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923명의 얼굴
팬사인회장은 생각보다 작았다.
테이블 다섯 개가 일렬로 놓여 있었다. 의자 뒤에 노바 배너가 세워져 있었다. 바닥은 회색 타일. 조명은 세 개. 형광등이 아니라 촬영용 조명이었다. 빛이 위에서 내려와 테이블 위를 균일하게 비췄다. 카메라가 두 대. 한 대는 전체 화면을, 한 대는 멤버 클로즈업을. 테이블 위에 사인펜이 놓여 있었다. 검은색. 은색. 이준은 검은색을 골랐다. 은색은 앨범 표지 색과 겹쳤다. 검은색이 더 잘 보인다. 가독성의 문제. 이준은 팬사인회에서도 계산을 멈추지 못했다.
서지환이 옆 테이블에서 사인펜을 들어 보더니 내려놓았다. 다른 펜을 집었다. 세 번째 만에 고개를 끄덕였다.
"형, 펜 굵기 다른 거 알아?" 서지환이 말했다.
"검은색이 0.1밀리 더 굵어." 이준이 대답했다.
서지환이 피식 웃었다. "역시 형이야. 나는 잡아봐야 아는데."
이준은 서지환이 세 번째 펜을 고른 이유를 알았다. 서지환은 잉크가 고르게 나오는지를 손끝으로 확인한다. 숫자가 아니라 감각으로 고르는 사람. 이준과 같은 곳에 다른 길로 도착하는 방식이었다.
네임택을 만지작거렸다. '강이준'이라는 글자가 인쇄돼 있었다. 플라스틱이 차가웠다. 이름이 인쇄된 물건은 익숙했다. 앨범 크레딧에도, 계약서에도, 정산서에도 있었다. 하지만 팬 앞에서 그 이름을 달고 앉는 건 처음이었다. 계약서의 '강이준'은 채무자였다. 정산서의 '강이준'은 비용이었다. 팬 앞에서의 '강이준'은 뭘까. 아직 정의하지 못했다.
참석자 200명. 예매 시작 후 7분 만에 매진. 민하에게서 보고를 받았다. 7분. 뮤직탑 차트 갱신 속도보다 빠른 숫자. 결제 1건당 48,000원. 총 매출 960만 원. 대관료 250만, 운영비 300만을 빼면 순이익 약 410만 원. BEP 2억 3천에 대입하면 0.18%. 숫자로 보면 작았다. 하지만 이 0.18%가 만들어내는 건 매출이 아니었다. 200명이 한 공간에 모인다는 것. 그 경험이 SNS로 퍼진다는 것. 1인당 평균 팔로워 300명으로 잡으면 최대 도달 범위 60,000명. 노출률 5%로 잡아도 3,000명의 신규 노출. 이준은 그 연쇄를 계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계산보다 다른 무언가가 먼저일 것 같았다.
문이 열렸다. 줄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200명이 한 줄로 이어져 있었다. 복도까지 나가 있었다. 줄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줄이 움직였다. 한 명씩.
첫 번째 팬이 앞에 앉았다. 열아홉쯤으로 보였다. 교복 위에 패딩. 손에 앨범을 들고 있었다. 앨범 모서리가 닳아 있었다. 여러 번 꺼내 봤다는 뜻이었다. 포스트잇이 붙어 있었다. '이준 오빠 사인 부탁해요 ♡'. 또박또박한 글씨.
"안녕하세요." 이준이 말했다.
팬의 눈이 커졌다. 입이 열렸다가 닫혔다. 다시 열렸다.
"진짜다..."
이준은 사인을 했다. 펜이 앨범 표지 위를 움직였다. 사인을 연습한 적이 없었다. 연습생 시절에 다른 멤버들이 사인을 만드는 동안 이준은 스프레드시트를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이준의 사인은 글씨체에 가까웠다. 디자인이 아니라 문자. 예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읽을 수 있었다. 이준다웠다.
옆에서 서지환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서지환은 이미 두 번째 팬과 대화 중이었다. 목소리가 달랐다. 무대 위의 파워풀한 목소리도, 연습실에서 갈라지는 목소리도 아닌. 부드럽고 정확하게 조절된 톤. 이준이 들어본 적 없는 세 번째 서지환. 팬 앞에서 서지환은 또 다른 사람이 됐다. 서지환에게 감정은 언어였다. 이준에게 숫자가 언어인 것처럼.
태현은 팬과 농담을 주고받고 있었다. 웃음소리가 컸다. 모자를 벗고 있었다. 팬 앞에서는 모자를 쓰지 않았다. 이준은 그걸 처음 알았다. 정우는 조용히 사인하면서 팬이 건네는 편지를 양손으로 받았다. 예의 바른 동작. 정우의 예의는 연습이 아니라 성격이었다.
한도윤의 테이블 쪽을 봤다. 도윤이 팬과 대화하고 있었다. 자연스러웠다. 시선 처리. 고개를 기울이는 각도. 팬이 건네는 선물을 양손으로 받는 동작. 연습생의 어색함이 없었다. 미디어 트레이닝에서 배우는 기술들. 시선은 눈에서 시작해 입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눈으로 돌아오는 삼각형 경로. 고개는 7도 기울이면 관심의 표시. 이준은 그 수치를 알았다. 트레이닝에서 배웠으니까. 하지만 도윤은 그 훈련을 받은 적이 없었다.
'어디서 익힌 거지.'
질문을 접었다. 팬사인회 중이다.
다섯 번째. 열 번째. 스무 번째. 이준은 사인을 하고, 인사를 하고, 포스트잇을 읽었다. 대부분 짧았다. '응원해요.' '파이팅.' '사랑해요.' '힘내세요.' 단어가 반복됐다. 하지만 손글씨는 매번 달랐다. 같은 단어, 다른 사람. 같은 '사랑해요'인데 열다섯 가지 필체. 어떤 건 둥글고, 어떤 건 각졌고, 어떤 건 기울어져 있었다. 이준은 글씨체의 차이를 봤다. 통계적으로 무의미한 차이. 하지만 의미가 없지 않은 차이.
열여덟 번째 팬이 말했다. "이준 오빠, 저 수학 싫어하는데 오빠 때문에 숫자가 좋아졌어요."
이준은 그 말에 1초 멈췄다. 대답이 필요했다. 숫자가 아닌 대답.
"숫자가 좋아진 게 아니라, 숫자를 좋아하는 사람이 보이기 시작한 거예요."
팬이 얼굴을 가렸다. 손가락 사이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준은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스프레드시트에서는 출력값을 예측할 수 있었다. 사람 앞에서는 안 됐다.
서른일곱 번째 팬이 앞에 앉았다. 스물두셋쯤. 에코백을 메고 있었다. 에코백에 노바 로고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다이소 스티커 용지에 출력한 것. 3화에서 민하의 맥북에 붙어 있던 것과 같은 종류.
"이준님."
"네."
"저, 923명 중 한 명이에요."
이준의 펜이 멈췄다. 앨범 표지 위에서. 검은 잉크가 멈춘 자리에 점이 찍혔다.
"...네?"
"이준님이 계산한 거요. 스트리밍 총공 참여자 923명. 저 그중 한 명이에요." 팬이 웃었다. 긴장한 웃음이 아니었다. 자부심이 섞여 있었다. "팬카페에서 총공 가이드 보고 새벽에 참여했어요."
923. 3화. 강남역 카페에서. 이준이 시뮬레이션을 보여줬다. 민하가 암산으로 먼저 맞혔다. 615 곱하기 1.5. 922.5. 반올림해서 923. 민하가 '923명이죠'라고 말했을 때 이준의 손이 멈췄다. 지금도 멈췄다.
그 숫자는 스프레드시트의 셀 안에 있었다. 행과 열의 교차점. 수식의 결과값. 변수에 계수를 곱하고 반올림한 값.
그 값이 지금 의자에 앉아 있었다. 눈이 있었다. 입이 있었다. 목소리가 있었다. 에코백을 메고 노바 스티커를 붙이고 새벽에 앱이 튕겨도 다시 켜는 손이 있었다. 셀에는 없는 것들. 셀에 담을 수 없는 것들.
"그때 새벽에 스밍 했어요. 앱이 튕겼는데 다시 켰어요. 세 번 튕겼는데 네 번 켰어요." 팬이 앨범을 내밀었다. "사인 부탁해요."
이준은 앨범을 받았다. 펜을 들었다. 글씨가 평소보다 느렸다. 속도를 조절한 게 아니었다. 손이 먼저 느려졌다. '세 번 튕겼는데 네 번 켰어요.' 그 문장은 수식으로 바뀌지 않았다. 인내심 지표? 충성도 계수? 아니었다. 수식이 아니었다. 사람이었다.
'923명이 숫자일 때는 계산이 됐다. 한 명이 앞에 앉으니까 계산이 안 된다.'
"감사합니다."
그것만 나왔다. 더 말해야 했는지 모르겠다. 새벽에 앱이 세 번 튕겨도 네 번째 켜는 사람. 그 사람의 얼굴이 지금 이준 앞에 있었다. 이 얼굴에 맞는 말을 이준은 몰랐다. 숫자가 아닌 감사에 대응하는 문장이 이준의 사전에 없었다.
팬이 일어섰다. 다음 사람이 앉았다. 이준은 다시 사인을 했다.
팬사인회가 끝났다. 200명. 2시간 17분. 1인당 평균 41초. 이준은 그 숫자를 자동으로 계산했다. 습관. 멈출 수 없는 습관.
테이블 위에 포스트잇이 쌓여 있었다. 열다섯 장. 이준은 하나씩 모아서 주머니에 넣었다.
백스테이지. 멤버들이 물을 마시고 있었다. 서지환이 목을 돌리면서 말했다.
"형, 나 팬분이 울었어. 사인하는데 갑자기 눈물이---"
"나한테도 한 명 있었어." 태현이 물병 뚜껑을 열면서 말했다. 모자를 다시 쓴 채로. "앨범 주면서 손이 떨리는 거야. 근데 웃고 있어. 떨리면서 웃는 거. 나 그거 처음 봤어."
정우가 편지 봉투를 정리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요. 편지를 주시는데 봉투에 스티커를 붙여놓으셨더라고요. 하나하나 다 다른 스티커를."
서지환이 이준을 봤다. "형은? 뭐 느꼈어?"
이준은 1초 동안 대답을 찾았다. 숫자가 아닌 대답을.
"923명 중 한 명을 만났어."
서지환이 고개를 갸웃했다. 태현이 모자 밑에서 이준을 봤다. 정우가 손을 멈췄다.
"923명?" 서지환이 물었다.
"총공 참여자 수야. 스프레드시트에 있던 숫자인데, 그 숫자가 오늘 의자에 앉아 있었어."
서지환은 이준을 2초 봤다. 뭔가를 읽으려는 눈이었다. 이준이 타인의 내면을 읽는 것처럼, 서지환도 이준의 내면을 읽으려 했다.
"형이 그런 말 하는 거 처음이다."
이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서지환이 맞았다.
한도윤이 마지막에 나갔다. 스태프에게 목례를 하고. 1화 때 이사에게 했던 인사와 같은 각도. 15도.
민하가 뒤편에서 운영 정리를 하고 있었다. 이준과 시선이 마주쳤다. 민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어요'는 없었다. 고개만. 이준도 끄덕였다. 그걸로 됐다. 어떤 사람과는 문장이 필요 없었다.
연습실. 혼자였다.
포스트잇 한 장을 봤다. 분홍색. 또박또박한 글씨.
'이준 오빠 덕분에 제 하루가 바뀌었어요.'
이준은 그 문장을 봤다. 스프레드시트에 넣을 수 없었다. 열이 없었다. 행도 없었다. 숫자가 아니었다. 수식에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넣지 않기로 했다. 넣을 수 없어서가 아니라, 넣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어떤 것들은 셀 바깥에 있어야 했다. 수식 안에 들어가면 변수가 된다. 변수가 되면 조작할 수 있게 된다. 조작 가능해지면 무게가 사라진다. 이 문장은 무게를 잃으면 안 됐다.
이준은 포스트잇을 노트북 뚜껑 안쪽에 붙였다. 닫으면 보이지 않고, 열면 보이는 곳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