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화. 부드러운 칼은 녹음된다
수요일이었다.
D-88.
한남동. 오후 다섯 시.
어젯밤 박준석이 놓고 간 종이가 수첩 사이에 끼워져 있었다. 비트-K. 5억. 3년 전. 서지혁은 '만나지 마십시오'라고 했다. '보관만 하세요. 열지 마세요.' 서지혁이 경고를 먼저 보낸 것은 처음이었다. 그 경고의 무게가 하루 종일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오늘은 비트-K를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박준석의 떨리는 왼손. 5억이라는 숫자. 가상자산이라는 단어. 어젯밤부터 그것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하지만 서지혁이 확인하기 전에 움직이면 안 됐다. 서지혁의 선. 그 선 안에 있어야 했다.
오늘은 다른 일이 있었다. 수요일. 태욱이 나가는 날. 5주째.
연화는 주방에 서 있었다. 앞치마를 두르고 손을 씻었다. 물이 차가웠다. 수건으로 닦고 도마 위에 재료를 올렸다. 갈비. 무. 밤. 대추. 당근. 양파. 냉장고에서 꺼낸 재료들이 도마 위에 줄지어 있었다.
갈비찜을 만들기로 한 것은 오늘 아침이었다. 태욱이 출근하고 나서 결정했다. 수요일 저녁. 태욱이 나가는 날. 밥을 차려놓으면 나가기 어려워진다. 직접 만든 음식이면 더 어려워진다. 명분이 약해지니까.
간장, 설탕, 배즙, 마늘, 참기름. 양념장을 만들었다. 배를 갈았다. 즙이 도마 위로 번졌다. 양념장에 섞자 단내가 올라왔다. 갈비에 깊게 칼집을 넣고 양념장에 재웠다. 2시간. 그 사이에 무를 깍둑썰기 하고, 당근을 반달 모양으로 잘랐다. 칼이 도마를 두드리는 소리가 주방을 채웠다.
전 타임라인에서 연화는 요리를 잘했다. 태욱이 좋아하는 음식을 외우고, 계절마다 메뉴를 바꾸고, 명절에는 3일 전부터 준비했다. 그것이 아내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 타임라인에서도 요리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목적이 달랐다. 갈비찜이 무기였다.
4시. 냄비에 갈비를 넣고 물을 부었다. 불을 켰다. 끓기 시작하면서 거품이 올라왔다. 걷어냈다. 양념장을 부었다. 무와 밤과 대추를 넣었다. 뚜껑을 덮었다. 불을 줄였다. 냄비 아래서 가스 불꽃이 파랗게 낮아졌다.
양념장 냄새가 주방을 넘어 거실까지 번졌다. 간장과 설탕이 끓으면서 나는 달고 짭짤한 냄새. 이 냄새가 현관까지 가면 됐다. 태욱이 문을 열었을 때 이 냄새를 맡으면 됐다.
에어컨을 끄고 창문을 약간 열었다. 냄새가 더 퍼지도록.
하경에게 전화가 왔다.
"언니, 뭐 해?"
"갈비찜."
"언니가? 갑자기?"
"오늘 필요해서."
하경이 잠깐 말이 없었다.
"작전이지?"
"비슷해."
"대단하다 진짜."
하경이 웃었다. 연화도 입꼬리가 올라갔다.
"잘 될 거야."
"고마워."
전화를 끊었다. 냄비에서 보글보글 소리가 났다.
5시 반. 뚜껑을 열고 국물을 끼얹었다. 갈비가 윤기를 띠기 시작했다. 무가 반투명하게 익어가고 있었다. 간을 봤다. 짭짤했다. 소금을 한 꼬집 넣었다. 다시 뚜껑을 덮었다.
여섯 시. 태욱이 퇴근했다. 평소보다 일찍이었다. 현관문이 열렸다. 구두 벗는 소리. 발걸음이 거실을 지나 주방 쪽으로 왔다. 멈췄다. 냄비 쪽을 봤다. 눈이 부드러워졌다. 이 표정은 진짜였다. 음식 앞에서 태욱은 솔직해졌다.
"직접 한 거야?"
"네. 오랜만에 해봤어요."
태욱이 냄비 쪽을 봤다. 뚜껑 틈으로 증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갈비찜 냄새가 주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오늘은 안 나가요?"
수요일이었다. 태욱이 나가는 날이었다.
태욱이 냄비 뚜껑을 들었다. 증기가 올라왔다. 갈비 냄새가 더 진해졌다.
"이거 몇 시간 한 거야?"
"두 시간쯤이요."
"혼자서?"
"네."
태욱이 뚜껑을 내려놓았다. 눈이 0.3초 좁아졌다. 풀렸다.
"오늘은 됐어. 같이 먹자."
됐어. 한 단어로 수요일 약속을 취소한 것이었다. 갈비찜 냄새가 태욱의 계획을 바꾼 것이었다. 혹은 아내가 직접 요리한 저녁 앞에서 나가겠다고 말하기 어려웠던 것이었다.
식탁에 앉았다. 밥, 갈비찜, 시금치나물, 김치. 핸드백을 옆 의자에 놓았다. 녹음은 이미 돌고 있었다. 주방에서 갈비찜을 덜 때 버튼을 눌렀다.
태욱이 와인을 따랐다. 연화의 잔에 먼저. 붉은 와인이 유리잔 벽을 타고 내려가며 소리를 냈다.
"고마워요."
"응."
태욱이 갈비를 집어 접시에 놓았다. 한 입 먹었다.
"맛있다."
"간이 맞아요?"
"응. 완벽해."
완벽해. 10년간 들은 칭찬 중 가장 흔한 단어였다. 행사가 완벽해. 준비가 완벽해. 갈비찜이 완벽해. 완벽하다는 말은 더 이상 볼 것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정명희의 통과와 태욱의 완벽은 같은 구조였다. 칭찬의 형태를 빌린 종결.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떫은맛이 혀를 감쌌다. 식탁 위에 촛불은 없었다. 형광등 아래의 식탁이었다. 로맨틱한 저녁이 아니라 일상의 저녁이었다. 그 일상 안에서 녹음기가 돌고 있었다.
"요즘 이세린 씨 자주 만나?"
왔다.
연화는 갈비를 젓가락으로 집었다. 뼈에서 살이 부드럽게 떨어졌다. 잘 익은 것이었다.
"가끔요. 선배라서."
"그 사람, 이혼하고 혼자잖아."
태욱이 와인잔을 돌렸다.
"좋은 영향은 아닌 것 같은데."
두 번째 발언. 첫 번째는 며칠 전 식탁에서였다. 같은 구조. 이세린을 만나지 말라고 직접 말하지 않고, '좋은 영향'이라는 프레임으로 감싸는 것.
"선배한테 배울 게 많아요."
"당신이 사업을 해?"
목소리에 의아함이 있었다. 아내가 사업을 한다는 것이 상상 밖이라는 어조였다. 연화는 그 어조를 녹음기에 담았다.
"아직 알아보는 단계예요."
태욱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런 건 나한테 먼저 말하지."
태욱이 밥을 한 술 떴다.
"재단 쪽에 자리 만들어줄 수도 있어."
또 나왔다. 선택지를 주는 형태. 선택지의 범위가 자기 안에 있는 문장이었다. '재단 쪽에 자리'는 태욱이 관리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연화의 독립이 아니라 태욱의 영역 확장. 나수빈의 분류표가 떠올랐다. 유형 1. 지출과 활동 범위를 자기 관할 안에 두는 것.
연화는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잔을 내려놓았다. 태욱이 밥을 먹고 있었다. 젓가락질이 규칙적이었다.
"태욱 씨."
태욱이 올려다봤다.
"제가 누구 만나는지 왜 신경 쓰세요?"
태욱이 국을 떴다. 마셨다.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부부 사이에 뭘 숨겨."
세 번째 문장이었다. 교우 관계 제한. 독립 의지 축소. 부부 프레임으로 감시 정당화. 나수빈의 표에서 세 가지 유형이 한 식탁 위에서 동시에 나왔다.
"나는 당신이 걱정돼서 그러는 거야."
포장이 완성됐다. 걱정이라는 이름의 감시. 부드러운 목소리. 합리적인 어조. 그 아래 '허락 없이 움직이면 안 돼'가 깔려 있었다. 10년간 이 문장을 사랑이라고 믿었다. 걱정, 배려, 부부의 당연한 확인. 그 믿음이 감옥이었다.
"알겠어요."
더 밀지 않았다. 태욱의 어깨가 미세하게 내려갔다. 긴장이 풀리는 것이었다. '알겠어요'가 순종으로 들린 것이었다.
갈비찜을 먹었다. 간이 맞았다. 연화가 만든 것이었다. 이 식탁 위의 모든 것이 연화가 만든 것이었다. 밥도, 반찬도, 이 대화의 방향도.
태욱이 와인을 한 잔 더 따랐다. 자기 잔에만. 연화의 잔은 물어보지 않았다. 사소한 것이었다. 10년간 이런 사소한 것들이 쌓였다. 와인을 따를 때 묻지 않는 것. 리모컨을 먼저 잡는 것. 에어컨 온도를 혼자 조절하는 것. 하나하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쌓이면 구조가 됐다. 이 집에서 결정권은 태욱에게 있었다. 연화는 그 결정에 맞추는 사람이었다.
식사가 끝났다. 태욱이 소파로 갔다. 텔레비전을 켰다. 뉴스. 앵커의 목소리가 거실을 채웠다.
"와인 더 마실래?"
태욱이 소파에서 물었다.
"됐어요."
"맛있었어. 고마워."
고마워. 태욱이 고맙다고 말했다. 진짜였을 수 있다. 갈비찜이 맛있었으니까. 하지만 이 고마움은 밥을 해준 아내에 대한 것이었다. 연화라는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누구든 맛있는 밥을 해주면 고맙다고 한다.
연화는 그릇을 정리했다. 접시를 씻었다. 냄비를 닦았다. 행주를 빨았다. 설거지 물소리가 뉴스 소리 위에 겹쳤다. 수도꼭지를 잠갔다. 싱크대 위의 물방울을 행주로 닦았다. 스테인리스가 빛을 반사했다. 이 주방에서 10년간 설거지를 했다. 매일 같은 동작. 매일 같은 자리.
화장실에 들어갔다. 문을 잠갔다. 녹음을 정지했다. 38분 27초. 네 번째 파일.
이어폰을 꽂았다. 되감았다. 핵심 구간을 찾았다.
'좋은 영향은 아닌 것 같은데.' 태욱의 목소리. 와인잔 돌리는 소리가 배경에 깔려 있었다.
'부부 사이에 뭘 숨겨.' 숟가락 내려놓는 소리. 그리고 2초의 정적.
'당신이 걱정돼서 그러는 거야.' 부드러운 톤. 합리적인 속도.
부드럽고 합리적이고 날이 서 있지 않은 문장들. 법정에서 재생하면 걱정하는 남편처럼 들릴 것이었다. 판사가 이걸 듣고 뭘 느낄지는 모른다. 한 건만 들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전 세 파일과 교차하면 패턴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었다. 1건에서는 일상. 3건에서는 반복. 5건에서는 구조. 같은 유형의 발언이 다른 날짜에 반복되는 것. 나수빈이 말한 핵심이었다.
연화는 이어폰을 뺐다. 귀가 아팠다. 태욱의 목소리를 이어폰으로 듣는 것은 식탁에서 듣는 것과 달랐다. 식탁에서는 남편의 목소리였다. 이어폰 안에서는 증거의 목소리였다. 같은 목소리가 장소에 따라 다르게 들렸다.
서지혁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4번째. 38분.'
답이 왔다.
'5건까지 1건.'
1건. 하나만 더.
다섯 번째 녹음이 확보되면 서지혁이 정식으로 수임할 수 있었다. 법무법인 정연의 파트너 변호사가 대한그룹 며느리의 이혼 소송을 맡는 것. 그 시작이 녹음 5건이었다.
핸드백에 녹음기를 넣었다. 거울을 봤다. 형광등 아래서 얼굴이 피곤해 보였다. 갈비찜을 만들고, 식탁에서 연기하고, 설거지를 하고, 화장실에서 녹음을 확인하는 하루. 이것이 연화의 수요일이었다.
침실에 들어갔다. 태욱은 아직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뉴스가 끝나고 예능으로 바뀐 소리가 들렸다. 웃음 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침대에 앉았다. 수첩을 꺼냈다.
녹음 4건.
태욱 발언 정리:
- 이세린 교류 제한 ('좋은 영향은 아닌 것 같은데')
- 독립 의지 축소 ('당신이 사업을 해?')
- 부부 프레임 통제 ('부부 사이에 뭘 숨겨')
- 걱정 포장 ('당신이 걱정돼서 그러는 거야')
수요일 외출 1회 방해 성공. 다음 주 반응 관찰 필요.
한 줄 더 적었다.
비트-K — 보류. 서지혁 확인 대기.
수첩을 닫았다. 욕실장 안쪽에 넣었다. 수첩이 점점 두꺼워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날짜와 시간만 적었다. 지금은 발언 유형과 분류까지 적고 있었다. 나수빈의 표가 연화의 수첩 안에도 들어와 있었다.
오늘 태욱의 수요일 외출을 막았다. 갈비찜으로. 태욱은 나가려던 계획을 바꿨다. 녹음 기회를 만든 것이기도 했지만, 패턴을 교란한 것이기도 했다. 다음 수요일에 태욱이 어떻게 반응하는지가 중요했다. 빠진 일정을 보충할 것인지. 다른 요일로 옮길 것인지. 아니면 수요일을 고수할 것인지. 어느 쪽이든 연화에게 정보가 된다. 교란의 가치는 반응에 있었다.
거실에서 텔레비전 소리가 들렸다. 예능 프로그램의 웃음 소리. 이 집의 밤은 텔레비전 소리로 채워져 있었다. 대화가 아니라 소음으로. 10년간 그랬다. 두 사람이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 대화하지 않는 저녁. 텔레비전이 두 사람 사이의 정적을 가려주고 있었다. 이 정적이 불편하지 않다고 느꼈던 시절이 있었다. 부부니까 말이 없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달랐다. 이 정적은 편안함이 아니라 부재였다.
침대에 누웠다. 눈을 감았다. 태욱의 목소리가 귓가에 남아 있었다. '당신이 걱정돼서 그러는 거야.' 녹음기 안에서 그 문장은 사랑이 아니라 증거였다.
같은 문장이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안에서는 사랑이고, 밖에서는 통제. 부드러운 칼은 자국을 남기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녹음기는 남겼다.
5번째 기회는 반드시 온다. 이 집에서 기회는 식탁 위에 있었다. 태욱이 밥을 먹고, 와인을 마시고, 마음이 풀리는 그 시간에. 갈비찜이 녹음기보다 먼저 무장을 해제시켰다.
내일 서지혁에게 비트-K를 확인한다. 오늘은 태욱의 네 번째 녹음으로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