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화. 꽃이 지면 청구서가 남는다
새벽 다섯 시. 호텔 그랜드볼룸.
D-97.
택시에서 내렸다. 호텔 정문의 유리에 새벽 가로등 불빛이 반사되고 있었다. 로비는 비어 있었다. 프론트 직원 한 명이 모니터를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연화는 목례를 하고 볼룸으로 향했다.
이틀 전 이세린이 말했다. '재벌가 며느리가 잘하는 거 알아? 사람 관리. 공간 관리.' 오늘 연화가 할 일이 정확히 그것이었다. 180명의 사람을 관리하고, 볼룸이라는 공간을 관리하는 것. 다만 이 일의 이름은 '재단 자선행사'였고, 연화의 이름은 어디에도 적히지 않을 것이었다.
볼룸 문을 열었다. 플로리스트가 1번 테이블에 백합을 올리고 있었다. 줄기가 길었다. 꽃잎이 아직 완전히 피지 않았다. 정명희가 지정한 꽃이었다. 향이 공간을 채우는 꽃. 존재감이 비용보다 먼저 오는 꽃. 정명희의 선택은 늘 인상이 먼저였다.
백합 향이 볼룸 전체에 퍼지고 있었다. 에어컨이 가동되면서 차가운 공기가 향을 실어 날랐다. 연화는 숨을 들이쉬었다. 달고 무거운 향. 리허설 때는 없던 냄새였다.
좌석 카드 180장을 꺼냈다. 1번 테이블부터 시작했다. 이름을 확인하고, 방향을 잡고, 간격을 맞췄다. 리허설 때 정명희가 수정한 5번 테이블 김 이사 자리를 안쪽으로 옮겼다. 확인했다.
5번 테이블 외국인 게스트의 자리에 영어 메뉴 카드를 놓았다. 9번 테이블 사모님의 좌석에 쿠션을 올렸다. 작년에 허리가 안 좋다고 했던 것.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것을 연화는 기억했다. 기억하는 것이 연화의 일이었다.
박 과장이 도착했다.
"동선 확인합니다."
"후원자분들 우측이요."
"기자단은요?"
"좌측 복도 돌아서 미디어 데스크로."
"네. 안내 팻말 세워뒀습니다."
"고마워요."
연화가 잡아놓은 대로 움직이면 됐다. 박 과장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리허설 때 한 번 돌았으니 오늘은 확인만 하면 됐다.
스태프들이 하나둘 도착하기 시작했다. 케이터링 팀이 주방 쪽에서 소리를 냈다. 접시 부딪히는 소리. 물 흐르는 소리. 볼룸이 서서히 깨어나고 있었다.
7시. 연화는 테이블을 한 바퀴 더 돌았다. 좌석 카드 방향 확인. 물잔 위치 확인. 냅킨 접힌 각도 확인. 사소한 것들이었다. 사소한 것이 틀어지면 정명희가 알아챈다. 정명희는 사소한 것을 무기로 쓰는 사람이었다.
아홉 시. 정명희가 도착했다.
검은 드레스에 진주 목걸이. 머리를 올렸다. 오늘은 리허설이 아니라 본 무대였다. 정명희의 얼굴이 조명 아래서 빛났다. 뒤에 사무국장과 비서가 따랐다.
정명희가 볼룸을 한 번 훑었다. 테이블, 꽃, 조명, 동선. 2초.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끄덕이지 않는 것이 만족이었다.
"준비 됐니?"
"네."
"연사 순서 변경 없지?"
"없어요."
"좋아."
정명희가 연단 쪽으로 걸어갔다. 연화는 뒤에서 지켜봤다. 정명희의 걸음이 볼룸 한가운데를 지나갔다. 연화가 설계한 동선이었다. 어떤 테이블에서든 정명희가 보이도록 배치한 것이었다.
행사가 시작됐다. 정명희의 인사말. 마이크를 잡은 목소리가 볼룸에 울렸다. 박수가 따랐다.
연화는 무대를 보지 않았다. 객석을 봤다. 누가 박수를 먼저 치는지, 누가 휴대폰을 보는지, 누가 옆 사람에게 고개를 기울이는지. 이것이 연화의 시선이었다. 무대가 아니라 객석. 주인공이 아니라 반응.
1번 테이블. VIP들이 정명희의 인사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7번 테이블 후원사 대표가 물을 마시고 있었다.
재단 홍보팀 직원이 다가왔다.
"사모님, 3번 테이블에서 메뉴 문의요."
"알레르기요?"
"갑각류요."
"셰프한테 확인할게요. 잠깐만요."
주방으로 갔다. 케이터링 셰프와 30초 대화했다. 갑각류 제외 디저트 별도 준비. 돌아와서 홍보팀 직원에게 전했다.
"대체 디저트 나가요. 직접 갖다드려요."
"네."
다시 객석으로 시선을 돌렸다. 9번 테이블의 사모님이 쿠션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준비해둔 보람이 있었다. 연화를 향해 고개를 살짝 숙였다. 연화도 웃으며 목례했다.
12번 테이블에 시선이 멈췄다.
지난 행사에서 YK인터내셔널 좌석이 있던 테이블이었다. 이번에도 좌석 카드가 추가되어 있었다. 연화가 놓지 않은 카드였다. '글로벌 리서치'. 배치 메모에는 '본부 직접 지정'이라고만 적혀 있었다. 또 전략기획본부였다. 이름만 바뀌고 구조가 같았다.
해당 좌석에 여자가 앉아 있었다. 40대 초반. 회색 재킷. 머리를 단정하게 묶었다. 주변 사람들과 대화하지 않았다. 와인잔에 입을 대지 않았다. 냅킨을 펼치지도 않았다. 초대된 사람이 아니라 배치된 사람의 태도였다. 자리를 채우기 위해 온 사람.
연화는 시선을 거뒀다. 오래 보면 상대가 알아챈다.
행사 중반. 디저트가 나왔다. 과일 타르트와 마카롱. 정명희가 연단에서 내려왔다. 연화가 다가갔다.
"물 드릴까요?"
"됐어. 스태프룸에서 잠깐 쉬자."
스태프룸으로 이동했다. 정명희가 거울 앞에 섰다. 립스틱을 꺼냈다. 화장을 고치기 시작했다.
연화는 핸드백의 녹음 버튼을 눌렀다. 정명희의 등 뒤에서. 자연스럽게 핸드백을 의자에 걸었다.
정명희가 거울을 보면서 말했다. 립스틱을 입술에 대고.
"세린이를 만났다며?"
연화의 손이 태블릿 위에서 멈추지 않았다. 멈추면 안 됐다. 이틀 전 세나에게 보낸 메시지. '오늘 이세린 선배 만났어.' 48시간. 세나에게서 정명희까지 48시간이 걸린 것이었다.
"네. 커피 한잔 했어요."
"어디서?"
"성수동이요."
정명희가 거울 속에서 연화를 봤다.
"성수동은 왜?"
"선배님이 그쪽에 사무실이 있어서요."
사무실이라는 단어에 정명희의 눈이 좁아졌다. 0.3초. 풀렸다.
"세린이 사업한다며."
"네."
"세린이도 한때는 완벽한 며느리였지."
목소리에 감정이 없었다. 사실을 말하는 톤이었다.
"결국 혼자가 됐잖아."
연화의 등이 곧아졌다. 표정은 바꾸지 않았다. 이세린을 만난 것을 정명희가 알고 있었다. 예상은 했다. 하지만 이렇게 직접 말할 줄은 몰랐다.
"이혼한 사람을 많이 만나면 좋지 않아."
연화가 태블릿에서 시선을 들었다.
"선배로서 존경하는 분이에요."
"존경은 멀리서 해도 돼."
정명희가 거울에서 시선을 거뒀다. 돌아서서 연화를 봤다. 2초. 며느리를 보는 눈이 아니었다. 관리 대상을 점검하는 눈이었다. 이 사람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어디까지 움직이고 있는지를 가늠하는 눈.
녹음은 돌고 있었다. '결국 혼자가 됐잖아.' '이혼한 사람을 많이 만나면 좋지 않아.' '존경은 멀리서 해도 돼.' 세 문장. 형태는 충고였다. 실질은 교우 관계를 제한하는 것이었다. 태욱의 '좋은 영향은 아닌 것 같은데'와 같은 방향이었다. 남편이 축소하고, 시어머니가 차단한다. 가족 구조 안에서의 통제 패턴.
나수빈의 분류표가 떠올랐다. 유형 3. 교우 관계 제한. 이 문장들은 단독으로도 의미가 있었다.
"후반부 시작하자."
정명희가 나갔다. 연화는 3초를 세고 핸드백을 집었다. 녹음을 정지했다. 28분 41초. 3건째. 정명희 발언이 포함된 첫 파일이었다.
이어폰을 꽂을 수 없었다. 행사가 진행 중이었다. 확인은 나중에. 하지만 세 문장은 머릿속에 박혀 있었다. '결국 혼자가 됐잖아'는 경고였다. 이세린의 결말을 보여주면서 연화도 그렇게 될 거라는 암시. '이혼한 사람을 많이 만나면 좋지 않아'는 직접적인 교우 제한. '존경은 멀리서 해도 돼'는 접촉 차단.
정명희는 세 문장으로 벽을 세웠다. 부드러운 벽. 충고라는 이름의 벽. 이 벽을 넘으려면 정면으로 부딪히면 안 됐다. 연화는 오늘도 "네"라고 대답했다. 그 "네"가 순종이 아니라 위장이라는 것을 정명희는 아직 모른다.
볼룸으로 돌아왔다. 후반부가 시작됐다. 기부금 발표. 박수. 정명희가 무대에서 감사 인사를 했다. 연화는 다시 객석을 봤다.
12번 테이블. 회색 재킷의 여자가 사라져 있었다. 디저트가 나오기 전에 자리를 뜬 것이었다. 지난번과 같은 패턴이었다. 행사 중반에 도착하고, 후반부 전에 사라진다. 빈 자리 위에 냅킨만 접혀 있었다. 깨끗하게 접힌 냅킨. 한 번도 펼치지 않은 것이었다.
행사가 끝났다. 스태프들이 정리를 시작했다. 꽃을 치우고, 린넨을 걷고, 의자를 접었다. 백합 향이 점점 옅어졌다.
연화는 스태프 데스크로 갔다. 박 과장 옆에 앉았다.
"발주 내역 좀 볼 수 있을까요?"
"네. 여기 있습니다."
노트북 화면을 돌려줬다. 연화는 스크롤했다. 이번 행사 외주 목록. 케이터링, 꽃, 음향, 인쇄. 그리고 글로벌 리서치. 항목: '시장 조사 대행'. 금액: 이천삼백만 원.
"이 항목은 어디서 요청된 거예요?"
"본부에서 직접 넣으셨어요."
"본부요?"
"전략기획본부요. 사무국에서 건드리지 말라고."
박 과장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신경 쓰이는 항목이라는 뜻이었다. 연화는 더 묻지 않았다.
YK인터내셔널의 이전 발주 금액이 떠올랐다. 이천만 원, 이천이백만 원, 이천백만 원. 항목은 매번 달랐다. 인쇄, 기념품, 연사 대행. 이번에는 시장 조사 대행. 재단 행사에 시장 조사 대행이 필요한 이유는 없었다. 이름이 바뀌고 항목이 바뀌고 금액이 유지되는 구조.
화면을 닫았다. 스크린샷은 찍지 않았다. 기억으로 충분했다. 이 단계에서 흔적을 남기면 안 됐다.
박 과장이 다가왔다.
"사모님, 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
"박 과장님도요. 다음에 또 뵐게요."
"글로벌 리서치 쪽 분은 일찍 가셨나 봐요."
"네?"
"12번 테이블. 디저트 전에 나가시더라고요."
연화는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바쁘신가 보죠."
"그런가요. 아, 철수 시간 확인 좀."
"아홉 시까지면 됩니다."
박 과장이 돌아갔다. 연화는 그 뒷모습을 보면서 생각했다. 박 과장도 알아챈 것이었다. 12번 테이블의 여자가 일찍 나간 것을. 호텔 연회팀 입장에서는 사소한 것이었다. 연화에게는 패턴의 반복이었다.
호텔을 나왔다. 8월 저녁 공기가 무거웠다. 볼룸의 냉기가 피부 위에서 빠르게 걷혔다. 하늘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호텔 앞 도로에 택시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서지혁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오늘 28분. 정명희 발언 포함.'
답이 왔다.
'어떤 유형입니까.'
'교우 관계 제한. 세 문장.'
'태욱 씨 발언과 교차됩니까.'
연화는 생각했다. 태욱은 '좋은 영향은 아닌 것 같은데'라고 했다. 정명희는 '이혼한 사람을 많이 만나면 좋지 않아'라고 했다. 남편이 축소하고 시어머니가 차단한다. 같은 대상, 같은 방향, 다른 입.
'네. 교차됩니다.'
잠깐 텀이 있었다.
'좋습니다. 확인할 것 하나 더요?'
'발주 내역. 금액 패턴.'
'내일 성수동에서.'
택시를 잡았다. 한남동. 차 안에서 창밖을 봤다. 한강 위로 저녁빛이 번지고 있었다.
백합은 내일이면 치워질 것이다. 꽃은 하루를 위해 놓이고, 다음 날 쓰레기통으로 간다. 꽃이 지면 남는 건 청구서뿐이었다. 이천삼백만 원짜리 청구서. 시장 조사 대행이라는 이름의 청구서. 연화는 그 청구서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집에 도착했다. 태욱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수요일이 아닌데도 늦었다.
침실에 들어가 핸드백을 내려놓았다. 수첩을 꺼냈다.
녹음 3건째 — 정명희 발언 포함. 28분 41초.
정명희: '결국 혼자가 됐잖아.' '이혼한 사람을 많이 만나면 좋지 않아.' '존경은 멀리서 해도 돼.' — 교우 관계 제한 유형.
세나→정명희 전달 시간: 약 48시간.
글로벌 리서치: 시장 조사 대행. 2,300만 원. YK인터내셔널과 금액대 유사. 항목 변경, 이름 변경, 금액 유지 구조.
12번 테이블 여자: 디저트 전 퇴장. 전회 패턴과 동일.
수첩을 닫았다. 확인할 것이 셋으로 늘었다. 정명희의 통제 패턴. 세나의 정보 경로. 이름을 바꿔가며 반복되는 돈의 흐름.
창밖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한남동의 밤이 내려오고 있었다. 현관 도어락이 울렸다. 태욱이 들어오는 소리였다.
수첩을 욕실장 안쪽에 넣었다. 침대에 누웠다. 거실에서 태욱이 냉장고를 여는 소리가 들렸다. 물병을 꺼내는 소리. 뚜껑 돌아가는 소리.
오늘 정명희의 녹음을 얻었다. 세나의 경로 시간을 확인했다. 글로벌 리서치의 금액을 봤다. 세 가지가 동시에 움직이고 있었다. 연화는 그 세 가지를 하나의 수첩에 적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