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화. 파이프는 두 개였다
일요일 오후. 한남동.
D-91.
하경의 진술서가 이메일에 도착한 것은 어제 밤이었다. A4 네 장. 아직 열지 않았다. 열면 10년을 타인의 눈으로 다시 살아야 했다. 그건 내일의 일이었다.
오늘은 다른 일이 있었다.
태욱은 서재에 있었다. 문이 닫혀 있었다. 서재 안에서 키보드 치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렸다. 일요일에도 일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연화는 거실 소파에 앉았다. 소파 쿠션이 등을 감쌌다. 창밖으로 한남동의 오후가 펼쳐져 있었다. 아파트 단지 사이로 햇살이 비스듬히 내려왔다. 거실의 시계가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에어컨 바람이 목 뒤를 스쳤다.
커피를 한 잔 내렸다. 주방에서 드리퍼를 올리고, 물을 부었다. 커피 향이 거실까지 번졌다. 서재에서 키보드 소리가 잠깐 멈췄다가 다시 시작됐다. 태욱이 커피 냄새를 맡은 것인지는 모른다.
소파로 돌아왔다. 잔을 테이블에 놓았다. 핸드폰을 들었다.
세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두 번째 가짜 정보.
전화가 두 번째 벨에 연결됐다. 세나는 전화를 빨리 받는 사람이었다. 늘 그랬다. 대학 때부터.
"연화야, 무슨 일이야?"
"세나야, 금요일 저녁에 약속 잡았어."
"어디?"
"성수동. 사람 만나기로 했어."
"또 이세린 선배?"
"아니."
연화는 잠깐 멈췄다. 자연스러워야 했다. 정보를 흘리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나누는 것처럼.
"하경이 친구 중에 컨설턴트가 있대."
"프리랜서?"
"응. 뭐 하는 사람인지 알아보려고."
"좋다."
세나의 목소리에 관심이 실렸다.
"연화가 뭐라도 시작하려는 거야?"
"아직 알아보는 단계야."
"응원할게."
세나의 응원은 늘 진짜처럼 들렸다. 온도가 적절하고, 리듬이 자연스럽고, 감정이 과하지 않았다. 10년간 그 목소리를 친구의 것으로 들었다. 지금은 그 자연스러움이 의심의 근거였다. 너무 자연스러운 것은 연습된 것일 수 있다.
전화를 끊었다. 시계를 봤다. 오후 2시 14분.
커피를 마셨다. 아직 뜨거웠다. 혀끝이 데었다.
세나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응원할게.' 세나의 응원에는 늘 구체성이 없었다. 뭘 응원하는지, 어떻게 도울 수 있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응원할게'는 닫는 말이었다. 더 이상 이 주제로 이야기하지 않겠다는 신호. 10년 전에는 몰랐다. 지금은 보였다.
수첩에 적었다. 투입 시각: 일요일 14:14.
두 번째 가짜 정보. 날짜(금요일)와 장소(성수동)가 있는 거짓. 사람(하경이 친구 컨설턴트)은 존재하지 않았다. 세나에게만 말했다.
첫 번째 가짜 정보는 이세린 만남이 아니라 그 전에 투입한 것이었다. 세나에게 특정 날짜와 장소를 말하고, 태욱에게 도달하는 시간을 측정했다. 24시간 25분. 세나→비서실→태욱 경로.
이번에는 경로가 하나인지 둘인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월요일. 반응 없음.
태욱은 평소와 같았다.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돌아오고, 소파에서 뉴스를 보고, 침실로 갔다. 연화에게 금요일을 묻지 않았다. 세나의 정보가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이거나, 도착했지만 행동으로 옮기지 않은 것이었다.
연화는 저녁에 설거지를 하면서 태욱의 등을 봤다.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는 등. 넓은 등이었다. 이 등 뒤에서 일어나는 일을 태욱은 모르고 있었다. 설거지하는 아내의 손이 수첩을 쓰는 손이라는 것을.
화요일 아침. 식탁.
태욱이 아이패드를 보다가 시선을 들었다.
"이번 주 금요일에 뭐 있어?"
연화는 토스트를 들고 있었다. 손이 멈추지 않았다. 멈추면 안 됐다. 한 입 베어 물었다. 씹었다. 삼켰다. 그리고 대답했다.
"왜요?"
"그냥 물어본 거야."
그냥은 그냥이 아니었다. 태욱이 금요일을 알고 있었다. 세나에게만 말한 정보.
투입에서 태욱 도달까지 약 44시간. 첫 번째 가짜 정보는 24시간 25분이었다. 20시간 더 걸렸다. 경유지가 하나 더 있다는 뜻이었다. 세나가 바로 비서실에 전달한 것이 아니라, 어딘가를 한 번 더 거친 것이었다.
"성수동 쪽에서 사람 만나기로 했어요."
"누구?"
"하경이 소개해준 사람이요."
"뭐 하는 사람인데?"
"컨설턴트래요."
태욱의 눈이 좁아지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관심이 있는 것인지, 정보를 수집하는 것인지. 표정으로는 알 수 없었다.
"그래."
태욱이 아이패드로 시선을 돌렸다. 2초 뒤 다시 올렸다.
"혼자 가?"
"네."
"하경이 같이 안 가?"
"하경이가 소개해준 사람이에요."
태욱이 고개를 끄덕였다. 더 묻지 않았다. 하지만 '혼자 가?'라는 질문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었다. 혼자 가는 것이 걱정되는 것인지, 누구와 가는지를 확인하는 것인지. 태욱의 얼굴에서는 알 수 없었다.
연화는 커피를 마셨다. 미지근했다. 속으로 시간을 계산했다. 일요일 오후 2시 14분에 세나에게 투입. 화요일 아침 8시경에 태욱이 금요일을 물었다. 약 44시간.
그런데 예상 밖의 일이 화요일 오후에 일어났다.
정명희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후 3시. 연화는 성수동 사무실에 있었다. 하경의 진술서 파일을 열려고 노트북을 켰을 때였다. 선풍기가 돌고 있었고, 창밖에서 성수동 골목의 오후가 들려오고 있었다.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하경의 진술서를 읽으려고 노트북을 열었을 때였다. 핸드폰이 울렸다. 화면에 '어머님'이라는 글자가 떴다.
"연화야, 금요일에 바쁘다며?"
손이 핸드폰을 잡은 채 멈췄다. 정명희가 금요일을 알고 있었다. 세나에게만 말한 정보.
"재단 서류 좀 봐줘야 하는데."
정명희의 목소리가 평온했다.
"금요일 오후에 올 수 있어?"
연화는 창밖을 봤다. 성수동 골목에 사람들이 걸어가고 있었다. 카페에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평화로운 오후였다. 그 안에서 연화의 머릿속은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연화의 금요일 저녁을 막으려는 것이었다. 직접 금지하지 않고, 앞에 장애물을 놓는 방식. '서류 봐달라'는 부탁이었고, '금요일 오후'는 시간을 점유하는 것이었다. 오후를 재단에서 보내면 저녁 약속은 물리적으로 어려워진다. 정명희는 '가지 마'라고 말하지 않았다. '일이 있어'라고 말했다. 금지가 아니라 점유. 정명희의 방식이었다.
"오후에 잠깐 들르겠습니다."
"그래. 고마워."
고맙다는 말이 자연스러웠다. 이 여자는 며느리의 시간을 빼앗으면서 감사를 표한다. 그 감사가 진짜라는 것이 더 무서운 부분이었다. 정명희는 자기가 하는 일이 통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가족을 관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전화가 끊겼다. 핸드폰을 테이블에 놓았다. 손가락 끝이 차가웠다. 성수동 사무실의 창문 너머로 바람이 들어왔다. 서류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서지혁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파이프가 두 개였어요.'
'태욱 씨와?'
'정명희까지. 독립 경로.'
1분 뒤.
'3차 확인은 필수입니다.'
'계획 있어요.'
'좋습니다.'
서지혁은 늘 짧았다. '좋습니다'라는 두 글자에 승인과 신뢰가 들어 있었다.
정리했다.
첫 번째 가짜 정보: 세나 → 비서실 → 태욱. 24시간 25분.
두 번째 가짜 정보: 세나 → 태욱(44시간) + 세나 → 정명희(47시간).
파이프라인이 하나가 아니었다. 세나는 태욱에게도 보고하고, 정명희에게도 직접 넘기고 있었다. 한 사람이 두 개의 파이프를 운영하고 있었다.
수첩을 꺼냈다. 펜을 들었다.
2차 가짜 정보: 금요일 저녁 성수동.
태욱 도달: 화요일 아침 (약 44시간).
정명희 도달: 화요일 오후 (약 47시간).
경로: 세나 → 태욱 + 세나 → 정명희. 독립 경로. 이중 보고.
한 줄 더 적었다.
세나에게 줄 정보를 두 종류로 나눈다. 태욱용과 정명희용.
펜을 놓았다. 수첩을 봤다. 글씨가 흐트러지지 않았다.
10년 전 대학 졸업 후 호프집에서 '평생 친구하자'고 했던 사람이 두 개의 파이프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 호프집의 테이블은 끈적거렸고, 맥주는 미지근했고, 치킨 기름이 손가락에 묻어 있었다. 세나는 연화의 손을 잡고 '넌 무조건 잘 될 거야'라고 말했다. 연화가 결혼하고 대한그룹에 들어간 뒤, 세나는 연화의 가장 가까운 친구가 됐다. 명절에 선물을 보내고, 생일에 전화를 하고, 힘들 때 만나서 와인을 마셨다. 그 모든 것이 보고의 재료가 되고 있었다는 것을 연화는 이제 수치로 알고 있었다. 24시간 25분. 44시간. 47시간. 우정의 시간이 아니라 전달의 시간.
연화가 열어준 문으로 들어간 세나는, 그 안에서 연화를 감시하는 자리를 찾았다. 대한그룹 며느리의 가장 가까운 친구. 그것이 세나의 직함이자 역할이었다.
화가 나야 했다. 배신이었으니까. 하지만 화보다 먼저 온 것은 계산이었다. 세나를 통해 태욱과 정명희에게 각각 다른 메시지를 보낼 수 있었다. 누수를 막는 것이 아니라 방향을 쓰는 것. 세나를 끊으면 정보 경로가 사라진다. 세나를 유지하면 정보 경로를 통제할 수 있다.
전 타임라인에서 연화는 세나를 믿었다. 끝까지 믿었다. 이혼 소송 과정에서 세나가 한 증언이 무엇이었는지, 연화는 회귀 후에야 알았다. '연화는 감정 기복이 심했고, 남편에게 의존적이었다.' 세나의 증언이었다. 가장 가까운 친구의 입에서 나온 문장. 그 문장이 판결에 영향을 줬다.
이번에는 다르다. 믿지 않으면서 곁에 두는 것. 대화하면서 계산하는 것. 웃으면서 시간을 재는 것. 그것이 더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연화는 할 수 있었다. 10년간 이 가족 안에서 연습한 것이었으니까. 웃으면서 참는 것. 그 기술이 지금 무기가 되고 있었다.
밤. 한남동.
거실의 텔레비전이 꺼져 있었다. 태욱은 서재에서 나와 침실로 바로 갔다. 평소와 다른 동선이었다. 무언가를 확인하고 온 것인지, 피곤한 것인지. 넥타이를 풀면서 침실에 들어왔다.
"금요일에 재단 가야 된대?"
"네. 어머니가 서류 봐달라고 하셔서요."
"저녁 약속은?"
"일찍 끝나면 갈 수 있을 거예요."
태욱이 더 말하지 않았다. 옷을 갈아입고 욕실로 갔다. 양치하는 소리가 들렸다. 물 뱉는 소리. 수건으로 얼굴 닦는 소리.
침대에 누웠다. 호흡이 가라앉았다.
연화는 눈을 떴다. 천장을 봤다. 세나의 '응원할게'가 두 개의 보고서로 변환되는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봤다. 응원이 감시가 되고, 친구가 파이프가 되고, 대화가 보고가 되는 구조.
친구의 응원이 보고서가 되는 구조. 세 번째 미끼를 던지면 패턴이 완성된다. 두 번이면 우연일 수 있다. 세 번이면 구조다.
하경에게 전화가 왔다. 밤 10시.
"언니, 진술서 이메일로 보냈어."
"어제 봤어. 고마워."
"읽었어?"
"아직."
하경이 잠깐 말이 없었다.
"틀린 데 있으면 말해."
"알아."
"사실만 썼어."
"알아."
하경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주말에 밥 먹자. 약속이야."
"약속이야."
전화를 끊었다. 하경의 '사실만 썼어'라는 말이 귀에 남아 있었다. 세나의 '응원할게'와 하경의 '사실만 썼어'. 두 문장의 온도가 달랐다. 세나의 문장은 닫는 말이었고, 하경의 문장은 여는 말이었다.
이메일을 열었다. 첨부 파일. 한하경 진술서 초안. A4 네 장. 파일을 다운로드했다. 아직 열지 않았다. 화면에 파일 아이콘만 놓여 있었다. 하경의 이름이 파일명에 적혀 있었다.
오늘은 세나의 구조를 확인한 날이었다. 내일은 하경의 눈으로 본 10년을 읽는 날이 된다.
수첩을 꺼냈다. 마지막 줄을 적었다.
3차 미끼 계획: 세나에게 태욱용 정보와 정명희용 정보를 각각 다른 날짜에 투입. 도달 경로 분리 확인.
수첩을 닫았다. 욕실장 안쪽에 넣었다. 거울을 봤다. 형광등 아래서 얼굴이 피곤해 보였다.
불을 끄고 침실로 돌아왔다. 어둠 속에서 태욱의 호흡이 규칙적으로 들렸다. 에어컨 바람이 이불 위를 스쳤다.
이 침대에 누워 있는 두 사람은 각자의 비밀을 갖고 있었다. 태욱은 수요일 저녁의 비밀. 연화는 성수동 사무실의 비밀. 그리고 세나라는 공통의 파이프가 두 사람을 연결하고 있었다. 세나는 연화의 친구이면서 태욱의 눈이고 정명희의 귀였다.
차이는 하나. 연화는 태욱의 비밀을 추적하고 있었고, 태욱은 연화의 비밀을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연화는 세나의 정체를 알고 있었고, 세나는 연화가 그것을 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내일. 하경의 진술서를 연다. 10년이 네 장에 적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