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무너진 다음 날의 여자
카페 문을 밀었을 때, 원두 냄새가 먼저 왔다. 볶은 원두의 쓴 향이 콧등을 스쳤다.
D-99. 금요일 오후. 성수동.
정명희에게서 재단 서류 확인 요청이 왔었다. 금요일 오후를 채우려는 호출이었다. 서류 세 장에 서명하고 나왔다. 40분 만에 끝냈다. 서류의 내용은 이미 연화가 작성한 것이었다. 정명희는 서명만 하면 됐고, 연화는 그 서명을 받으러 간 것이었다.
좁은 계단을 올라 2층이었다. 창이 넓었다. 오후 햇살이 나무 테이블 위에 비스듬히 깔려 있었다. 스피커에서 재즈 피아노가 낮게 흘렀다. 손님이 세 팀이었다. 노트북을 펼친 사람, 책을 읽는 사람, 조용히 대화하는 커플. 소란스럽지 않은 카페였다.
이세린이 먼저 와 있었다. 창가 자리. 아메리카노 한 잔이 반쯤 비어 있었다.
화장이 옅었다. 흰 린넨 셔츠에 슬랙스. 손목에 시계 하나. 귀걸이도 반지도 목걸이도 없었다. 재벌가 며느리였던 여자의 차림이 아니었다. 자기 이름으로 사는 사람의 차림이었다. 연화는 그 차이를 알아봤다. 자신에게는 아직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맞은편에 앉았다. 의자가 낮았다. 테이블 위에 핸드백을 놓았다. 녹음기는 켜지 않았다. 이 자리는 수집의 자리가 아니었다.
"오랜만이에요."
"선배님, 잘 지내셨어요?"
이세린이 커피잔을 손에 감쌌다.
"잘 지낸다는 기준이 뭔지 모르겠지만."
"바쁘세요?"
"바쁘긴 해."
목소리가 낮고 여유로웠다. 서두르지 않는 사람의 리듬이었다. 연화는 자신의 호흡이 빨라져 있다는 걸 알아챘다. 한남동에서 택시를 타고 오는 동안 정명희에게 전화가 왔었다. 재단 서류 확인 요청. 금요일 오후를 채우려는 지시였다. 일찍 끝냈다. 서류 세 장에 서명하고 나왔다.
속도를 맞췄다. 커피를 주문했다. 아메리카노. 이세린과 같은 것. 창밖으로 성수동 골목이 보였다. 낡은 건물 사이에 새 카페들이 들어서 있었다. 오래된 것과 새것이 섞여 있는 거리였다.
이세린이 잔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소리가 나지 않았다.
"물어보고 싶은 거 있으면 그냥 해요."
이세린이 먼저 열었다. 연화는 잠깐 망설였다. 지난 행사에서 이세린을 멀리서 봤을 때는 '잘 사는 사람'으로만 보였다. 이혼하고도 당당한 사람. 멀리서 보는 것과 앞에 앉는 것은 달랐다. 앞에 앉으면 질문을 해야 했다. 질문은 자신의 상황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선배님은 이혼 후에 어떠셨어요?"
이세린의 표정이 바뀌지 않았다.
"첫 달은 아무것도 안 했어."
"아무것도요?"
"잠만 잤어."
커피가 왔다. 연화의 아메리카노. 잔이 뜨거웠다. 손잡이를 잡았다. 열기가 손바닥으로 번졌다.
"둘째 달에 은행에 갔어."
"은행이요?"
"내 이름으로 된 통장이 없었어."
이세린의 시선이 창밖으로 잠깐 갔다가 돌아왔다.
"신용카드도 없었어. 서른네 살에."
연화의 손이 무릎 위에서 접혔다. 연화의 명의 통장에도 월 50만 원만 입금됐다. 카드는 태욱 명의 가족카드였다. 사용 내역이 태욱의 앱에 실시간으로 갔다. 연화는 그것을 알면서도 10년을 썼다.
이세린은 연화의 반응을 보고 있었다. 읽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서지혁의 읽기와는 달랐다. 서지혁은 사실을 읽었다. 이세린은 감각을 읽었다.
"셋째 달에 사무실을 얻었어."
"바로요?"
"원룸이었어. 책상 하나 놓으면 끝."
이세린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명함 하나 만들었어."
잔을 내려놓았다.
"아는 사람한테 전화 돌렸어."
"반응이 어땠어요?"
"천 명 넘게 교환한 명함 중에."
이세린이 손가락으로 잔을 돌렸다.
"받아준 사람이 서른두 명."
"그래도 서른두 명이잖아요."
"그래. 서른두 명이면 시작은 돼."
"처음엔 뭘 하셨어요?"
"이벤트 기획. 내가 할 줄 아는 거."
이세린이 연화를 봤다.
"재벌가 며느리가 잘하는 거 알아?"
"뭔데요?"
"사람 관리. 공간 관리."
연화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세린이 연화의 능력을 짚고 있었다. 아무도 이름 붙여준 적 없는 것에 이름을 붙이고 있었다.
서른두 명. 천 명 중 서른두 명. 3퍼센트. 연화는 그 숫자를 머릿속에 넣었다. 대한그룹 며느리일 때의 네트워크가 이혼 후에 남긴 잔해. 연화의 명함함에도 수백 장이 꽂혀 있었다. 행사장에서 교환한 것들. 그 중 연화 자신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한연화'를 아는 사람이 아니라 '대한그룹 며느리'를 아는 사람들이었다.
"충분했어요?"
"남았지."
이세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자조가 아니었다. 지나온 사람의 여유였다.
"처음 일을 준 사람이 누군지 알아?"
"누구요?"
"와인 흘린 거 수습해준 사모님."
이세린이 커피잔을 돌렸다.
"행사장에서. 내가 아는 유일한 실무."
연화는 그 문장에서 멈췄다. 와인을 수습해준 것. 연화가 지난 행사에서 했던 일이었다. VIP의 와인잔이 넘어졌을 때 린넨을 가져와 테이블을 닦고, 와인이 묻은 숄을 수거해 세탁실로 보낸 것. 보이지 않는 수습. 연화가 10년간 해온 종류의 일이었다.
"그런 게 남더라."
이세린이 말했다.
"직함은 안 남아. 능력이 남아."
연화는 커피를 마셨다. 뜨거웠던 잔이 미지근해져 있었다.
"이혼 후에 가장 힘든 게 뭐였어요?"
"사람들 시선."
이세린이 창밖을 봤다. 성수동 골목에 사람들이 걸어가고 있었다.
"사업 미팅에서 상대가 먼저 물어봐."
"뭘요?"
"전 남편 쪽이랑 관계 있으세요?"
이세린이 다시 연화를 봤다.
"내 능력이 아니라 간판을 봐."
간판. 대한그룹 며느리. 한태욱의 아내. 정명희의 며느리. 연화에게 붙어 있는 간판들. 그것이 벗겨졌을 때 남는 것이 무엇인지를 연화는 아직 몰랐다. 이세린은 그것을 이미 통과한 사람이었다. 간판 없이 사무실을 열고, 전화를 돌리고, 서른두 명으로 시작한 사람.
연화는 자신의 손을 봤다. 오늘 새벽 180장의 좌석 카드를 놓았던 손이었다.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연화뿐이었다. 정명희도 인정한 것이었다. '네가 없으면 안 돌아가.' 그 능력이 간판 아래 묻혀 있었다.
카페 안의 재즈 피아노가 곡이 바뀌었다. 느린 곡에서 조금 빠른 곡으로. 커플이 일어나 나갔다. 자리가 비었다.
"끝내는 건 이혼이 해."
이세린이 말했다.
"시작하는 건 네가 하는 거야."
연화는 잔을 내려놓았다.
"시작할 게 뭔지 아직 모르겠어요."
"몰라도 돼."
이세린이 잔을 비웠다.
"먼저 살아남아."
"어떻게요?"
"매일 한 가지씩 네 이름으로 해."
이세린이 잔을 비웠다.
"통장이든 명함이든 전화 한 통이든."
살아남아. 하경이 했던 말과 같은 방향이었다. 다른 입에서 나온 같은 말. 하경은 언니를 걱정하는 목소리로 말했고, 이세린은 지나온 사람의 톤으로 말했다. 방향은 같았다.
이세린이 핸드백에서 명함을 꺼냈다. 연화 쪽으로 밀었다.
'이세린 컨설팅.' 이름과 전화번호. 그 아래 손글씨가 있었다. '필요하면 언제든.'
연화는 명함을 받았다. 종이가 두꺼웠다. 자기 돈으로 만든 명함의 두께.
이세린이 일어서면서 멈췄다. 연화를 내려다봤다.
"변호사는 구했어?"
연화의 표정이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이세린은 이미 답을 읽은 눈이었다. 이 여자는 질문하기 전에 답을 아는 사람이었다. 확인하려고 묻는 것이었다.
"너무 혼자 하지 마."
"네."
"그게 가장 위험해."
연화가 일어섰다.
"커피값은 제가."
"됐어."
이세린이 손을 저었다.
"다음엔 네가 사."
다음이 있다는 뜻이었다. 연화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이세린이 계산대로 갔다. 카드를 냈다. 자기 이름의 카드였다. 연화는 그 뒷모습을 봤다. 자기 일정이 있는 사람의 걸음이었다. 다음 미팅이 있거나, 다음 장소가 있거나.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시간을 쓰는 사람. 연화도 저런 걸음을 갖고 싶었다. 자기 다음 일정으로 향하는 걸음.
유리문이 닫혔다. 이세린의 흰 셔츠가 계단 아래로 사라졌다.
연화는 명함을 봤다. 뒤집었다. 손글씨. '필요하면 언제든.' 핸드백에 넣었다. 서지혁의 명함과 나란히.
서지혁은 법률이었다. 이세린은 경험이었다. 칼과 다리. 둘 다 필요했다.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잠깐 더 앉아 있었다. 카페 안이 조용했다. 노트북을 펼친 사람이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만 들렸다.
이세린은 서른네 살에 통장이 없었다. 연화는 서른다섯이었다. 통장은 있었다. 50만 원짜리. 이세린은 서른두 명으로 시작했다. 연화에게 전화를 받아줄 사람이 몇 명인지는 아직 세어보지 않았다. 서지혁. 하경. 이세린. 세 명은 확실했다. 세나는 빠졌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단을 내려가면서 카페를 돌아봤다. 이세린이 앉았던 창가 자리에 햇살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빈 잔 두 개가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
세나에게 카카오톡을 보냈다.
'세나야, 오늘 이세린 선배 만났어.'
이 정보는 진짜였다. 날짜와 장소와 사람 이름이 모두 사실이었다. 정명희가 조사해도 나오는 것은 이혼 후 독립한 사업가와의 커피 한잔. 서지혁의 이름은 가려져 있었다. 연화가 세나에게 주는 정보에는 늘 진짜와 가짜가 섞여 있었다. 진짜를 주어야 가짜도 믿는다.
세나의 답장이 왔다.
'이세린? 대단하다 걔. 나도 소개시켜줘 ㅋㅋ'
진짜인지 연기인지는 알 수 없었다. 세나의 감탄은 늘 적절한 온도였다.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 메시지가 어디로 가는지는 알고 있었다. 태욱에게. 정명희에게. 두 개의 파이프.
택시를 잡았다. 한남동.
성수동을 빠져나오는 데 10분이 걸렸다. 금요일 오후의 차가 밀렸다. 창밖으로 사람들이 걸어가고 있었다. 퇴근하는 사람들. 약속 장소로 가는 사람들. 각자의 일정이 있는 사람들.
차 안에서 이세린의 말을 되짚었다. '먼저 살아남아.' '끝내는 건 이혼이 해. 시작하는 건 네가 하는 거야.' 이세린은 무너진 다음 날에 일어났다. 첫 달은 잠만 자고, 둘째 달에 은행에 가고, 셋째 달에 사무실을 얻었다. 무너지고 나서 순서를 밟았다.
연화는 아직 무너지기 전이었다. 무너지기 전에 준비하고 있었다. 이세린과 순서가 달랐다. 그것이 유리한 것인지, 아니면 무너지는 충격을 나중에 한꺼번에 받게 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한남대교를 건넜다. 한강 위에 오후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물 위에 빛이 부서졌다. 다리 위에서 보면 한강은 늘 같은 모습이었다. 연화가 이 다리를 건너기 시작한 것은 결혼 후부터였다. 강남에서 한남동으로. 10년간 같은 방향. 성수동 사무실이 생긴 뒤로 방향이 하나 늘었다.
집에 도착했다. 현관을 열었다. 거실이 조용했다. 태욱은 아직 퇴근하지 않았다. 거실의 텔레비전이 꺼져 있었다. 소파 위에 신문이 접혀 있었다. 오늘 아침 태욱이 펼쳤다가 접어둔 것이었다. 리모컨은 태욱이 앉는 자리 옆에 놓여 있었다. 쿠션의 위치, 슬리퍼의 방향, 냉장고 안 음료의 배치. 이 집의 모든 것이 태욱의 동선 위에 놓여 있었다. 연화의 동선은 그 위에 겹쳐져 있었다. 겹치는 것이 아니라 따라가는 것이었다는 걸 이제는 안다.
주방에 물을 한 잔 따랐다. 마셨다. 차가웠다. 성수동 카페의 미지근한 아메리카노와 온도가 달랐다. 이 집의 물과 저 카페의 커피. 두 장소 사이의 거리가 연화의 현재 위치였다.
침실에 들어갔다. 핸드백을 내려놓았다. 이세린의 명함을 꺼내 수첩 사이에 끼웠다. 서지혁의 번호 옆에. 수첩이 두꺼워지고 있었다. 명함, 메모, 날짜, 시간. 연화의 것이 늘어나고 있었다.
침대에 앉았다. 창밖으로 한남동 오후가 기울고 있었다. 건물 사이로 노을이 번지기 시작했다.
이세린은 통과한 사람이었다. 연화가 가야 할 길을 먼저 걸은 사람. 저 자리에 서고 싶었다. 자기 이름의 명함. 자기 이름의 통장. 자기 이름의 일정. 그 감각이 분노보다 강했다. 분노는 태욱을 향했지만, 이 감각은 자기 자신을 향했다. 되고 싶은 것이 생긴 것이었다.
수첩을 폈다.
이세린 — 이혼 후 독립. 3개월 만에 사무실. 천 명 중 서른두 명. 첫 일은 와인 수습 인연.
핵심 조언: '먼저 살아남아.' '너무 혼자 하지 마.'
세나 투입: 이세린 만남 사실 전달. 반응 48시간 내 관찰.
적고 나서 펜을 놓았다. 수첩을 닫았다.
서지혁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이세린 선배 만났습니다. 변호사 구했냐고 묻더라고요.'
답이 왔다.
'좋은 사람입니다. 연락 유지하세요.'
서지혁이 이세린을 아는 것인지, 이름만 아는 것인지는 물어보지 않았다. 서지혁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은 연화도 필요한 것이었다. 그 판단을 신뢰하는 것이 지금 연화에게 있는 관계의 구조였다.
내일은 토요일이었다. 태욱이 집에 있는 날. 같은 식탁에 앉아 같은 공기를 마시는 날. 달라진 것은 하나. 연화의 핸드백 안에 명함이 두 장 늘었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