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빈 시간은 채워진 시간보다 무겁다
수요일이었다.
D-95.
한남동. 저녁 일곱 시.
연화는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접시 세 장. 수저 한 벌. 국그릇 하나. 태욱이 혼자 먹은 저녁의 흔적이었다. 연화는 먹지 않았다. 입맛이 없었다. 어제 정명희에게서 들은 세 문장이 아직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결국 혼자가 됐잖아.' '이혼한 사람을 많이 만나면 좋지 않아.' 문장의 무게가 식욕을 눌렀다.
수도꼭지를 틀었다. 물소리가 주방을 채웠다.
드레스룸 쪽에서 소리가 났다. 옷걸이가 움직이는 소리. 서랍이 열리는 소리. 태욱이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거실로 나왔다. 캐주얼 재킷에 청바지. 회사 복장이 아니었다. 넥타이는 없었다. 평소 퇴근 후에는 티셔츠 차림으로 소파에 앉았다. 재킷을 입는 것은 밖에 나갈 때뿐이었다.
"나 좀 나갔다 올게."
"네."
"늦지 않을 거야."
그 말이 추가됐다. 지난주에는 없던 문장이었다. '늦지 않을 거야'는 연화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현관문이 닫혔다. 도어락 잠기는 소리가 울렸다.
연화는 시계를 봤다. 7시 37분.
수첩을 꺼냈다. 네 번째 수요일.
첫 번째: 7시 40분 출발, 10시 12분 귀가.
두 번째: 7시 35분 출발, 10시 08분 귀가.
세 번째: 7시 42분 출발, 10시 25분 귀가.
네 번째: 7시 37분 출발.
출발 시간의 범위는 7시 35분에서 42분. 7분의 폭. 넓지 않았다. 약속 시간이 정해져 있다는 뜻이었다. 자유로운 만남이 아니라 고정된 일정. 귀가는 10시에서 25분 사이. 약 2시간 30분. 네 번 모두 한남대교 방향으로 나갔다. 네비게이션을 확인한 것은 아니었다. 현관에서 엘리베이터까지의 방향과, 차가 지하주차장에서 나가는 출구의 방향으로 추정한 것이었다.
설거지를 마쳤다. 손을 닦았다. 행주를 접어 걸었다. 주방 조명 아래서 손을 봤다. 설거지를 하면 손이 거칠어졌다. 한남동에 가사 도우미가 있었지만, 저녁 설거지는 연화가 했다. 태욱이 나간 뒤의 주방은 연화의 공간이었다.
거실을 지나 서재로 갔다. 태욱의 서재였다. 연화의 공간은 이 집에 없었다. 서재의 책상에 태욱의 서류와 펜이 놓여 있었다. 연화는 그 옆에 앉았다. 태욱의 냄새가 의자에 남아 있었다. 우디 향. 10년 전부터 같은 향수였다.
노트북을 열었다. 대한그룹 홈페이지. 공시 탭. 이번 달 경영진 일정 공개 부분. 수요일 저녁 칸을 확인했다. 네 주 모두 비어 있었다. 공식 미팅이 없는 시간이었다. 태욱이 '미팅'이라고 한 것은 회사 일정에 포함되지 않았다.
공개 정보였다. 누구나 열람할 수 있었다. 연화가 한 것은 홈페이지를 열어 스크롤을 내린 것뿐이었다.
서지혁에게 전화했다.
"수요일 저녁 패턴이 네 주째예요."
"출발과 귀가 시간은요?"
"7시 35분에서 42분 사이요."
"귀가는요?"
"10시 전후."
"편차가 작네요."
"고정 약속이라는 거죠?"
"네."
서지혁이 잠깐 말이 없었다.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들렸다.
"공식 일정은요?"
"수요일 저녁이 전부 비어 있어요."
"어디서 확인하셨습니까."
"홈페이지 공시요."
"합법입니다."
서지혁의 목소리가 반 톤 낮아졌다. 법률적 판단을 내리는 톤이었다.
"사실조회를 쓸 수 있습니다."
"사실조회요?"
"법원 요청 절차입니다."
서지혁이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구조를 짚었다.
"통신사에 위치 기록을 요청합니다."
"태욱 씨 휴대폰이요?"
"4주간 수요일 저녁 기록입니다."
연화는 종이에 적었다. 사실조회. 통신사. 위치 기록. 4주 수요일.
"신청하면 태욱이 알게 되나요?"
"소송 이후 절차예요."
"지금은요?"
"근거를 쌓는 단계입니다."
서지혁의 목소리가 잠깐 멈췄다. 다음 문장을 고르는 사이였다.
"빈 시간은 상대가 채웁니다."
연화는 그 문장을 수첩에 적었다.
"빈 시간이 있다는 것만 입증하면 됩니다."
전화를 끊었다. 서재의 스탠드 불빛이 수첩 위에 원을 그리고 있었다. 서지혁이 말한 것은 간단했다. 태욱이 어디 갔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비어 있는 시간이 있다는 것은 안다. 비어 있는 시간이 패턴이 되면 법원이 채울 수 있다.
연화가 할 일은 빈 시간의 윤곽을 그리는 것이었다. 안의 내용은 법원이 열 것이었다.
기다렸다.
8시. 거실이 조용했다. 냉장고 모터가 돌아가는 소리만 들렸다. 소파에 앉았다. 태욱이 앉는 자리 반대편에. 쿠션의 모양이 태욱의 등 형태로 눌려 있었다.
전 타임라인에서는 이 시간이 불안의 시간이었다. 태욱이 어디 갔는지 모르면서 문자를 세 번 보내고, 답이 없으면 다리를 떨었다. 받으면 먼저 사과했다. '미안해, 잠깐 궁금해서.' 왜 미안했는지는 지금도 모른다.
이 타임라인에서는 수첩을 펴고 시간을 적었다. 같은 기다림이었다. 기다리는 감정이 달랐다. 불안이 아니라 관찰이었다.
9시. 창밖이 어두워졌다. 한남동의 불빛이 커튼 사이로 들어왔다.
태블릿을 열었다. 뉴스를 봤다.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기다리는 시간은 길었다. 기다리는 이유를 아는 기다림은 더 길었다.
하경에게 전화를 걸까 생각했다. 걸지 않았다. 이 시간은 기록의 시간이었다. 누군가의 위로로 채우면 안 됐다.
10시 14분. 도어락이 울렸다.
연화는 이미 침실에 있었다.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웠다. 불을 껐다. 9시 50분부터 준비한 것이었다.
거실에서 소리가 들렸다. 태욱이 들어왔다. 현관에서 구두를 벗는 소리. 재킷을 소파에 놓는 소리. 냉장고 문 여는 소리. 물병 꺼내는 소리. 뚜껑 돌리는 소리. 물 마시는 소리. 이 집의 밤은 소리로 읽을 수 있었다. 태욱의 동선이 소리로 그려졌다. 현관에서 거실, 거실에서 주방, 주방에서 침실.
침실 문이 열렸다. 잠든 척이었다. 호흡을 느리게 유지했다. 태욱이 침실로 들어왔다. 연화 쪽을 보지 않았다. 욕실로 갔다.
물 흐르는 소리. 샤워. 태욱은 평소 아침에 샤워했다. 밤에 샤워하는 것은 3주째였다. 무언가가 3주 전에 바뀐 것이었다.
샤워 시간은 짧았다. 7분. 평소 아침 샤워가 15분이었다. 밤 샤워는 절반이었다. 씻는 것이 아니라 지우는 것의 시간.
물 소리가 멈췄다. 수건 걸리는 소리. 드라이어는 쓰지 않았다. 태욱이 나왔다. 바디로션 냄새가 옅게 퍼졌다. 평소 쓰지 않는 로션이었다. 연화의 것이 아니었다.
침대에 누웠다. 매트리스가 미세하게 기울었다. 태욱의 체온이 이불을 타고 전해졌다. 호흡이 가라앉았다. 3분.
연화는 눈을 떴다. 천장을 봤다. 천장의 조명이 꺼져 있었다. 어둠 속에서 태욱의 호흡 소리만 들렸다. 같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같은 이불을 덮고 있었다. 사이에 30센티미터의 간격이 있었다. 그 간격이 10년 전보다 넓어진 것은 아니었다. 처음부터 이 간격이었다.
잠이 오지 않았다. 1시간을 기다렸다. 태욱의 호흡이 깊어진 것을 확인하고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욕실에 들어갔다. 문을 닫았다. 불을 켰다.
수첩을 꺼냈다.
네 번째 수요일. 7:37 출발. 10:14 귀가. 한남대교 방향. 귀가 후 샤워(3주 연속). 샤워 시간 7분.
적고 나서 펜을 놓았다. 손이 떨리지 않았다. 기록하는 손은 떨리지 않는다. 감정이 올라오려 할 때 펜을 잡으면 손은 글자를 따라간다.
수첩을 욕실장 안쪽에 넣었다. 거울을 봤다. 형광등 아래서 얼굴이 창백했다. 눈 아래 그림자가 있었다. 새벽 다섯 시부터 행사장에 나가고, 밤 열한 시에 욕실에서 수첩을 쓰는 생활이 얼굴에 나타나고 있었다. 이 얼굴을 태욱은 보지 않는다.
불을 끄고 나왔다. 침대에 누웠다. 태욱의 호흡이 규칙적이었다. 잠들기까지 20분이 걸렸다.
다음 날 아침. 식탁.
태욱이 먼저 앉아 있었다. 아이패드를 보고 있었다. 아메리카노 한 잔. 연화는 맞은편에 앉았다. 토스트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어젯밤 미팅은 잘 됐어요?"
태욱이 아이패드에서 시선을 들었다.
"뭐, 그냥 그래."
"매주 수요일이면 중요한 건가 봐요."
태욱이 연화를 봤다. 2초. 눈이 좁아지지 않았다. 표정이 바뀌지 않았다. 그것이 더 읽기 어려웠다.
"거래처 사람들이랑 정기 모임이야."
"어떤 거래처요?"
"별거 아니야."
"알려주면 안 돼요?"
"뭘 그렇게 궁금해해."
태욱의 목소리에 짜증이 묻어 있었다. 미세했다. 이 짜증은 질문에 대한 것이 아니라 질문이 반복된 것에 대한 것이었다. 연화가 전에는 하지 않던 질문을 하기 시작한 것을 태욱은 감지하고 있었다.
"그냥 궁금해서요."
"별거 아니라니까."
별거 아니라는 말이 두 번 나왔다. 질문의 방향을 닫는 답이었다. 구체적인 이름이 나오지 않았다. '거래처'는 범주이지 이름이 아니었다. 태욱은 범주로 대답하고, 연화는 이름을 물었다. 이 차이를 태욱은 눈치채지 못했다. 혹은 신경 쓰지 않았다.
"당신도 수요일마다 바쁘지 않아?"
태욱이 되물었다. 연화의 질문을 질문으로 돌려보내는 것이었다.
"저요? 별로요."
"그래."
태욱이 아이패드로 시선을 돌렸다. 대화가 끝났다. 연화는 토스트를 마저 먹었다. 버터 맛이 혀에 남았다.
태욱이 일어섰다. 넥타이를 매면서 현관으로 향했다.
"다녀올게."
"네."
현관문이 닫혔다. 연화는 커피잔을 손에 감싸고 있었다. 잔이 미지근해져 있었다.
식탁 위에 태욱의 아이패드가 놓여 있었다. 화면이 꺼져 있었다. 잠금이 걸려 있을 것이었다. 연화는 손을 뻗지 않았다. 아이패드를 여는 것은 위법이었다. 서지혁이 말한 선. 그 선을 넘으면 연화가 모은 모든 것이 무효가 된다. 합법의 영역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있었다. 공개 정보. 출발과 귀가 시간. 샤워 패턴. 바디로션 냄새.
전 타임라인에서 연화는 태욱의 핸드폰을 봤다. 비밀번호를 알아냈다. 결국 불법 증거로 소용이 없었다. 이번에는 같은 실수를 하지 않는다.
식탁을 정리했다. 태욱의 접시와 잔을 씻었다. 아이패드는 그 자리에 그대로 놓아뒀다.
오후. 성수동 사무실.
계단을 올라갔다. 문을 열었다. 환기되지 않은 공기. 창문을 열었다. 바람이 들어왔다. 성수동 골목의 소음이 밀려왔다. 공사장 소리, 카페 음악, 사람들의 발걸음. 이 소음이 한남동의 정적보다 편했다. 한남동에서는 모든 소리가 태욱과 연결되어 있었다. 여기서는 아무 소리도 연화의 것이 아니었다.
서랍에서 지난번 USB를 확인했다. 행사 실무 파일 4건. 그대로 있었다.
종이가 날리지 않도록 수첩 위에 펜을 올려놓았다.
수첩을 펼쳤다. 네 주치 수요일 기록을 한 페이지에 정리했다.
1주차: 출발 7:40, 귀가 10:12. 샤워 없음.
2주차: 출발 7:35, 귀가 10:08. 샤워 없음.
3주차: 출발 7:42, 귀가 10:25. 귀가 후 샤워.
4주차: 출발 7:37, 귀가 10:14. 귀가 후 샤워.
3주차부터 샤워가 추가됐다. 무언가가 바뀐 것이다. 장소가 바뀌었거나, 만나는 사람과의 관계가 바뀌었거나. 1~2주차와 3~4주차 사이에 단절이 있었다. 같은 요일, 같은 시간대, 같은 방향. 하지만 돌아온 뒤의 행동이 달라졌다.
서지혁이 말했다. 빈 시간은 상대가 채운다. 연화는 빈 시간의 윤곽만 그렸다. 안의 내용은 법원이 채울 것이었다. 다음 수요일이면 다섯 번째 기록이 추가된다. 5주 연속이면 우연이 아니다.
서지혁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4주차 기록 정리 완료.'
'5주차 후에 보겠습니다.'
'바디로션이 바뀌었어요. 태욱 것이 아닌.'
1분 뒤 답이 왔다.
'감각 관찰도 기록해두세요.'
감각 관찰. 서지혁은 연화의 관찰을 법적 언어로 번역했다. 바디로션 냄새가 감각 관찰이 되고, 샤워 패턴이 행동 변화가 되고, 빈 시간이 정황 증거가 됐다. 연화가 느끼는 것들이 법원에 갈 수 있는 형태로 변환되고 있었다.
수첩을 닫았다. 창밖으로 성수동 오후가 보였다. 건물 사이로 그림자가 길어지고 있었다.
4주의 기록이 쌓이니 패턴이 됐다. 패턴이 되면 우연이 아니다. 우연이 아니면 증거다.
이 집에서 가장 무거운 것은 태욱의 존재가 아니었다. 태욱이 비어 있는 시간이었다. 그 시간의 무게를 연화는 수첩에 숫자로 옮기고 있었다. 숫자는 감정보다 무겁다. 감정은 법정에서 흩어지지만, 숫자는 남는다.
다음 수요일. 다섯 번째 기록이 추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