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화. 타인의 눈으로 본 10년
봉투가 테이블 위에 놓였다.
D-87. 목요일. 성수동 사무실.
어제 태욱의 네 번째 녹음을 확보했다. 38분. 갈비찜으로 수요일 외출을 막고 얻어낸 것이었다. 서지혁은 '5건까지 1건'이라고 했다. 하나만 더. 하지만 오늘은 녹음이 아니라 다른 것이 도착했다. 하경이 약속한 것.
하경이 내밀었다. 흰 봉투. A4 네 장. 이메일로 받아 한 번 읽은 것이었다. 그때는 노트북 화면으로 읽었다. 오늘 하경이 원본을 가져왔다. 손글씨가 화면과 달랐다. 종이 위의 글씨는 무게가 있었다.
하경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봉투를 내려놓고 손을 무릎 위에 올렸다. 눌렀다.
"다 썼어."
"고마워."
"몇 번 다시 썼어."
"알아."
봉투를 열었다. 네 장을 꺼냈다. 하경의 손글씨. 볼펜으로 쓴 글씨가 일정했다. 여러 번 고쳐 쓴 흔적이 있었다. 어떤 줄은 지우고 다시 쓴 것이 보였다. 어떤 줄은 힘이 들어가 있었다.
첫 문단.
'저는 한하경, 한연화의 동생입니다. 언니의 결혼 생활 10년간 직접 보고 느낀 것을 적습니다.'
이메일로 읽었을 때는 눈이 빠르게 지나갔다. 종이로 읽으니 달랐다. 볼펜의 힘이 느껴졌다. 획이 굵어지는 곳과 가늘어지는 곳이 있었다. 감정의 밀도가 글씨 두께에 남아 있었다. 하경의 볼펜이 이 문장을 쓸 때 어떤 자세였을지가 떠올랐다. 책상 앞에 앉아서. 아니면 바닥에 앉아서. 하경은 바닥에 앉아 쓰는 습관이 있었다. 쿠션을 깔고, 무릎 위에 종이를 올리고, 허리를 굽히고 쓰는 자세.
두 번째 문단.
'명절에 언니는 부엌에서 나오지 못했습니다. 시어머니와 형수가 식사를 마칠 때까지 주방에 있었습니다. 세 번의 추석과 네 번의 설날에 방문했는데, 언니가 가족과 함께 식탁에 앉은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시야가 흐려졌다. 눈을 깜빡였다. 사실이었다. 명절에 연화는 만들고, 차리고, 설거지했다. 당연한 순서였다. 그 순서가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연화는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다. 하경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하경은 언니가 식탁에 앉지 못하는 것을 봤다. 연화는 앉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경은 못 앉는다고 봤다. 같은 장면. 다른 해석.
세 번째 문단.
'형부가 전화를 안 받으면 언니는 숨이 빨라졌습니다. 세 번 전화했는데 안 받았을 때, 언니는 다리를 떨고 있었습니다. 형부가 받았을 때 첫마디는 "미안해"였습니다.'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종이가 미세하게 구겨졌다. 태욱에게 전화가 안 될 때의 공포.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 왜 안 받지. 내가 뭘 잘못했나. 받으면 먼저 사과하던 자신. '미안해, 잠깐 궁금해서.' 하경은 그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언니가 전화 세 번 만에 다리를 떠는 것을. 연화가 모르는 사이에 하경은 그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10년 동안. 서랍 안에 넣어두듯이. 꺼내야 할 때가 오면 꺼내려고.
네 번째 문단.
'시어머니가 이야기하는 동안 언니는 웃으면서 울고 있었습니다. 재작년 추석이었습니다.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는데, 눈이 젖어 있었습니다.'
종이를 내려놓았다. 손등으로 눈 아래를 닦았다. 젖어 있었다. 이틀 전 노트북으로 읽었을 때도 울었다. 오늘 다시 울고 있었다. 하경의 손글씨로 읽으니 더 무거웠다. 화면의 글자는 지울 수 있다. 종이의 글씨는 지워도 자국이 남는다. 하경이 지우고 다시 쓴 줄들이 남아 있었다. 어떤 문장을 쓰고 지우고, 다시 쓴 것이었다. 그 과정이 종이에 기록되어 있었다.
웃으면서 울고 있었다는 것을 연화는 몰랐다. 10년간 몰랐다. 정명희가 말하는 동안 연화는 웃고 있다고 생각했다. 예의 바른 며느리의 미소라고 생각했다. 하경은 눈이 젖어 있다는 것을 봤다. 타인의 눈이 없으면 자기 얼굴을 모른다.
하경이 연화의 손을 잡았다. 따뜻했다. 연화의 손은 차가웠다. 하경의 손이 연화의 손가락을 감쌌다.
"다 읽지 않아도 돼."
"읽었어."
"나는 다 기억해."
하경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떨리지 않았다. 단단했다. 울면서 썼지만 지금은 울지 않았다. 쓸 때 다 울었기 때문이었다.
연화의 눈에서 물이 흘렀다. 소리가 나지 않았다. 10년간 익힌 방법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집이 아니었다. 성수동 사무실이었다. 형광등 불빛 아래, 선풍기가 돌고, 창밖에서 골목 소음이 올라오는 이 공간은 연화의 것이었다.
작은 소리가 나왔다.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 내쉬는 소리. 코끝이 붉어졌다. 하경이 손을 더 세게 잡았다.
"괜찮아."
"괜찮아."
같은 말을 둘이 동시에 했다. 하경이 웃었다. 입꼬리만 올라간 웃음이었다.
3분이 지났다. 연화가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눈을 닦았다. 손등으로. 티슈를 쓰지 않았다. 손등이 젖었다.
하경이 가방에서 물병을 꺼냈다. 연화에게 건넸다. 연화가 한 모금 마셨다. 차가운 물이 목을 타고 내려갔다.
문이 열렸다. 서지혁이 들어왔다.
연화의 얼굴을 보고 멈췄다. 0.5초. 눈이 젖어 있는 것을 봤을 것이다. 코끝이 붉은 것을 봤을 것이다. 서지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천천히 맞은편에 앉았다. 가방에서 서류를 꺼냈다.
연화가 진술서를 밀었다. 서지혁이 받았다.
첫 장부터 읽었다. 한 장에 1분. 네 장. 4분. 읽는 동안 표정이 바뀌지 않았다. 펜으로 두 군데에 밑줄을 그었다.
다 읽고 나서 진술서를 테이블에 놓았다. 안경을 벗었다. 안경다리를 접었다. 다시 썼다.
"이건 쓸 수 있습니다."
세 단어. 하경의 며칠 밤과 연화의 10년에 법원으로 갈 수 있는 무게를 부여했다. 서지혁의 '쓸 수 있습니다'는 감정이 아니라 판단이었다. 이 진술서가 법적 효력이 있다는 판단.
서지혁이 펜으로 밑줄 친 곳을 짚었다. 두 번째 문단의 명절 부분과 세 번째 문단의 전화 부분.
"두 곳이 핵심입니다."
"어떤 점이요?"
"구체적 행동이 있어요."
서지혁이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핵심을 짚었다.
"날짜를 특정해주세요."
하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추석이면 연도를 넣으면 되죠?"
"네. 월까지 있으면 좋습니다."
하경이 메모했다. 연화는 그 모습을 봤다. 동생이 자기 결혼 생활의 증거에 날짜를 넣고 있었다.
서지혁이 하경을 봤다.
"한하경 씨."
"네."
"이 진술서가 법정에 가면요."
서지혁이 잠깐 멈췄다.
"상대 측이 반박합니다."
"어떻게요?"
"편향된 가족 진술이라고."
하경의 눈이 좁아졌다. 화가 아니라 결심이었다.
"알아요."
"그래도 제출하시겠습니까?"
"제가 본 건 사실이에요."
하경이 연화를 봤다. 다시 서지혁을 봤다.
"편향이든 뭐든."
서지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펜을 가방에 넣었다. 일어섰다.
"수정본은 메일로 보내주세요."
"네."
서지혁이 나갔다. 문이 닫혔다.
하경과 연화, 둘만 남았다. 사무실이 조용해졌다. 선풍기 소리만 낮게 돌았다. 창밖으로 성수동 골목의 저녁이 시작되고 있었다. 카페 간판에 불이 켜졌다. 사람들이 퇴근길에 걸어가고 있었다.
"언니."
"응."
"아까 그 변호사 사람 괜찮아?"
"왜?"
"괜찮은 사람인지 내가 좀 봐야 하잖아."
연화가 웃었다. 소리 내어. 이 사무실에서 웃은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하지만 소리 내어 웃은 것은 처음이었다. 웃음이 벽에 부딪혀 돌아왔다. 좁은 사무실이라 소리가 가까웠다.
하경도 웃었다. 서류 위에 웃음소리가 흩어졌다.
"삼겹살 먹으러 가자."
"방금 울었는데?"
"울었으니까 고기 먹어야지."
하경의 논리였다. 울면 고기. 화나면 고기. 좋은 일이면 고기. 하경에게 고기는 모든 감정의 출구였다.
사무실 문을 잠그고 계단을 내려갔다. 골목으로 나왔다. 성수동 저녁이었다. 카페들에 불이 켜져 있었고, 사람들이 걸어 다니고 있었다. 나란히 걸었다. 발걸음이 맞지 않았다. 하경이 반 보 빨랐다. 늘 그랬다. 하경은 걸음이 빠른 사람이었다. 연화가 속도를 맞추면 하경이 늦춰줬다.
하경의 어깨가 연화의 팔에 닿았다. 체온이 전해졌다. 8월인데도 하경의 체온이 느껴진 것은 연화가 차가웠기 때문이었다.
삼겹살집이 골목 안쪽에 있었다. 간판이 작았다. 유리문을 밀고 들어갔다. 연기 냄새와 고기 굽는 냄새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환풍기가 돌고 있었다. 좌석이 반쯤 차 있었다. 다른 테이블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구석 자리에 앉았다.
"이인분이요."
하경이 주문했다. 소주도 시켰다. 연화는 말리지 않았다. 오늘은 마셔도 되는 날이었다.
고기가 올라왔다. 불판 위에 올리는 순간 기름이 튀었다. 지글지글 소리가 테이블을 채웠다. 연기가 올라왔다. 환풍기가 빨아들였다. 고기가 익어가면서 색이 변했다. 분홍에서 갈색으로. 가장자리가 먼저 익었다. 기름이 불판의 홈을 따라 흘렀다. 하경이 집게를 들었다가 연화에게 건넸다.
"언니가 구워."
연화가 집게를 들었다. 고기를 뒤집었다. 기름이 불판 위에서 소리를 냈다. 이 소리가 좋았다. 단순한 소리. 뒤집고, 익히고, 먹는 것. 단순한 행위.
소주를 한 잔 따랐다. 하경의 잔에. 하경이 연화의 잔에 따랐다. 잔을 부딪혔다. 소리가 작았다. 소주잔이니까. 한 입에 마셨다. 쓴맛이 목을 타고 내려갔다. 따뜻한 것이 위장에 닿았다.
"언니."
"응."
"이기지 못해도, 나는 네 편이야."
연화는 고기를 뒤집고 있었다. 집게를 잡은 손이 잠깐 멈췄다. 1초. 다시 뒤집었다.
"알아."
그 한 마디가 오늘의 전부였다. 이기지 못해도 네 편이라는 말. 결과와 상관없이 곁에 있겠다는 말. 세나의 '응원할게'와는 다른 종류의 문장이었다. 세나의 응원은 닫는 말이었다. 하경의 편은 여는 말이었다.
고기를 먹었다. 쌈장을 찍어 상추에 올렸다. 마늘도 올렸다. 입에 넣었다. 짭짤하고 기름지고 따뜻했다. 좋았다.
소주를 한 잔 더 마셨다. 하경의 볼이 붉어졌다. 연화의 볼도 붉어졌을 것이다.
"언니, 진술서 쓰면서 가장 힘들었던 거."
"응?"
"어떤 부분이었어?"
하경이 고기를 씹으면서 물었다.
"나한테 물어?"
"쓴 사람한테 물어야지."
하경이 소주를 한 모금 마셨다.
"전화 안 받을 때 다리 떠는 거."
연화가 잔을 내려놓았다.
"그거 보면서 울었어."
하경이 고기를 집었다. 불판 위에 올렸다.
"언니가 왜 사과하는지 몰랐어."
"나도 몰랐어."
"이제 알아?"
연화는 고기를 봤다. 기름이 지글거렸다.
"알아."
하경이 고기를 잘랐다. 가위로. 한 입 크기로. 연화의 접시에 올렸다.
"먹어."
연화가 먹었다. 소금에 찍어 먹었다. 기름기가 입안에 퍼졌다. 단순한 맛. 좋았다. 이 순간이 좋았다. 동생과 마주 앉아 고기를 먹는 것. 법정도 아니고 증거도 아닌, 그냥 두 자매가 고기를 먹는 시간.
삼겹살집을 나왔다. 밤 아홉 시. 성수동 골목에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었다. 가로등 불빛이 길 위에 원을 그리고 있었다.
나란히 걸었다. 하경이 연화의 팔짱을 꼈다. 술기운이 있었다. 걸음이 약간 흔들렸다. 연화도 마찬가지였다.
"택시 잡아줄까?"
"아니. 좀 더 걸어."
걸었다. 성수동 골목을 지나 큰길까지. 차 소리가 멀어졌다가 가까워졌다.
"언니."
"응."
"우리 이기자."
연화는 웃었다. 대답하지 않았다. 하경의 팔이 연화의 팔에 감겨 있었다. 그 체온이 오늘의 기록이었다.
택시를 잡았다. 하경을 먼저 태웠다.
"조심해서 가."
"언니도."
택시가 출발했다. 하경의 손이 창밖으로 흔들렸다. 작아졌다. 사라졌다.
연화는 다음 택시를 잡았다. 한남동.
뒷좌석에 앉았다. 한남대교를 건넜다. 강 위에 불빛이 흩어져 있었다.
오늘을 정리했다. 하경의 진술서 원본 확인. 서지혁 법적 검토 통과. 날짜 보강 후 확정. 하경의 결심. 삼겹살. 소주. 이기지 못해도 네 편이야.
수첩을 꺼냈다. 택시 안에서 적었다.
진술서 — 서지혁 승인. 날짜 보강 후 확정.
하경 — 반박 가능성 인지. 제출 의지 확인.
녹음 4건 확보. 잔여 1건.
수첩을 닫았다.
오늘은 증거의 날이 아니라 사람의 날이었다. 진술서 네 장과 삼겹살 이인분. 볼펜의 힘과 불판의 연기. 하경의 손과 소주잔. 법정에 가는 것은 서류지만, 서류를 만드는 것은 사람이었다. 하경이 쓴 네 장이 법원에 간다. 그 네 장 안에 10년이 들어 있다. 10년의 무게를 네 장이 버틸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하경은 쓸 수 있다고 했고, 서지혁은 쓸 수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