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화. 이름 석 자의 무게
서지혁이 서류를 내밀었다.
D-85. 토요일. 성수동 사무실.
오전 열 시. 사무실에 세 사람이 앉아 있었다. 서지혁, 나수빈, 연화. 테이블 위에 서류 한 부. 두 장. 위임장과 수임 계약서.
어젯밤 하경과 삼겹살을 먹었다. 소주를 마셨다. 하경이 '이기지 못해도 네 편이야'라고 했다. 그 말이 아직 남아 있었다. 오늘 아침 한남동에서 나올 때 태욱이 '오늘 어디 가?'라고 물었다. '하경이 만나요'라고 대답했다. 거짓말이었다. 오늘 만나는 사람은 하경이 아니라 변호사였다. 태욱이 '그래'라고 말하고 아이패드로 시선을 돌렸다. 토요일 아침의 태욱은 느긋했다. 커피를 두 잔 마시고, 뉴스를 보고, 점심쯤 골프를 가는 것이 루틴이었다. 연화가 어디 가든 '그래'였다. 관심이 없는 것인지, 이미 세나를 통해 확인하고 있어서 묻지 않는 것인지.
성수동 사무실의 형광등이 켜져 있었다. 선풍기가 돌고 있었다. 창밖으로 토요일 오전의 성수동이 보였다. 평일보다 사람이 많았다. 카페 앞에 줄이 서 있었다.
어제 밤 다섯 번째 녹음을 확보했다. 37분. 태욱이 금요일 저녁에 전화를 받으면서 한 말이었다. '그 사람 만나서 뭘 하려는 건데?' 연화가 이세린과 약속이 있다고 했을 때. 태욱은 이세린의 이름을 '그 사람'이라고 불렀다.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것은 존재를 축소하는 방법이었다. 나수빈의 분류표에서 유형 1과 유형 3이 동시에 작동한 문장이었다. 이세린의 이름을 지우고 범주로 대체하는 것. 사람을 축소하는 언어. 태욱은 늘 그랬다. 연화의 주변 사람들을 이름이 아니라 범주로 불렀다. 하경은 '동생', 이세린은 '그 사람', 나수빈은 알지도 못했다.
서지혁에게 파일을 보냈다. 답이 왔다. '내일 오전. 성수동.'
그리고 오늘. 서류가 나왔다.
위임장. 법무법인 정연. 담당 변호사 서지혁. 의뢰인 한연화.
연화는 그 서류를 봤다. 한연화. 자기 이름 석 자가 위임장 위에 인쇄되어 있었다. 결혼 10년 동안 이 이름은 '전 상무 부인', '정명희 여사 며느리', '대한그룹 며느리'라는 수식어 뒤에 숨어 있었다. 위임장 위의 한연화는 수식어가 없었다. 이름만 있었다. 이 이름으로 마지막으로 불린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대학 졸업 이후로. 결혼식 이후로. 한연화는 전연화가 되었고, 전 상무 부인이 되었고, 연화 씨가 되었다. 위임장 위의 한연화는 결혼 전의 이름이었다.
서지혁이 펜을 건넸다.
"서명하시면 수임이 개시됩니다."
연화는 펜을 받았다. 무게가 있었다. 서지혁의 만년필이었다. 볼펜이 아니었다.
"한 가지 확인합니다."
서지혁이 말했다.
"서명 후에는 돌아가기 어렵습니다."
"알아요."
"상대방이 알게 됩니다."
"언제요?"
"소장 접수 후요."
연화는 펜을 들고 있었다. 펜 끝이 종이 위에 닿기 직전이었다. 손가락에 만년필의 무게가 느껴졌다. 가벼운 펜이 아니었다. 서지혁이 자기 펜을 건넨 것이 의미가 있었다. 서류를 쓸 때 쓰는 펜. 법적 서류에 서명할 때 쓰는 펜.
"접수 전까지는요?"
"모릅니다."
"시간이 있다는 거죠."
서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화는 서명했다. 한연화. 세 글자. 펜이 종이 위를 지나가는 감촉이 손끝에 남았다. 만년필의 잉크가 부드럽게 번졌다.
서지혁이 서류를 받았다. 서명을 확인했다. 잉크가 마르기를 기다렸다. 5초. 접었다. 봉투에 넣었다.
연화는 자기 손을 봤다. 방금 서명한 손이었다. 떨리지 않았다. 18화에서 녹음 버튼을 누를 때도 떨리지 않았다. 이 떨리지 않음이 나수빈이 말한 것이었다. 안 떨리는 게 더 무서운 거라고. 하지만 연화는 알았다. 떨리지 않는 것은 무서운 게 아니라 준비된 것이었다.
"수임료 말씀드리겠습니다."
"네."
"착수금 500만 원입니다."
연화의 통장에 가용 금액은 50만 원이었다. 가족카드가 아닌 연화 명의의 돈. 450만 원이 부족했다.
"분할 가능합니다."
서지혁이 말했다.
"3회까지요."
"감사합니다."
"성공보수는 별도입니다."
서지혁이 수임료 안내서를 건넸다. 연화는 읽었다. 착수금 500만 원. 성공보수 재산분할액의 10%. 기타 실비. 숫자가 현실이었다.
이세린에게서 빌린 돈이 있었다. 200만 원. 아직 쓰지 않은 돈. 행사 수익에서 빼놓은 비상금이 150만 원. 합치면 350만 원. 150만 원이 부족했다. 분할이 가능하니까 첫 회차를 먼저 내고, 나머지는 다음 행사 수익에서 충당할 수 있었다.
하경에게 빌리는 것은 하지 않기로 했다. 하경은 이미 진술서를 썼다. 눈물을 흘리면서. 돈까지 빌리면 하경의 부담이 너무 커진다. 이건 연화의 싸움이었다. 돈도 연화가 마련해야 했다.
10년간 가족카드로 살았다. 자기 돈이라는 것이 없었다. 카드 명세서는 태욱에게 갔다. 연화가 무엇을 사고, 어디서 먹고, 누구를 만나는지 카드 한 장으로 추적할 수 있었다. 이혼을 준비하면서 처음으로 현금의 의미를 알았다. 현금은 추적되지 않는 돈이었다. 자유의 최소 단위.
전 타임라인에서 연화는 돈이 없어서 졌다. 변호사를 제대로 구하지 못했고, 증거를 모을 비용이 없었고, 소송 중에 생활비가 바닥났다. 이번에는 달랐다. 적지만 있었다. 없는 것과 적은 것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착수금은 다음 주까지 입금하겠습니다."
"네."
나수빈이 노트북을 열었다.
"녹음 5건 정리했어요."
화면을 돌렸다. 표가 업데이트되어 있었다. 5건. 날짜, 시간, 발언 내용, 유형 분류, 교차 여부. 색깔이 채워져 있었다. 처음 봤을 때 두 칸이 비어 있던 표. 이제 전부 채워져 있었다.
나수빈이 화면을 가리켰다.
"유형 1이 3건이에요."
"지출 확인이죠?"
"네. 유형 3이 4건."
"교우 제한."
연화가 말했다. 나수빈의 분류를 외우고 있었다.
"교차는요?"
서지혁이 물었다.
"3건이 교차해요."
나수빈이 표의 색깔을 짚었다. 빨간색으로 표시된 칸.
"같은 날 두 유형 이상이요."
서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명희 발언은요?"
나수빈이 스크롤했다.
"2건. 둘 다 교우 제한."
"태욱 씨와 교차하면요?"
"가족 시스템 입증이요."
나수빈이 노트북을 닫았다. 닫으면서 연화를 봤다.
"5건이면 됩니다."
나수빈의 목소리가 달라져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의 냉소가 아니었다. 보고하는 톤이었다. 자기 일의 결과를 전달하는 사람의 톤. 첫 만남에서 나수빈은 연화를 사모님이라고 불렀다. 두 번째에서는 호칭이 사라졌다. 세 번째에서는 표를 만들어 왔다. 네 번째에서는 5건이면 됩니다라고 했다. 냉소에서 분석으로. 분석에서 확신으로. 나수빈의 변화가 연화의 사건이 진짜라는 것을 방증하고 있었다.
서지혁이 서류를 정리하며 말했다.
"앞으로의 일정입니다."
연화와 나수빈이 봤다.
"녹음 전사본을 만듭니다."
"제가 할게요."
나수빈이 말했다.
"하경 씨 진술서 최종본을 받습니다."
"날짜 보강 중이에요."
연화가 말했다.
"박준석 건은요?"
서지혁의 목소리가 반 톤 낮아졌다. 비트-K.
"확인 중입니다."
서지혁이 더 말하지 않았다. 박준석과 비트-K에 대해 서지혁은 아직 결론을 내리지 않은 것이었다. '만나지 마십시오'라는 경고 이후 서지혁이 직접 움직이고 있었다.
"이세린 씨 진술도 필요합니까."
연화가 물었다.
"있으면 좋습니다."
"요청해볼게요."
"강제는 안 됩니다."
서지혁이 말했다. 이세린의 진술은 선택이었다. 하경의 진술은 가족이라는 편향 가능성이 있었다. 이세린은 가족이 아니었다. 이혼 경험이 있는 타인. 그 시선이 하경의 진술을 보완할 수 있었다.
"소장 접수 시기는요?"
연화가 다시 물었다.
"증거 정리 후 결정합니다."
"대략 언제쯤이요?"
"서두르지 않겠습니다."
서지혁이 일어섰다.
"준비가 완성되면 접수합니다."
봉투를 가죽 가방에 넣었다. 연화의 서명이 들어간 위임장. 그 봉투가 가방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봤다. 연화의 이름이 서지혁의 가방 안에 들어간 것이었다.
나수빈이 노트북을 가방에 넣었다.
"수고하셨어요."
나수빈이 연화에게 말했다. 처음이었다. 나수빈이 연화에게 수고했다고 말한 것은. 사모님도 아니고, 의뢰인도 아니고. 함께 일한 사람에게 하는 말이었다. 사모님에서 동료로. 그 거리가 줄어드는 데 10화가 걸렸다.
"나수빈 변호사도요."
나수빈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갔다. 구두 소리가 계단을 내려갔다. 서지혁도 나갔다. 문이 닫혔다.
혼자 남았다. 성수동 사무실. 형광등이 켜져 있었다. 선풍기가 돌고 있었다. 창밖으로 성수동 토요일 오전이 보였다. 카페 앞에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아이를 데리고 걷는 부부가 있었다. 남자가 아이를 안고 있었다. 여자가 웃고 있었다. 그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가 나갔다.
이 사무실에서 보낸 시간을 떠올렸다. 처음 왔을 때는 텅 빈 방이었다. 책상 하나, 의자 하나. 지금은 의자가 셋이 되었고, 서랍에 USB와 수첩이 들어 있었고, 테이블 위에 수임료 안내서가 놓여 있었다. 이 방이 채워지는 속도가 연화의 준비가 진행되는 속도였다.
테이블 위에 수임료 안내서가 놓여 있었다. 500만 원. 숫자를 다시 봤다. 이 돈을 마련하는 것이 첫 번째 과제였다. 이세린에게서 빌린 돈. 행사 수익에서 빼놓은 비상금. 합치면 될 것이었다. 넉넉하지 않았다. 하지만 됐다.
수첩을 꺼냈다.
수임 계약 체결. D-85.
녹음 5건 확보. 나수빈 전사본 작업 시작.
하경 진술서 날짜 보강 중.
박준석/비트-K — 서지혁 확인 중. 대기.
착수금 500만 원 — 다음 주 입금.
적고 한 줄을 더 적었다.
한연화. 위임장에 서명했다. D-85.
수첩을 닫았다. 펜을 놓았다.
서명할 때의 감촉이 손끝에 남아 있었다. 만년필이 종이 위를 지나가는 느낌. 부드럽고 무거웠다. 이름 석 자를 쓰는 데 2초. 10년의 결혼 생활에 선을 긋는 데 2초.
핸드폰을 들었다. 하경에게 전화했다.
"서명했어."
"진짜?"
"응."
하경이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었다.
"축하해야 되는 거야?"
"모르겠어."
"나는 축하할래."
"고마워."
"언니."
"응."
"잘하고 있어."
"하경아."
"응."
"진술서 날짜 보강 빨리 해줘."
"이번 주 안에 할게."
"고마워."
"그만 고마워해."
하경이 웃었다. 전화를 끊었다. 눈이 뜨거워졌다. 울지 않았다. 울 시간은 나중에 있다. 지금은 착수금을 마련하고, 녹음 전사본을 확인하고, 진술서 최종본을 받는 것이 먼저였다.
사무실 불을 껐다. 문을 잠그고 계단을 내려갔다. 성수동 골목으로 나왔다. 토요일 오전의 햇살이 밝았다. 건물 벽에 빛이 반사되고 있었다. 카페에서 원두 볶는 냄새가 흘러나왔다. 따뜻한 냄새였다.
걸었다. 큰길까지. 택시를 잡았다. 한남동.
뒷좌석에 앉았다. 창밖을 봤다. 한강이 보였다. 다리 위로 차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강 위에 빛이 부서지고 있었다.
한남동에 돌아가면 아내가 된다. 토요일 점심을 준비해야 했다. 태욱이 집에 있을 것이었다. 평범한 토요일. 밥을 짓고, 반찬을 데우고, 식탁에 앉아 먹는 것. 아침에 서명한 위임장의 잉크가 마르는 동안 연화는 밥을 짓는다. 태욱의 아내. 정명희의 며느리. 대한그룹의 며느리. 하지만 서지혁의 가방 안에 연화의 이름이 들어 있었다. 위임장. 법무법인 정연. 한연화.
이 이름으로 싸운다. 수식어 없이. 직함 없이. 이름 석 자의 무게로. 한연화로.
택시가 한남대교를 건넜다. 강이 넓었다. 수면 위로 빛이 부서지고 있었다. 바람이 창문 틈으로 들어왔다. 다리를 건너는 동안 연화는 창밖을 보고 있었다.
D-85.
11화에서 행사장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12화에서 이세린을 만났다. 13화에서 꽃 행사를 완수했다. 14화에서 수요일 패턴을 추적했다. 15화에서 나수빈이 표를 만들어 왔다. 16화에서 세나의 파이프를 두 개 발견했다. 17화에서 박준석이 찾아왔다. 18화에서 갈비찜으로 녹음을 얻었다. 19화에서 하경의 진술서를 읽었다.
그리고 오늘. 한연화라는 이름으로 서명했다. 10개의 화. 85일. 수첩 한 권. 녹음 5건. 진술서 1부. 나수빈의 표 1개. 박준석의 종이 1장. 그리고 위임장 1부.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