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콘텐츠 설계도
D-28이 D-27로 바뀌는 데 하루가 걸렸다. 당연한 말이지만, 하루가 이렇게 짧은 적은 없었다. 어제는 이사회였다. 오늘은 전략이다. 내일은 실행이다. 28일 뒤에는 판결이다.
연습실. 이준이 화이트보드에 'D-27'을 썼다. 마커 캡을 닫는 소리가 방 안에 짧게 울렸다. 어제 쓴 50,000이라는 숫자가 그 옆에 아직 남아 있었다. 지우지 않았다. 매일 보면서 줄어드는 날짜 옆에 변하지 않는 숫자를 두는 것. 이준 나름의 압박 장치였다.
"컴백까지 4주 남았다. 오늘부터 콘텐츠 전략 짠다."
태현이 먼저 움직였다. 가방에서 종이를 꺼냈다. A4 두 장. 손글씨. 글씨는 삐뚤었다. 중학교 때 공책 같은 필체. 하지만 종이 위의 구성은 달랐다. 표가 있었다. 숫자가 있었다. 출처가 있었다. 이준은 그 대비를 봤다. 글씨체와 내용의 괴리. 태현이라는 사람의 본질이 거기 있었다. 겉은 래퍼였고, 속은 분석가였다.
"쇼츠 시리즈 기획안." 태현이 종이를 이준 쪽으로 밀었다. "'연습실 비하인드 + 킬링파트 티저' 구조야. 유지율 데이터 근거 있어."
이준이 종이를 들었다. 첫 번째 장. 유튜브 쇼츠 유지율 분석. 아이돌 카테고리 상위 100개 영상. 비하인드 콘텐츠 평균 유지율 71%. 킬링파트 클립 평균 유지율 84%. 두 포맷을 결합한 콘텐츠의 예상 유지율 78~85%. 출처까지 적혀 있었다. 유튜브 스튜디오 공개 데이터와 태현이 직접 모은 샘플 분석.
두 번째 장. 기획안. 구성: 15초 비하인드 + 7초 킬링파트 + 3초 로고 엔딩. 총 25초. 업로드 주기: 주 3회. 최적 업로드 시간: 목·금·일 22:00. 근거: 아이돌 카테고리 유입 피크 시간대 분석. 22시에서 23시 사이가 유입 밀도가 가장 높다는 데이터.
"이거 언제 만든 거야?" 서지환이 태현의 종이를 옆에서 들여다봤다. 목소리에 놀라움이 섞여 있었다.
"어제." 태현이 모자 밑에서 대답했다.
"어제 회의 끝난 게 8시였잖아."
"새벽에 했어."
서지환이 태현을 봤다. 태현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모자 챙을 만지작거렸다. 이준은 그 교환을 봤다. 태현이 모자 아래에서 유튜브만 보고 있던 게 아니었다. 1화에서 이준은 태현이 자고 있다고 생각했다. 태현은 분석하고 있었다.
"15초에 일상 걸고, 7초에 킬링파트 박으면 유지율 80% 넘겨." 태현이 말했다. 손가락으로 종이의 숫자를 가리키면서. "쇼츠 알고리즘이 유지율 80% 이상이면 추천 피드에 올려줘. 추천 피드에 올라가면 노출이 기존 대비 10배야. 우리 같은 신인한테는 이게 유일한 무기야."
정우가 화면에서 고개를 들었다. "유지율 78~85% 구간이면 추천 피드 진입 확률이 약 3배 올라가요. 태현이 형 데이터랑 제 분석이 같아요."
태현이 정우를 봤다. 1초. 고개를 끄덕였다. 검증이 끝났다는 뜻이었다.
이준은 종이를 내려놓았다. "쓸 수 있어."
태현의 입꼬리가 모자 아래에서 올라갔다. 이준은 봤지만 말하지 않았다.
정우가 노트북 화면을 돌렸다. "확산 전략이에요." 화면에 차트가 떠 있었다. 커뮤니티별 활동 시간대 분포. 색깔로 구분된 막대그래프. 빨간색이 아이돌 전문 커뮤니티, 파란색이 음악 커뮤니티, 회색이 일반 커뮤니티.
"아이돌 전문 커뮤니티 3곳. 음악 커뮤니티 2곳." 정우가 빨간 막대와 파란 막대를 가리켰다. "이 5곳에서 동시에 확산하면 실시간 트렌드 진입 확률이 40%에서 72%로 올라가요. 아크1 때 트렌드 5위 찍었을 때 사용한 시간대가 23:40이었는데, 이 5곳의 활동 피크가 정확히 23시에서 01시 사이에 겹쳐요."
이준이 숫자를 봤다. 72%. 정우의 데이터는 아크1에서 두 번 맞았다. 트렌드 진입 시점 예측도, 갱신 주기 분석도. 세 번째를 의심할 이유가 없었다.
"확정. 커뮤니티 리스트 민하 씨한테 공유해."
"했어요. 아까." 정우가 화면을 다시 돌렸다. 이미 전송 완료. 이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우는 항상 한 발 먼저였다. 시키기 전에 해놓는 유형. 이준이 가장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는 상대. 정우와 일하면 의사결정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실행은 정우가 먼저 해놓으니까.
서지환이 그때 입을 열었다.
"잠깐."
목소리가 낮았다. 연습실의 온도가 바뀌는 것 같았다. 이준은 그 톤을 알았다. 서지환이 진지할 때의 목소리. 무대 위의 목소리가 아니고, 연습실에서 장난치는 목소리도 아닌. 새벽 녹음 부스에서 혼자 부를 때의 목소리. 낮고, 무겁고, 진심이 들어 있는 목소리.
"콘텐츠가 아니라 음악이 먼저 아니야?"
이준이 서지환을 봤다.
"곡도 안 정했는데 킬링파트가 뭔지도 모르는데 쇼츠를 짜? 유지율을 계산해?" 서지환이 소파에서 일어섰다. 키는 이준보다 5센티미터 작았지만, 일어서면 존재감이 달라졌다. 무대 위에서 4옥타브를 찍는 성대가 만드는 무게감. "형, 그건 순서가 틀려."
태현이 고개를 돌렸다. 정우는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한도윤은 창가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갈등이 시작될 때 반응하지 않는 사람은 항상 한도윤이었다. 이준은 그것도 패턴으로 기록해뒀다.
"곡은 콘텐츠 안에서 결정돼." 이준이 말했다. "반응을 먼저 보고 방향을 잡는 거야."
"아니, 틀린 거야." 서지환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좋은 곡이면 사람이 와. 전략이 사람을 데려오는 게 아니라 음악이 데려오는 거야. 우리가 뭘 부르는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포장할 건데."
태현이 끼어들었다. "지환아, 동시에 하면---"
"동시에 하면 둘 다 어중간해." 서지환이 태현을 보지 않고 말했다. 시선은 이준에게 고정돼 있었다. 이건 태현과의 대화가 아니었다. 이준과의 대화였다.
이준은 2초 동안 말하지 않았다. 서지환의 말에서 감정을 걸러냈다. 남은 것은 논리. 음악이 유입을 만든다. 서지환은 그렇게 믿고 있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좋은 곡은 공유를 만들고, 공유는 유입을 만든다. 하지만 좋은 곡을 고르는 데도 시간이 걸리고, 시간은 28일밖에 없었다.
"72시간 안에 5만 장이야." 이준이 말했다. "곡을 먼저 고르고, 반응을 보고, 전략을 짜고, 실행하면 순차적으로 시간이 모자라. 동시에 해야 해."
"어중간해도 0보다 나아."
서지환이 입을 닫았다. 닫은 것이지 다문 것이 아니었다. 반박을 접은 게 아니라 미룬 것. 이준은 그 차이를 알았다. 서지환은 포기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곡 선정 때 다시 꺼낼 것이다. 이준은 그걸 기다릴 수 있었다. 서지환의 반발이 이 팀에 필요했다. 이준이 틀리는 순간을 잡아줄 사람은 서지환이었다.
'이건 끝나지 않았다.'
회의가 끝났다. 멤버들이 하나씩 나갔다. 태현이 모자를 다시 쓰면서 나갔다. 문 앞에서 멈추더니 이준을 봤다.
"형, 쇼츠 촬영은 내가 잡을게. 곡 나오면 바로 돌릴 수 있게."
이준이 끄덕였다. 태현은 나갔다. 정우가 노트북을 접으면서 나갔다. 한도윤이 나갈 때 이준을 1초 봤다. 아니, 이준의 뒤에 있는 화이트보드를 봤는지도 몰랐다. 시선의 방향이 정확하지 않았다. 이준은 그 불확정성을 기억해뒀다.
혼자 남았다.
이준이 팬카페를 열었다. 습관. 매일 새벽과 회의 후에 확인했다. 트래픽, 새 게시글 수, 댓글 수. 세 개의 숫자.
새 게시글 목록을 스크롤했다. 팬들의 일상 글. 응원 글. 스밍 인증. 평소와 같았다.
멈췄다.
게시글 하나. 작성자 닉네임 '음악의신79'. 처음 보는 계정. 가입일을 확인했다. 오늘이었다. 게시글은 이 글 하나뿐. 댓글도 없었다.
제목: [속보] 노바 컴백 타이틀곡 후보 유출?
이준이 열었다. 내용은 짧았다.
'관계자에 의하면 노바의 컴백 타이틀곡 후보가 3곡으로 압축됐다는 소식. 댄스팝, 발라드, 실험적 구성 중 하나가 타이틀이 될 듯.'
이준은 그 글을 두 번 읽었다. 세 번째는 필요 없었다.
아직 곡 후보조차 정하지 않은 상태였다. 오세혁에게 곡 의뢰를 넣은 것은 이틀 전이었고, 후보가 올라온 것은 아직 없었다. 3곡으로 압축됐다는 건 사실이 아니었다. 하지만 글은 구체적이었다. '댄스팝, 발라드, 실험적 구성.' 카테고리가 세 개. 일반적인 타이틀곡 후보 구성과 일치했다. 사실이 아니지만 그럴듯했다. 그럴듯하다는 건, 만든 사람이 업계를 안다는 뜻이었다.
'유출된 게 아니다. 만들어진 거다.'
누군가가 없는 정보를 만들어서 팬카페에 심고 있었다. 혼란을 만들기 위해서. 또는 반응을 관찰하기 위해서. 글 작성 시간은 오전 11시 43분. 오늘 콘텐츠 전략 회의가 10시에서 11시 사이였다. 회의가 끝난 직후. 시간이 맞았다. 우연일 수 있다. 우연이 아닐 수도 있다.
게시글을 캡처했다. 신고 버튼을 눌렀다. 민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이 글 삭제 처리해주세요. 팩트 아닙니다. 작성자 IP 확인 가능하면 해주세요."
민하의 답장. 42초 후.
"확인했어요. 삭제 처리할게요. IP는 팬카페 운영 권한으로는 확인 안 돼요. 플랫폼 측에 요청해볼게요."
이준이 답장을 쳤다. "가입일이 오늘이에요. 게시글도 이 글 하나뿐이고. 계정 자체가 이 글을 올리기 위해 만들어진 거예요."
민하의 답장이 빨랐다. "알겠어요. 신규 가입 후 24시간 이내 게시 제한 걸어놓을게요. 비슷한 계정 더 없는지도 볼게요."
이준은 화면을 봤다. '새벽 3시 12분'과 '오전 11시 43분'. 두 개의 시간이 머릿속에서 나란히 놓였다. 연결되는지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숫자가 쌓이면 패턴이 보인다. 패턴이 보이면 경로가 보인다. 경로가 보이면 이름이 보인다.
화이트보드를 다시 봤다. D-27. 내일이면 D-26. 숫자는 줄어들고 있었다. 줄어드는 숫자와 쌓이는 숫자. 둘 다 이준의 영역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