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계산 밖의 숫자
새벽 5시. 이준이 팬카페를 열었다.
습관이었다. 매일 새벽에 트래픽을 확인했다. DAU, 게시글 수, 댓글 수. 세 개의 숫자를 스프레드시트에 입력하는 루틴. 눈을 뜨면 천장보다 먼저 화면을 봤다. 천장은 정보를 주지 않았다. 화면은 줬다. 이준의 아침은 숫자로 시작됐고 숫자로 끝났다. 그 사이에 연습이 있고, 회의가 있고, 사람이 있었지만 이준의 하루를 여는 열쇠는 언제나 스프레드시트였다.
오늘은 달랐다. 새 게시글 알림이 떠 있었다. 하나가 아니었다. 일곱 개. 전날 자정부터 새벽 5시 사이. 이준이 자는 5시간 동안 팬카페에서 무언가가 시작됐다. 이준이 설계하지 않은 무언가.
스크롤을 내렸다.
[노바 알리기 프로젝트 --- 참여자 모집!] [컵홀더 이벤트 디자인 공유합니다] [대학교 게시판에 포스터 붙이고 왔어요 (인증)] [노바 추천 플레이리스트 만들었어요! 공유해요!!] [지하철에서 노바 틀고 다니기 챌린지ㅋㅋㅋ] [노바 팬 명함 만들었어요 ㅠㅠ 예쁘게 나왔다] [카페 사장님 허락받고 노바 포스터 걸었습니다]
일곱 개의 게시글이 모두 새벽에 올라왔다. 새벽에 잠들지 않고 이런 글을 쓰는 사람들. 이준도 새벽에 잠들지 않고 스프레드시트를 만들었다. 같은 시간, 다른 행동. 하지만 같은 방향.
첫 번째 글을 열었다. 작성자: 별빛수호자. 민하의 닉네임(노바제일별)이 아니었다. 처음 보는 닉네임. 가입일을 확인했다. 3주 전. 게시글 12건. 댓글 87건. 접속일 21일 중 21일. 하루도 빠지지 않았다. 활동량이 상위 5%에 해당하는 코어 팬이었다.
글 본문에 기획안이 있었다. '노바 알리기 프로젝트'라는 이름. 참여 방법이 세 단계로 정리돼 있었다. ① 자기 주변에 노바 홍보물 게시 ② 인증샷 업로드 + 위치 태그 ③ 해시태그 #노바를알려 사용. 인증 양식까지 만들어져 있었다. 이미지 사이즈 권장 1080×1080. 위치 태그 방법. SNS 공유 가이드. 디자인 템플릿 3종 첨부.
이준이 기획하지 않은 구조였다. 이준의 스프레드시트에 없는 행. 이준의 타임라인에 없는 콘텐츠 포인트.
민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팬카페에 알리기 프로젝트 올라왔는데, 이거 민하 씨가 기획한 거예요?"
답장. 1분 후. "아니에요. 저도 방금 봤어요. 팬들이 알아서 한 거예요."
'알아서 한 거예요.'
이준은 그 문장을 두 번 읽었다. '알아서'라는 단어. 이준의 전략에서 팬은 변수였다. 계수를 곱하고 전환율을 적용하는 대상. '알아서 움직이는 변수'는 이준의 모델에 없었다. 변수가 알아서 움직이면 예측이 불가능해진다. 하지만 지금 일어나고 있는 것은 전략의 흔들림이 아니었다. 전략을 초과하는 움직임이었다.
연습실. 오전.
태현이 먼저 와 있었다. 벽에 등을 대고 폰을 보고 있었다. 모자를 쓰지 않았다. 팬카페 화면이 보였다.
"형, 이거 봤어?" 태현이 폰을 들어 보였다. 알리기 프로젝트 게시글.
"봤어."
"이 사람 대단해. 기획안이 우리 거랑 구조가 비슷해." 태현이 화면을 스크롤했다. "인증 양식 만들고, 이미지 사이즈 가이드 넣고, 해시태그 통일하고. 이거 마케팅 전공자 아니야?"
"모르겠어. 팬카페 프로필에는 직업 안 적혀 있어."
정우가 노트북을 펼치면서 들어왔다. "저도 봤어요. 인증 게시글이 아침 7시 기준으로 11건이에요. 댓글은 342건. 참여 지역이 서울, 경기, 부산, 대전, 광주, 인천, 대구. 전국 7곳."
이준은 정우를 봤다. 이미 집계했다. 이준이 세려고 했던 숫자를 정우가 먼저 세 놨다.
"우리 전략은 수도권 중심이었잖아요." 정우가 말했다. "팬은 전국에 있어요. 모델에 안 잡혔던 범위예요."
서지환이 들어왔다. 폰을 들고. 화면을 보면서 들어왔다.
"형, 팬카페 봤어?"
"봤어."
"이거 우리가 시킨 거 아니잖아."
"아니야."
서지환이 이준 옆에 앉았다. 소파가 살짝 내려앉았다. 화면을 같이 봤다. 알리기 프로젝트 참여 인증이 실시간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카페 포스터, 대학교 게시판, 편의점 앞 보드, 스터디카페 책상 위. 이준이 보는 동안에도 세 개가 더 올라왔다. 대전. 세종. 천안. 점이 찍히는 속도가 이준의 새로고침 속도보다 빨랐다.
인증 게시글을 하나씩 열었다. 대학교 게시판 사진. A4 크기 포스터. 노바 로고가 가운데에 있었다. 하단에 QR코드. 포스터 상단 문구: '101위에서 시작합니다.' 지하철 광고에서 가져온 문장. 이준이 만든 문장이 팬의 디자인 안에 들어가 있었다. 허락 없이. 지시 없이. 스프레드시트 없이.
태현이 컵홀더 디자인 글을 열었다. "이거 봐. 선이 깨끗해. 본업이 디자이너인 것 같아."
"댓글에 원본 파일 공유 요청이 있어." 정우가 말했다. "작성자가 '누구든 쓰세요. 노바를 위한 거니까요'라고 답했어요."
이준은 그 문장에서 1초 멈췄다. '노바를 위한 거니까요.' 수식에 넣을 수 없는 문장이었다. 하지만 이 문장이 만들어낸 행동들이 수치를 바꾸고 있었다.
"이게 진짜 팬심이야." 서지환이 말했다.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무대 위의 목소리도, 회의 때의 목소리도 아닌. 감탄의 목소리. "형이 만든 게 아니라, 형이 시작만 한 거야."
이준은 대답하지 못했다. 넣을 말이 없었다. 숫자가 아닌 것에 대답하는 법을 이준은 배운 적이 없었다.
태현이 말했다. "근데 이거 우리가 관리 안 하면 방향이 틀어질 수도 있잖아. 디자인 퀄리티도 중구난방이고."
"관리하면 자발성이 죽어." 이준이 말했다.
"그러면?"
"놔둬. 방향만 같으면 된다."
태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준의 대답이 맞는지 몰랐다. 처음 해보는 판단이었다. 스프레드시트에 근거가 없는 판단. 하지만 13화에서 923명 중 한 명이 의자에 앉았을 때 이준이 느낀 것이 있었다. 셀에 담을 수 없는 것들을 셀에 넣으려 하면 안 된다는 것.
이때 민하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이준 씨, 급한 건이에요."
이준이 폰을 들었다.
"아이돌 업계 블로그 '인사이드뮤직'에 기사가 올라왔어요. '노바 컴백 전략, 데이터 중심 신인 그룹의 실험'이라는 제목이에요."
이준의 손이 멈췄다.
"기사에 우리 내부 수치가 인용돼 있어요. 팬카페 DAU 4,100, 유입 전환율 12%. 공개한 적 없는 숫자예요."
DAU 4,100. 전환율 12%. 이준의 스프레드시트에만 있는 숫자. 정우의 분석 시트에도 같은 숫자가 있지만, 외부에 공개한 적은 없었다. 드라이브 안에만 있는 숫자가 업계 블로그에 올라왔다.
"기사 URL 보내주세요."
민하가 보낸 링크를 열었다. 기사는 짧았다. 800자 남짓. 노바의 데이터 기반 전략을 소개하는 내용이었다. 톤은 중립적이었다. 비판도 칭찬도 아닌. 하지만 이준은 톤이 아니라 숫자를 봤다. DAU 4,100. 전환율 12%. 두 숫자가 나란히 인용돼 있었다. 출처는 '관계자'였다.
'관계자.'
12화에서 팬카페에 올라온 가짜 유출 글. '관계자에 의하면.' 같은 단어. 같은 패턴. 12화에서는 없는 정보를 만들어냈다. 이번에는 있는 정보를 가져갔다. 단계가 올라갔다.
이준은 기사 속 숫자를 확인했다. DAU 4,100. 전환율 12%. 실제 수치와 정확히 일치했다. 미끼 파일(v3)의 수치가 아니었다. 미끼에는 DAU 4,730, 전환율 14.2%로 넣었다. 이 기사에 인용된 숫자는 실제 파일(v1)의 값이었다.
'v1에서 나간 거다. v3가 아니라.'
11화에서 확인한 접근 로그. 3월 25일 03:12. 한도윤이 열람한 파일이 v1이었다. 시간 순서가 맞았다. v1 열람 → 수치 유출 → 기사 게재. 경로가 한 줄로 연결됐다.
이준은 기사를 캡처했다. '접근권한_리스트' 폴더에 저장했다. 파일이 또 하나 늘었다.
서지환이 이준의 표정을 봤다. "형, 무슨 일이야?"
"아니야." 이준이 폰을 내려놓았다. "업계 블로그에 우리 기사가 나왔는데, 확인할 게 있어서."
"좋은 기사야?"
"중립이야." 이준은 서지환에게 말할 수 없었다. 숫자가 유출됐다는 것을. 팀 안에 누군가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지금 말하면 팬 자발행동이 만들어낸 공기가 깨진다. 연습실 안의 온도가 바뀐다. 바뀌면 안 됐다. 컴백까지 D-24.
"좋은 거야 나쁜 거야?" 태현이 물었다.
"나쁘지 않아. 노출이니까." 이준이 말했다. 절반의 진실이었다. 노출은 맞다. 하지만 경로가 문제였다. 이준이 설계한 노출이 아니라, 누군가가 빼돌린 숫자가 만든 노출이었다.
'두 가지가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 팬이 바깥에서 안으로 끌어오고 있다. 누군가가 안에서 바깥으로 빼내고 있다. 방향이 반대다.'
서지환이 일어섰다. 문 앞에서 돌아봤다.
"형. 계산 안 되는 것도 있어."
나갔다. 문이 닫혔다. 경첩 소리가 났다.
이준은 혼자 남았다. 스프레드시트를 열었다. 새 탭을 만들었다. 탭 이름을 입력했다. '팬_자발행동'.
커서가 빈 셀 위에서 깜빡였다. A1 셀. 비어 있었다.
숫자를 넣으려 했다. 게시글 7건. 댓글 342건. 인증 이미지 11건. 참여 지역 7곳. 넣을 수 있는 숫자는 있었다. 하지만 그 숫자들이 뜻하는 것은 숫자로 표현되지 않았다. 7건이라는 숫자는 '7명이 자기 돈과 시간을 써서 자발적으로 움직였다'는 뜻이었다. 342건이라는 숫자는 '342명이 그 움직임에 동참하겠다고 말했다'는 뜻이었다. 숫자 뒤에 사람이 있었다. 13화에서 923명 중 한 명이 의자에 앉았던 것처럼. 숫자가 사람이 될 때, 스프레드시트의 문법은 작동을 멈춘다.
이준은 셀을 비워뒀다.
옆에 '접근권한_리스트' 폴더가 열려 있었다. 파일이 늘어나고 있었다. 빈 셀과 쌓이는 증거. 두 개의 탭이 나란히 있었다.
불편했다. 하지만 불편함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불편함은 때때로 정확함의 다른 이름이었다. 비어 있는 셀을 비워두는 것. 그것도 하나의 답이 될 수 있었다. 이준은 그 답을 받아들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