운 턱에 그는 찰나의 경악을 느꼈다. ‘내 수염은……? 아니, 내 권위는 어디로 갔단 말이냐.’ 동시에 낯선 기억들이 폭풍처럼 뇌해를 휩쓸고 지나갔다. 이곳은 중원 무림의 정파 오대세가 중 하나인 ‘천룡세가(天龍世家)’. 그리고 이 몸의 주인은 가주 이천운의 막내아들, 이백운이었다. 기억 속의 백운은 선천적으로 기혈이 뒤엉켜 무공을 익힐 수 없는 '절맥(絶脈)'의 몸이자 가문의 수치였다. ‘절맥이라…… 왕자로 태어나 폐세자가 된 꼴이로군.’ 그때였다. 복도 끝에서부터 지면을 울리는 육중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단순한 발소리가 아니었다. 공기를 진동시키고 심장을 압박하는 거대한 기파(氣波). 전생의 아버지 이성계가 전장을 누빌 때 뿜어내던 그 서슬 퍼런 투기와는 달랐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태산이 다가오는 듯한 정순하고도 묵직한 **‘호연지기( 浩然之氣)’**였다. 쾅―! 문이 부서질 듯 열리며 거구의 남자가 방 안으로 들이닥쳤다. 풍채가 당당하고 눈빛에선 정광(精光)이 흘러넘치는 사내. 그가 바로 천룡세가의 가주이자, 이 몸의 아버지인 이천운이었다. 방원은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또다시 "왜 이리 나약하냐"라는 독설이 쏟아질 것을 예견하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하지만 이어진 행동은 방원의 모든 상식을 뒤엎었다. “이 녀석아! 아비 가슴을 얼마나 졸이게 하려고!” 이천운은 침상으로 달려와 방원을 와락 끌어안았다. 커다란 손이 방원의 작은 등을 부서져라 토닥였다. 거칠고 투박한 손이었지만, 거기엔 말로 다 못 할 온기와 애정이 서려 있었다. 방원은 멍청하게 굳어버렸다. 전생의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이런 식으로 그를 안아준 적이 없었다. 그에게 아버지는 언제나 정복해야 할 영토이거나, 넘어야 할 거대한 절벽이었다. 하지만 눈앞의 이 사내는 아들의 생존 그 자체에 진심으로 감사하며, 아이처럼 울먹이고 있었다. 지독히 생경한 감각. 8살 아이의 육체가 가진 본능적인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방원은 자신도 모르게 작은 손으로 아버지의 두꺼운 옷자락을 꽉 쥐었다.
‘아바님, 보십시오. 저는 괴물이 아니라…… 그저 이런 품이 필요했을 뿐입니다.’ 전생의 아버지가 내게 칼을 주었다면, 이 아버지는 내게 온기를 주었다. 전생에 그토록 원했으나 결코 가지지 못했던 이 '절대적인 지지'라는 강력한 자원을, 그는 결코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감동은 찰나였다. 이방원의 예리한 시선이 열린 문 밖을 향했다. 그곳엔 가문의 가신들이 서 있었다. ‘방 안의 화로는 재만 가득하고, 약탕기 주변은 먼지가 가라앉아 있군.’ 사흘을 앓았다는 아이의 방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냉기였다. 이방원은 아버지를 부축하며 애절하게 눈물을 훔치고 있는 황 집사를 쏘아보았다. 노회한 경영자의 안목이 상황을 단숨에 해체했다. 가주가 무인 특유의 호방함으로 실무를 맡긴 사이, 기생충들이 이 나약한 아이의 몫을 갉아먹고 있었던 것이다. “황 집사.” 방원이 힘겹게 입을 뗐다. 여덟 살 아이의 가느다란 목소리였으나, 그 안에 담긴 서늘한 압력에 황 집사의 어깨가 굳었다. “자네는…… 내가 잠든 사이 내 약탕기에 무엇을 섞었기에 그리 손을 떠는가?” “도, 도련님? 그게 무슨…….” “방 안의 화로가 이리 식었는데, 자네의 눈물은 참으로 뜨겁군. 그 가식(假飾)이 장부의 구멍까지 메워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8살 아이의 입에서 나올 수 없는, 사람을 죽여본 자만이 가진 심리적 압박. 황 집사는 순간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공포를 느끼며 뒷걸음질 쳤다. 그것은 아이의 투정이 아니라, 죄인을 국문하는 제왕의 심문이었다. “……아버지, 조금 더 쉬고 싶습니다. 다른 분들은 모두 나가게 해주세요.” 가문의 기생충들을 향한 조용한 축객령이었다. 이천운은 아들의 부탁에 고개를 끄덕이며 가신들을 모두 내쫓았다. 홀로 남겨진 방 안에서 이방원은 다시 눈을 감았다. 비록 몸은 아이일지 모르나, 그의 안에는 일국을 설계하고 다스렸던 조선의 통치 구조가 통째로 들어 있었다. 무림의 법도 따위는 모른다. 다만, **과전법(科田法)**으로 이들의 밥줄을 끊고, **5가작통법(五家作統 法)**으로 서로를 감시하게 하리라. 이곳은 이제 문파가 아니라, 나의 새로운 '조선'이 될 것이다. 이방원은 제 손에 잡힌 이천운의 옷자락을 더욱 꽉 쥐었다. 그렇다면 답은 정해졌다. 기생충들을 솎아내고, 장부를 바로잡으며, 법도를 세운다. 그것이 내가 가장 잘하는 것이었으므로. 8살 이백운의 눈에, 조선을 설계했던 철혈 군주의 서늘한 안광이 서렸다. “이제, 이 가문의 법(法)은 내가 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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