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화. 침묵한 사람의 얼굴
하경의 진술서를 읽었다.
D-89. 화요일. 성수동 사무실.
오후 다섯 시. 사무실 형광등 아래서 노트북 화면을 열었다. A4 네 장. 하경의 손글씨를 스캔한 파일이었다. 볼펜으로 쓴 글씨가 일정했다. 여러 번 고쳐 쓴 흔적이 군데군데 있었다.
첫 문단. '저는 한하경, 한연화의 동생입니다.'
두 번째 문단. '명절에 언니는 부엌에서 나오지 못했습니다.'
세 번째 문단. '형부가 전화를 안 받으면 언니는 숨이 빨라졌습니다.'
네 번째 문단. '시어머니가 이야기하는 동안 언니는 웃으면서 울고 있었습니다.'
네 장을 다 읽었다. 10분이 걸렸다.
노트북 화면을 닫았다. 손등으로 눈 아래를 닦았다. 젖어 있었다. 울고 있었다는 것을 읽으면서야 알았다. 소리는 나지 않았다. 10년간 익힌 방법이었다. 한남동 침실에서 천장을 보며 눈물을 흘릴 때도 소리를 내지 않았다. 태욱이 깨면 안 됐으니까.
하경이 본 10년. 연화는 그 안에서 살았지만 밖에서 본 적이 없었다. 하경의 눈에 비친 연화는 부엌에서 나오지 못하고, 전화가 안 되면 다리를 떨고, 웃으면서 우는 사람이었다. 하경의 기억이 맞았다. 연화는 그때 웃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경은 울고 있다고 봤다.
3분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선풍기가 돌았다. 바람이 눈가를 스쳤다. 창밖에서 성수동 골목의 소음이 올라왔다. 숨을 고르고 수첩을 꺼냈다. 하경 진술서 — 읽음. 날짜 보강 필요. 서지혁 전달 예정.
적고 나서 펜을 놓았다. 오늘 할 일은 이것이었다. 이제 집에 돌아가면 됐다.
서지혁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진술서 읽었어요. 날짜 보강 필요해요.'
'내일 확인하겠습니다.'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창밖이 어두워져 있었다. 성수동 골목의 카페들이 하나둘 불을 켜기 시작했다. 네온사인 빛이 건물 벽에 반사되고 있었다.
사무실 불을 끄고 나왔다. 밤 아홉 시였다. 성수동 골목이 어두웠다. 가로등 불빛이 건물 벽에 반사되고 있었다. 카페들은 아직 불이 켜져 있었지만, 이 건물의 계단은 어두웠다.
계단을 내려가려는데 중간에 남자가 앉아 있었다.
양복이 구겨져 있었다. 넥타이가 풀려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왼손이 떨리고 있었다. 계단의 콘크리트 바닥 위에 서류 가방이 놓여 있었다.
연화는 멈췄다. 계단 위에서 아래를 봤다. 이 건물을 아는 사람은 서지혁과 하경뿐이었다. 이 남자는 둘 다 아니었다.
가로등 불빛이 건물 입구를 통해 계단 중간까지 들어오고 있었다. 남자의 구두가 빛을 받았다. 비싼 구두였지만 광이 나지 않았다. 옆면에 흙이 묻어 있었다. 관리되지 않은 구두.
핸드백 끈을 잡았다. 돌아갈지 내려갈지 판단했다. 2초.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40대 초반. 수척한 얼굴. 눈 아래 그림자가 깊었다. 면도를 하루 이상 하지 않은 턱이었다. 볼이 움푹 들어가 있었다.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한연화 씨?"
"누구시죠?"
연화는 계단 위에 서 있었다. 내려가지 않았다. 거리를 유지했다.
"박준석입니다."
"모르는 분인데요."
"대한그룹 재무팀에 있었습니다."
'있었습니다.' 과거형이었다.
"여기 주소를 어떻게 알았어요?"
"등기부를 봤습니다."
건물 등기부. 이 사무실의 임대차 계약은 연화 명의였다. 등기부에 임차인 이름은 나오지 않지만, 건물주 정보와 위치는 열람할 수 있었다. 연화가 최근 부동산 계약을 한 기록을 누군가 추적한 것이었다. 재무팀 출신이면 이런 조회에 익숙할 것이었다.
"왜 저한테 오셨어요?"
"당신이 뭘 하는지 알아요."
연화의 손이 핸드백 끈을 잡았다. 힘이 들어갔다.
"뭘 안다는 거예요?"
"올라가서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연화는 3초를 봤다. 남자의 왼손이 떨리고 있었다. 본인은 의식하지 못하는 듯했다. 낡은 서류 가방의 손잡이가 닳아 있었다. 오래 쥐고 다닌 가방이었다.
사무실로 올라갔다. 열쇠를 돌렸다. 문을 열었다. 형광등을 다시 켰다. 흰 불빛이 방을 채웠다. 아까까지 진술서를 읽던 공간이었다. 노트북이 닫혀 있었다. 커피잔이 테이블에 남아 있었다.
박준석이 의자에 앉았다. 주변을 둘러봤다. 작은 사무실이었다. 책상 하나, 의자 셋, 서랍장 하나. 사무실이라기보다는 작업실에 가까웠다.
연화는 서서 봤다. 앉지 않았다. 거리를 유지했다. 테이블 하나가 사이에 있었다.
"설명해주세요."
"제가 먼저 하나 드릴게요."
박준석이 양복 안주머니에서 접힌 종이를 꺼냈다. 메모지 한 장. 숫자와 영문이 빼곡했다.
"이게 뭔데요?"
"지갑 주소요."
"지갑이요?"
"가상자산."
연화는 종이를 받지 않았다. 테이블 위에 놓으라고 시선으로 가리켰다. 박준석이 종이를 내려놓았다.
"재무팀에서 뭘 하셨어요?"
"자금 집행이요."
박준석이 손으로 무릎을 눌렀다. 왼손의 떨림을 멈추려는 것이었다.
"비공식 라인."
비공식 라인. 공식 장부에 올라가지 않는 돈의 흐름을 다루는 자리. YK인터내셔널. 글로벌 리서치. 연화가 행사장에서 본 이름들이 떠올랐다. 이름을 바꿔가며 반복되는 금액. 이천만 원 전후. 항목은 매번 달랐다. 인쇄, 기념품, 시장 조사 대행. 그 돈을 집행한 사람이 이 남자일 수 있었다.
"언제까지 하셨어요?"
"작년까지요."
"그만두셨어요?"
"밀려났어요."
"지금은요?"
"방치당하고 있습니다."
"방치요?"
"한직으로 옮겨졌어요."
박준석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건조했다.
"아무 업무도 없어요."
왼손이 다시 떨렸다. 무릎 위에서 잡지 못하는 떨림이었다.
"뭘 원하시는 거예요?"
"돈은 안 원해요."
"그러면?"
박준석이 연화를 봤다. 충혈된 눈이었다.
"당신이 유일하게 잃을 게 없는 사람이니까."
잃을 게 없는 사람. 연화는 그 말의 의미를 해석했다. 재벌가 타이틀 뒤에 실제로 가진 것이 없는 사람. 통장에 50만 원. 명의 재산 없음. 가족카드만 있는 사람. 그래서 싸울 수 있는 사람.
박준석은 연화의 상황을 조사한 것이었다. 재무팀 출신답게. 연화의 자산 상태를 알고 있었다.
"비트-K."
박준석이 말했다. 두 단어. 연화는 그 이름을 처음 들었다.
"가상자산이에요."
박준석이 테이블 위의 종이를 가리켰다.
"전략기획본부에서 이걸로 돈을 돌렸어요."
"얼마나요?"
"이 주소에서 나간 돈이 5억이에요."
"3년 전이요?"
"네."
연화는 종이를 봤다. 숫자열이 빼곡했다. 영문과 숫자가 섞여 있었다. 가상자산 지갑 주소. 연화는 가상자산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5억이라는 숫자는 이해했다.
YK인터내셔널과 글로벌 리서치의 이천만 원 단위 발주와는 차원이 달랐다. 이천만 원은 행사 외주의 크기였다. 5억은 다른 종류의 돈이었다. 가상자산. 전략기획본부. 행사장의 12번 테이블에 앉았다 사라지던 여자. 냅킨을 펼치지 않았던 여자. 그 자리와 이 숫자가 연결되어 있을 수 있었다.
"어디로 갔는지 아세요?"
"어렴풋이요."
"어렴풋이면 증거가 안 돼요."
박준석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웃음이 아니라 자조였다.
"왜 직접 신고 안 하셨어요?"
박준석이 서류 가방의 손잡이를 잡았다. 쥐었다 놓았다.
"다들 정의는 좋아하지."
"네."
"자기 계좌 안 다치면."
박준석이 일어섰다. 의자가 뒤로 밀렸다.
"저도 공범이에요."
연화는 그 단어를 받았다. 공범.
"공범이요?"
"집행에 관여했으니까."
"그런데 왜 저한테 와요?"
"내부에서는 못 해요."
박준석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안에서 말하면 끝나는 건 저예요."
박준석이 서류 가방을 들었다. 문 쪽으로 걸어갔다. 문 앞에서 멈췄다.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돈은 숫자로 숨지 않아요."
"네."
"사람 뒤에 숨지."
나갔다.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가 느렸다. 지친 사람의 걸음이었다. 한 계단씩 무게를 실은 발걸음이 콘크리트 위에서 울렸다. 소리가 멀어졌다. 건물 문이 닫혔다.
2분을 기다렸다. 창가로 갔다. 커튼을 밀었다. 아래를 봤다. 박준석이 골목을 걸어가고 있었다. 등이 굽어 있었다. 서류 가방이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를 지나 골목 끝에서 꺾었다. 사라졌다.
연화는 창에서 물러났다. 방금 일어난 일을 정리했다. 낯선 남자가 사무실을 찾아왔다. 대한그룹 전 재무팀. 비공식 자금 집행. 비트-K라는 이름. 5억이라는 금액. 그리고 공범이라는 자인. 이 사람이 진짜인지 거짓인지는 아직 모른다. 진짜라면 결정적 카드. 거짓이라면 시험.
테이블로 돌아왔다. 종이를 집었다. 숫자열. 영문. 날짜 하나. 3년 전. 금액 5억.
수첩을 꺼냈다.
비트-K. 가상자산. 전략기획본부 자금 집행.
박준석 — 전 재무팀. 한직 전환. 공범 자인.
지갑 주소 1개. 5억. 3년 전.
경위: 건물 등기부 열람으로 사무실 위치 파악. 재무팀 출신 조회 능력.
한 줄 더 적었다.
이 사람을 믿으면 안 된다. 하지만 이 사람이 가진 것은 필요하다.
종이를 수첩 사이에 끼웠다. 서지혁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박준석이라는 사람이 찾아왔어요.'
'누구입니까.'
'대한그룹 전 재무팀. 비트-K.'
답이 2분 뒤에 왔다. 평소보다 오래 걸렸다.
'만나지 마십시오.'
'이미 만났어요.'
'제가 먼저 확인합니다.'
'종이 하나 놓고 갔어요.'
'보관만 하세요. 열지 마세요.'
열지 마라. 종이를 열지 말라는 것인지, 내용을 추적하지 말라는 것인지. 정보보다 경고가 앞선 것은 처음이었다. 서지혁은 늘 '좋습니다'나 '확인하겠습니다'로 대답했다. '만나지 마십시오'는 달랐다. 이 이름이 서지혁에게 무언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비트-K라는 이름이, 혹은 박준석이라는 이름이.
사무실 불을 껐다. 밖으로 나왔다. 성수동 골목이 어두웠다. 박준석이 앉아 있던 계단 중간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택시를 잡았다. 한남동.
뒷좌석에 앉았다. 성수동을 빠져나오는 길이 어두웠다. 건물 사이로 카페 불빛만 새어 나왔다.
박준석의 손 떨림을 떠올렸다. 왼손. 무릎 위에서 잡지 못하는 떨림. 알면서 침묵한 대가가 몸에 남아 있는 사람이었다. 돈의 흐름을 알면서 침묵하고, 침묵의 대가로 한직에 밀려나고, 밀려난 자리에서 떨림이 시작된 사람.
전 타임라인에서 연화는 빈손으로 졌다. 모르기 때문에 준비하지 못했고,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졌다. 박준석은 알면서 침묵해서 무너졌다. 방법이 달랐지만 결과는 비슷했다. 모르기에 잃은 쪽과 알면서 잃은 쪽.
박준석은 연화가 될 수도 있었던 미래의 어두운 버전이었다. 알면서도 가만히 있으면 저렇게 된다. 왼손이 떨리고, 등이 굽고, 밤 아홉 시에 남의 건물 계단에 앉아 있게 된다. 연화도 전 타임라인에서는 알지 못해서 가만히 있었다. 결과는 같았다. 빈손으로, 아무것도 없이, 끝났다. 이번에는 알고 있으면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 차이가 결과를 바꿀 수 있는지는 아직 모른다.
한남대교를 건넜다. 다리 위 가로등이 줄지어 있었다. 한강 위에 불빛이 흩어져 있었다. 다리 위의 차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집에 도착했다. 현관을 열었다. 거실이 어두웠다. 에어컨이 꺼져 있어서 공기가 무거웠다. 태욱은 서재에 있었다. 문틈 아래로 불빛이 새어 나왔다. 키보드 치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렸다.
주방에서 물을 한 잔 마셨다. 차가운 물이 목을 타고 내려갔다. 냉장고 문에 붙어 있는 메모가 눈에 들어왔다. 태욱의 글씨. 내일 골프 예약 확인. 이 남자는 내일 골프를 치고, 연화는 내일 비트-K에 대해 서지혁과 이야기할 것이다. 같은 집에서 다른 내일을 준비하고 있었다.
침실에 들어갔다. 문을 닫았다. 핸드백에서 수첩을 꺼내 욕실장 안쪽에 넣었다. 박준석의 종이가 수첩 사이에 끼워져 있었다.
눈을 감았다.
비트-K. 이 이름이 수첩에 적힌 순간, 이혼 소송의 판이 비자금 추적으로 넓어졌다. 이천만 원 단위의 행사 발주가 아니라 5억 단위의 가상자산. 연화가 그리던 지도의 축척이 바뀐 것이었다.
서지혁이 '만나지 마십시오'라고 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박준석이라는 이름을 서지혁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인지. 비트-K가 서지혁에게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일 확인한다. 오늘은 여기까지. 눈을 감았다. 어둠 속에서 박준석의 떨리는 왼손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