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역산
5만은 숫자가 아니라 기한이었다.
이사회 건물 1층 로비. 엘리베이터 문이 닫힌 지 30초가 지났다. 윤세아는 올라갔다. 이준은 내려왔다. 같은 건물에서 방향이 갈렸다.
로비는 비어 있었다. 대리석 바닥 위로 구두 소리가 울렸다. 경비실 쪽에서 모니터 불빛이 새어 나왔다. 이준의 운동화는 소리가 나지 않았다. 이 건물에서 운동화를 신은 사람은 이준뿐이었다. 정장 사이의 운동화. 적자 2억 3천만 원짜리 그룹의 리더. 이사회 테이블에서 운동화를 보고 눈살을 찌푸린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이준은 그걸 알았다. 알면서 바꾸지 않았다. 지금 바꿔야 할 건 신발이 아니었다.
폰을 꺼냈다. 메모장을 열었다. 엄지손가락이 숫자를 찍었다.
50,000. 72시간.
이준은 두 숫자를 봤다. 이사가 한 말이 다시 들렸다. '초동 5만. 못 하면 접습니다.' 악수를 먼저 하고, 수고하셨습니다를 말하고, 그다음에 통보를 하는 순서. 이 업계의 순서는 바뀐 적이 없었다. 1화 때도 그랬다. 칼은 인사 뒤에 온다.
'현재 팬카페 DAU 4,100. 유입 전환율 12%. 5만 달성에 필요한 총 유입 약 41만 7천. 트렌드 1회당 평균 유입 4만. 최소 10회의 유입 이벤트가 필요하다.'
10회. 컴백까지 남은 시간 안에 열 번을 터뜨려야 했다. 쇼츠, 바이럴, 팬 총공, 커뮤니티 확산, 외부 유입. 아크1에서는 지하철 광고 한 번으로 101위를 100위로 올렸다. 그때는 한 번이 기적이었다. 이번에는 열 번. 기적은 반복되면 전략이 되고, 전략이 되면 실행 가능해진다. 아크1에서 배운 유일한 공식이었다.
이준은 유리문을 밀고 나갔다. 바깥 공기가 차가웠다. 3월 말이었지만 바람에 겨울이 남아 있었다. 코트를 입지 않은 건 실수였다. 윤세아가 '이사회에 코트를 입고 가면 너무 어려 보인다'고 했다. 재킷만 입으라고. 이준은 그 조언을 따랐다. 지금은 추웠다. 추운 건 참으면 되지만, 숫자가 부족한 건 참아서 해결되지 않는다.
걸으면서 계산을 이어갔다. 유입 이벤트 10회. 각 이벤트당 평균 유입 4만 명. 전환율 12%면 이벤트당 실구매자 약 4,800명. 1인당 평균 구매 2.3장. 이벤트당 판매 약 11,040장. 10회면 약 110,000장. 하지만 중복 유입이 있다. 같은 사람이 여러 이벤트에 반응한다. 중복률 60%로 잡으면 순수 신규 유입은 40%. 실판매 기여분은 약 44,000장. 기존 예약 판매분과 합치면---
'계산은 된다. 계산대로 되는지가 문제다.'
연습실. 멤버들이 앉아 있었다.
서지환은 소파 끝에서 물병을 돌리고 있었다.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하는 게 습관이었다. 긴장할 때 손에 뭔가를 쥐는 유형. 빨대든, 펜이든, 물병이든. 이준은 그 패턴을 연습생 때부터 알고 있었다. 태현은 벽에 등을 대고 모자를 눌러 쓴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자는 건지 듣고 있는 건지 모르는 자세. 하지만 이준은 알았다. 태현이 정말 잘 때는 모자를 벗는다. 모자를 쓰고 있으면 깨어 있다. 정우는 노트북을 펼쳐두고 화면을 응시했다. 트렌드 분석 페이지가 열려 있었다. 정우는 항상 한 발 먼저 준비하는 유형이었다.
한도윤은 창가 쪽에 서 있었다. 유리에 비친 얼굴이 아무 표정도 짓지 않았다. 팬사인회 때의 자연스러운 웃음도, 이사에게 목례하던 정중함도 없었다. 거울 같은 얼굴. 이준은 그 얼굴에서 무언가를 읽으려 했다. 읽히지 않았다.
이준이 화이트보드 앞에 섰다. 마커를 들었다. 캡을 열었다. 잉크 냄새가 짧게 퍼졌다.
"이사회 결과 나왔다."
서지환이 고개를 들었다. 물병이 멈췄다. 태현이 모자 아래에서 눈을 떴다. 정우가 화면에서 눈을 옮겼다.
"BEP 조정은 통과했어. 2억 4천 7백에서 2억 3천으로 내려갔다. MV 외주비 항목 조정이 반영됐어."
서지환의 어깨가 내려갔다. 안도. 이준은 그 안도가 채 끝나기 전에 말했다.
"조건이 있어."
어깨가 다시 올라갔다.
이준이 화이트보드에 숫자를 썼다. 마커가 보드 위에서 끽끽거렸다. 50,000. 그 아래에 72h. 두 줄.
"다음 컴백 초동 5만 장. 발매 후 72시간 기준. 못 하면 접는다."
연습실이 조용해졌다. 에어컨 실외기 소리만 났다.
태현이 모자를 벗었다. 이 회의에서 모자를 벗는 건 태현이 전면 참여하겠다는 신호. 이준은 그 신호를 읽었다.
"72시간이면 3일이야." 태현이 말했다.
"맞아."
"3일 안에 5만? 우리 팬카페 회원이 만 이천인데."
"팬카페 회원만으로는 안 돼." 이준이 마커를 내려놓았다. "역산하면 나와. 5만 달성에 필요한 유입 이벤트가 최소 10회야. 콘텐츠, 바이럴, 팬 총공, 외부 확산. 열 번을 터뜨려야 해."
서지환이 입을 열었다. "형, 우리 차트 100위 찍는 데도 6일 걸렸잖아. 그때도 서버 오류 나고, 겨우 올렸는데. 3일에 5만은---"
"구조가 다르니까." 이준이 화이트보드에 타임라인을 그렸다. D-28부터 D-Day까지. 28칸의 직선. 그 위에 콘텐츠 포인트를 찍기 시작했다. "차트는 스트리밍이야. 초동은 판매야. 변수가 다르고, 전략도 달라."
정우가 화면에서 눈을 떼고 화이트보드를 봤다. "팬카페 DAU 기준으로 구매 전환율 계산하면 가능한 숫자예요?"
"현재 전환율 12%면 DAU 4,100에서 실구매자 약 490명. 1인당 평균 구매 2.3장으로 잡으면 하루 1,127장. 28일이면 31,556장." 이준은 숫자를 빠르게 읊었다. 외운 게 아니었다. 로비에서 걸어오면서 계산했다. 계산은 이준의 보행이었다. 걸으면서 하는 것. "5만에 18,444장 부족해."
정우가 화면에서 계산기를 열었다. 검산하는 눈이었다. 이준은 그걸 알았다. 정우는 항상 검산했다. 이준이 틀린 적은 없었지만, 정우가 확인하는 과정 자체가 이 팀에 필요했다. 이준의 계산을 아무도 의심하지 않으면, 이준이 틀려도 아무도 모른다. 정우는 그 안전장치였다.
"맞아요." 정우가 노트북을 닫지 않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31,556장. 소수점까지 같아요."
태현이 손가락으로 화이트보드를 가리켰다. "그러면 부족분 18,444장을 28일 안에 만들어야 된다는 거잖아. 하루에 659장씩. 유입 이벤트 없이 순수하게."
이준은 태현을 봤다. 암산이 빨랐다. 모자 아래에서 유튜브만 보고 있던 게 아니다. 1화 때부터 알고 있었지만, 확인할 때마다 새로웠다.
"부족분 18,444장은 외부 유입으로 메워야 해." 이준이 타임라인 위에 굵게 썼다. '유입 10회 × 확산 구조'. "아크1은 팬 안에서 움직였어. 같은 팬이 스밍하고, 같은 팬이 인증하고, 같은 팬이 SNS에 올렸어. 이번엔 다르게 해야 해. 바깥을 끌어와야 해. 팬이 아닌 사람이 팬이 되는 구조."
"바깥이라면." 서지환이 물병 뚜껑을 닫았다. "음악이 먼저 아니야?"
이준은 서지환을 봤다. 1초. 그 말 안에 반발이 있었다. 아직은 씨앗이었다. 자라기 전에 답을 줘야 했다.
"음악도 해야 해. 동시에."
서지환이 입을 다물었다. 다문 것이지 닫은 것이 아니었다. 이준은 그 차이를 알았다. 다시 꺼낼 것이다. 이준은 기다릴 수 있었다.
한도윤이 창가에서 돌아보지 않았다. 이준은 도윤의 등을 1초 봤다. 유리에 비친 도윤의 눈이 화이트보드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정확히는 화이트보드 위의 50,000이라는 숫자를. 이준은 그 시선의 방향을 기억해뒀다. 증거는 아니었다. 하지만 관찰은 증거의 재료다.
회의가 끝났다. 멤버들이 하나씩 나갔다. 태현이 모자를 다시 쓰면서 나갔다. 정우가 노트북을 접으면서 나갔다. 한도윤이 창가에서 떨어져 나갔다. 서지환이 마지막에 문 앞에서 멈췄다. 뒤를 돌아봤다.
"형."
"응."
"5만... 진짜 되는 거야?"
이준은 서지환을 봤다. 1화 때도 같은 질문을 했다. '우리 진짜 되는 거야?' 그때 이준은 확률로 대답했다. 63%. 이번에는 확률을 계산하지 않았다. 계산하면 낮을 것 같았다. 낮은 숫자를 말하면 서지환의 눈이 흔들린다. 서지환의 눈이 흔들리면 목소리도 흔들린다. 서지환의 목소리가 흔들리면 무대가 흔들린다. 무대가 흔들리면 팬이 흔들린다.
리더가 할 일은 확률을 말하는 게 아니라 확률을 만드는 거다.
"된다고 해야 되는 거야."
서지환이 입을 다물었다. 3초. 고개를 끄덕이고 나갔다. 문이 닫혔다. 경첩이 끼익거렸다. 윤활유가 필요했다. 이준은 그것도 알았다.
이준만 남았다.
노트북을 열었다. 드라이브에 접속했다. 파일 접근 로그를 불러왔다.
10화에서 공유 범위를 '특정 사용자만'으로 바꿨다. 그 뒤로 이틀이 지났다. 이준은 로그를 아래로 스크롤했다. 날짜순 정렬.
이준. 3월 24일 09:12. 전략 문서 열람. 정상. 정우. 3월 24일 10:33. 분석 시트 열람. 정상. 태현. 3월 24일 14:07. 콘텐츠 폴더 열람. 정상. 서지환. 3월 24일 18:22. 스케줄 파일 열람. 정상.
여기까지는 패턴 안이었다. 멤버들이 낮에, 업무 시간대에, 필요한 파일을 열었다. 정상 범위.
스크롤을 더 내렸다.
접근 기록 하나가 더 있었다.
3월 25일 03:12. 사용자: 한도윤. 열람 파일: 노바_팬덤전략_v1.xlsx.
새벽 3시 12분.
이준은 그 시간을 세 번 봤다. 한 번은 확인. 한 번은 계산. 한 번은 판단 보류.
자기가 잠든 시간이었다. 숙소에서. 알람 설정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02:40 취침. 06:30 기상. 그 사이 폰을 열지 않았다. 스크린 타임 로그가 증명한다.
도윤이 새벽 3시에 전략 파일을 열 이유. 관심? 불안? 공부? 잠이 안 와서? 네 가지 가능성은 모두 합리적이었다. 다섯 번째 가능성은 합리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10화에서 받은 스크린샷이 있었다. 이준이 만든 파일의 캡처가 모르는 번호에서 왔다. 누군가가 가져갔다. 드라이브에서.
이준은 질문을 접었다. 접으면서 스크린샷을 찍었다. '접근권한_리스트' 폴더에 저장했다. 접는 것과 잊는 것은 다르다. 이준은 아무것도 잊지 않는다. 스프레드시트처럼.
윤세아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BEP 정산 재검토에 2주 걸려요. MV 외주비 건은 별도 검토 들어갑니다. 업체 조회 중이에요."
이준은 답장을 보냈다. "알겠습니다. 외주비 건은 결과 나오면 바로 공유 부탁드려요."
'외주비 건은 윤세아가 판다. 유출 건은 내가 판다. 분업이다. 섞이면 안 된다. 두 사건이 연결돼 있을 가능성은 아직 계산하지 않는다.'
노트북을 닫았다. 화이트보드를 마지막으로 봤다. 50,000이라는 숫자가 형광등 아래에서 빛났다. 마커 잉크가 반들거렸다. 연습실 불을 껐다. 화이트보드의 숫자가 어둠 속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이준의 머릿속에서는 사라지지 않았다. 숫자는 보이지 않아도 존재한다. 적자도 그렇고, 빚도 그렇고, 기한도 그렇다.
복도에 비상등만 남아 있었다. 초록색 불빛. 1화 때 쇼케이스장에서 봤던 색과 같았다. 그때도 모든 조명이 꺼진 뒤에 비상등만 남아 있었다.
누군가 깨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