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화. 냉소는 관심의 다른 얼굴이다
성수동 사무실 문을 열었을 때, 두 사람이 이미 앉아 있었다.
D-93.
형광등이 켜져 있었다. 누군가 먼저 와서 불을 켠 것이었다. 서지혁이 왼쪽, 나수빈이 오른쪽. 서지혁은 서류를 펼치고 있었고, 나수빈의 노트북이 열려 있었다. 화면에 표가 떠 있었다. 행과 열이 빽빽했다.
나수빈이 여기 온 것은 처음이었다. 성수동 사무실의 주소를 서지혁이 알려준 것인지, 나수빈이 직접 물은 것인지는 모른다. 어느 쪽이든 나수빈이 이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사무실 안의 공기가 달랐다. 이전에는 연화 혼자이거나 서지혁과 둘이었다. 세 명이 앉으니 공간이 좁아졌다. 나수빈의 노트북 팬이 낮게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에어컨이 없는 사무실이었다. 선풍기 하나가 구석에서 돌고 있었다. 바람이 테이블 위 서류를 미세하게 흔들었다.
창밖으로 성수동 골목이 보였다. 오후 햇살이 건물 벽에 비스듬히 걸려 있었다. 카페에서 나오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올라왔다. 이 건물 2층에서 이혼 소송의 증거를 검토하고 있다는 것을 아래의 사람들은 모른다. 성수동은 연화에게 비밀의 주소가 되어 있었다.
테이블 위에 커피 세 잔이 놓여 있었다. 나수빈이 가져온 것이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얼음이 반쯤 녹아 있었다. 나수빈이 한참 전에 도착했다는 뜻이었다.
"오셨습니까."
서지혁이 말했다.
나수빈은 고개만 들었다. 연화를 봤다. 4화에서 '사모님들이 제일 자주 망치는 건'이라고 했던 눈이 아니었다. 냉소가 빠져 있었다. 대신 집중이 있었다.
연화가 맞은편에 앉았다. 의자가 차가웠다. 플라스틱 표면이 맨살에 닿았다. 플라스틱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서지혁이 이어폰을 건넸다.
"세 건을 먼저 검토합니다."
이어폰을 꽂았다. 서지혁이 재생 버튼을 눌렀다.
첫 번째. 태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물어보면 안 돼? 부부잖아.' 식탁에서의 대화였다. 연화가 지출 내역을 물었을 때. 태욱의 목소리는 녹음 안에서도 부드러웠다.
두 번째. '아까 바빴잖아. 설거지하느라.' 연화가 외출하려 할 때 태욱이 한 말이었다. 일정을 막는 문장이 아니라 일정의 시기를 조정하는 문장이었다.
세 번째. 정명희의 목소리. '결국 혼자가 됐잖아.' 스태프룸에서. 립스틱을 고치면서. 거울을 보면서.
세 건을 다 들었다. 이어폰을 뺐다. 귓속에 세 사람의 목소리가 남아 있었다.
태욱의 '부부잖아'가 가장 오래 남았다. 녹음할 때는 몰랐다. 재생해서 들으니 달랐다. 부드러운 목소리 안에 '네가 물을 권리가 없다'가 들어 있었다. 결혼 안에서 이 문장을 들으면 당연하다. 밖에서 들으면 이상하다. 녹음기가 그 안과 밖의 경계를 만들어주고 있었다.
나수빈이 노트북 화면을 돌렸다. 표가 보였다. 날짜, 발언 내용, 유형 분류. 색깔로 구분되어 있었다. 나수빈이 직접 만든 것이었다.
연화는 그 표를 봤다. 자기 결혼 생활이 칸과 유형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태욱의 말이 '유형 1: 지출 확인'이 되어 있었다. '유형 2: 일정 사전 승인'. 정명희의 말이 '유형 3: 교우 관계 제한'. 감정이 데이터가 되어 있었다.
"태욱 씨 발언은 두 유형."
나수빈이 말했다. 빠른 말투였다.
"지출 확인, 일정 승인."
"정명희 여사는요?"
서지혁이 물었다.
"교우 관계 제한."
나수빈이 화면을 가리켰다.
"셋이 동시에 작동하면요."
"구조적 통제 패턴이 됩니다."
서지혁이 받았다.
나수빈이 연화를 봤다.
"단독으로는 약해요."
"어떤 게요?"
"태욱 씨의 '부부잖아'요."
나수빈이 화면을 스크롤했다.
"일상 대화로 읽혀요."
"교차하면 다릅니다."
서지혁이 말했다. 펜을 들어 서류 위에 선을 그었다. 태욱의 발언과 정명희의 발언 사이에.
"남편이 지출과 일정을 통제하고."
선이 하나 더 그어졌다.
"시어머니가 교우를 제한하면."
서지혁이 펜을 놓았다.
"가족 시스템 안의 통제입니다."
가족 시스템. 개인이 아니라 구조. 서지혁은 태욱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한 가족의 시스템을 보고 있었다. 태욱이 지출을 확인하고, 정명희가 교우를 제한하고, 세나가 정보를 전달하는 것. 각자가 따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과적으로 연화의 자율성이 줄어드는 방향으로 수렴한다. 시스템이라는 단어가 적확했다.
연화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차가웠다. 얼음이 아직 남아 있었다.
나수빈이 다시 연화를 봤다.
"녹음 두 건 더 필요해요."
"같은 유형이요?"
"같은 유형, 다른 날짜."
나수빈이 노트북을 기울여 연화에게 더 가까이 보여줬다.
"반복이 핵심이에요."
연화는 화면을 봤다. 표의 빈칸이 두 개 남아 있었다. 4건째와 5건째. 나수빈은 이미 칸을 만들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빈칸의 색깔이 회색이었다. 채워지면 다른 색으로 바뀔 것이었다.
나수빈의 표는 깔끔했다. 폰트가 작고, 정렬이 정확하고, 불필요한 색이 없었다. 연화의 수첩과 닮아 있었다. 정보를 감정 없이 정리하는 방식. 나수빈이 연화를 이해하기 시작한 것인지, 원래 같은 방식의 사람인 것인지.
'사모님'이라는 호칭이 빠져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 나수빈은 연화를 '사모님'이라고 불렀다. 거리를 두는 호칭이었다. 오늘은 호칭 없이 말했다. 사모님도 아니고 연화 씨도 아니었다. 그냥 대화했다. 그 변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연화는 알았다.
"알겠어요."
"YK인터내셔널 건은요?"
나수빈이 서지혁에게 물었다.
"등기부를 열람했습니다."
서지혁이 봉투를 꺼냈다.
"다음 미팅에서 봅니다."
봉투를 다시 넣었다. 오늘은 녹음 검토까지. YK 건은 다음. 서지혁은 의제를 섞지 않았다. 한 번에 한 가지. 그것이 서지혁의 방식이었다.
미팅이 끝났다. 나수빈이 노트북을 닫았다. 닫으면서 연화를 봤다.
"한 가지 여쭤도 되죠."
"네."
"녹음하실 때, 떨려요?"
연화는 나수빈을 봤다. 나수빈의 눈에 호기심이 있었다. 직업적 호기심이 아니었다. 사람에 대한 것이었다.
"처음엔 떨렸어요."
"지금은요?"
"안 떨려요."
나수빈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웃음이 아니었다.
"그게 더 무서운 거예요."
안 떨리는 것이 더 무섭다. 연화도 알고 있었다. 녹음 버튼을 누르는 손이 익숙해졌다는 것. 남편과 시어머니의 말을 증거로 분류하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는 것. 10년간 가족이었던 사람들을 수집 대상으로 보는 것. 그 변화가 연화를 바꾸고 있었다.
나수빈이 가방을 들었다. 구두 소리가 빠르게 콘크리트 계단을 내려갔다. 문이 닫혔다.
서지혁이 연화를 봤다. 나수빈이 나간 문을 잠깐 보고, 다시 연화에게.
"나수빈이 파일을 먼저 달라고 했습니다."
"파일이요?"
"녹음 원본."
"왜요?"
"제가 시킨 게 아닙니다."
서지혁의 목소리가 담백했다. 사실을 전하는 톤이었다. 나수빈이 자발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서지혁이 지시한 업무 범위 밖에서. 나수빈은 연화의 녹음을 듣고, 표를 만들고, 유형을 분류했다.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
연화는 문밖을 봤다.
"나수빈 변호사가 왜 이래요?"
"본인의 일로 받아들인 겁니다."
서지혁이 서류를 가방에 넣었다.
"좋은 신호입니다."
서지혁이 일어섰다.
"수요일 5주차 기록 후에 연락 주세요."
"네."
서지혁이 나갔다. 문이 닫혔다. 사무실이 다시 조용해졌다. 선풍기만 돌고 있었다. 노트북 팬 소리가 사라지니 방이 넓어진 느낌이었다.
나수빈의 마지막 말이 남아 있었다. '그게 더 무서운 거예요.' 안 떨리는 것이 더 무섭다. 나수빈은 이런 사건을 여러 번 봤을 것이다. 떨리던 사람이 안 떨리게 되는 과정을. 그 과정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도.
핸드폰을 들었다. 하경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진술서 쓰고 있어?'
1분 뒤 답이 왔다.
'응. 내일 보내줄게.'
'고마워.'
'근데 언니.'
'왜?'
'쓰면서 울었어.'
연화는 화면을 봤다. 하경이 울었다. 연화의 결혼 생활을 적으면서. 명절에 부엌에서 나오지 못한 언니. 전화가 안 되면 다리를 떤 언니. 웃으면서 울고 있던 언니. 하경의 눈에 비친 10년을 글자로 옮기면서 하경이 울었다.
연화가 울지 못한 것을 하경이 대신 울고 있었다.
목 안쪽이 뜨거워졌다. 눈을 깜빡였다. 성수동 사무실의 형광등이 시야를 밝혔다. 여기서 울면 안 됐다. 아니, 여기서는 울어도 됐다. 이 사무실은 연화의 공간이었다. 하지만 울지 않았다. 대신 답장을 썼다.
'미안.'
'사과하지 마. 쓸게.'
하경의 문장은 짧았다. 감정이 들어 있었다. 사과하지 말라는 말. 연화가 미안해할 이유가 없다는 말. 네가 당한 것을 네가 사과하지 말라는 말.
화면을 껐다. 핸드폰을 테이블에 놓았다. 손등으로 눈 아래를 닦았다. 젖어 있지 않았다. 울지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울 뻔한 것이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얼음이 다 녹아 물이 된 아메리카노였다. 미지근했다. 나수빈이 가져온 커피. 나수빈은 세 잔을 사왔다. 자기 것, 서지혁 것, 연화 것. 작은 것이었다. 하지만 작은 것이 쌓여서 팀이 되는 것이었다.
창밖을 봤다. 성수동 골목에 그림자가 길어지고 있었다. 건물 사이로 저녁빛이 빗겨 들어왔다. 선풍기 바람이 땀을 말리고 있었다.
나수빈은 냉소로 시작해서 분석으로 들어왔다. 표를 만들고, 유형을 분류하고, 반복의 중요성을 짚었다. 하경은 눈물로 시작해서 결심으로 들어왔다. 진술서를 쓰면서 울었지만, '쓸게'라고 말했다. 방법이 달랐지만 같은 쪽에 서고 있었다.
팀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연화가 계획한 것이 아니었다. 서지혁은 법률. 나수빈은 분석. 하경은 기억. 이세린은 경험. 각자의 역할이 자연스럽게 생기고 있었다. 전 타임라인에서 연화는 혼자 싸웠다. 불법 앱을 설치하고, 혼자 증거를 모으고, 혼자 졌다. 이번에는 달랐다. 사람이 모이고 있었다. 연화가 부른 것이 아니라 각자의 이유로 온 사람들이었다.
서랍에서 USB를 확인했다. 행사 실무 파일 4건. 수첩. 녹음 파일 목록. 이 사무실의 서랍이 채워지고 있었다.
사무실 불을 껐다. 계단을 내려갔다. 택시를 잡았다. 한남동.
차 안에서 나수빈의 표를 떠올렸다. 유형 1, 유형 2, 유형 3. 빈칸 두 개. 채워야 할 녹음이 두 건. 다음 기회를 만들어야 했다.
집에 도착했다. 현관을 열었다. 태욱의 구두가 놓여 있었다. 가지런하지 않았다. 한 쪽이 뒤집혀 있었다. 급하게 벗은 것이었다.
거실로 들어갔다. 태욱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 텔레비전이 켜져 있었다. 뉴스였다. 맥주캔이 테이블 위에 하나 놓여 있었다. 반쯤 비어 있었다.
"늦었네."
"하경이 만났어요."
"요즘 자주 보네."
나수빈의 표가 떠올랐다. 유형 2. 일정 확인. 연화의 외출 빈도를 체크하는 문장.
"동생인데요."
"그래."
태욱이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리모컨을 들었다. 채널을 돌렸다.
"밥은 먹었어?"
"네."
거짓말이었다. 먹지 않았다. 하지만 태욱이 밥을 물은 것은 걱정이 아니라 확인이었다. 밥을 먹었으면 추가 외출의 이유가 없다는 확인.
"나도 먹었어."
대화가 끝났다. '요즘 자주 보네'는 질문이 아니었다. 확인이었다. 연화의 외출 빈도를 체크하는 것이었다. 이전에는 몰랐다. 지금은 나수빈의 표 위에서 그 문장이 칸에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침실로 들어갔다. 문을 닫았다. 수첩을 꺼냈다.
녹음 3건 검토 완료. 추가 2건 필요. 같은 유형, 다른 날짜.
진술서 — 하경 초안 내일 도착.
YK 등기부 — 다음 미팅에서 확인.
나수빈 — 자발적 관여 시작. 유형 분류표 자체 제작.
태욱: '요즘 자주 보네.' — 유형 2. 일정 확인.
수첩을 닫았다. 침대에 앉았다. 거실에서 텔레비전 소리가 벽을 타고 들려왔다. 뉴스 앵커의 목소리. 태욱은 매일 이 시간에 뉴스를 본다. 연화는 매일 이 시간에 수첩을 쓴다. 같은 집, 다른 시간.
냉소가 관심의 다른 얼굴이라는 것을, 연화는 오늘 알았다. 나수빈의 첫인상은 차가웠다. '사모님들이 제일 자주 망치는 건'이라는 말은 냉소였다. 하지만 오늘 나수빈은 표를 만들어 왔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차가운 사람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그 움직임은 뜨거운 사람보다 정확하다. 나수빈의 표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