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화. B급
인천 B급 던전 ‘철의 회랑’. 월요일 오전 6시.
서지후가 먼저 와 있었다. 던전 입구에 기대서서 검을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180cm. 마른 체형이지만 근육의 밀도가 달랐다. S급 특유의 압축된 체격. 얼굴에는 어떤 감정도 없었다. 던전 입구에서 나오는 차가운 바람이 지후의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승헌이 도착했다. C급 표준 검. C급 방어구. 헌터 등록증 — 등급: 미분류.
지후가 승헌을 위아래로 흑었다.
“진짜 들어갈 거야?”
“네.”
“장비가 C급이네.”
“충분합니다.”
“B급 던전에서 C급 장비가 충분하다는 거야?”
“장비는 도구입니다. 중요한 건 사용자입니다.”
지후의 눈이 미세하게 바뀌었다. 비웃음이 아니라, 호기심이었다.
“좋아. 들어가자.”
▶ 철의 회랑 내부.
던전에 진입했다.
‘철의 회랑’은 금속성 미궁 구조의 던전이었다. 벽과 바닥이 흑철로 되어 있었다. 발을 디딠 때마다 금속음이 울렸다. 천장에서 붉은 조명이 내려왔다. 게이트 잔류 마력이 금속에 스며들어 만들어진 구조. 공기가 차갑고 금속 냄새가 났다. B급 몸스터 서식. 공격성 높음.
마켓 아이를 발동했다.
‘철의 회랑’ 전체 마나 맵 로딩…
최적 동선 계산 중…
예상 몸스터 배치: 전위 4체, 중위 6체, 보스 1체.
추천 공략 시간: 4시간 12분.
“왼쪽으로 갑니다.” 승헌이 말했다.
“뭘 근거로?”
“왼쪽 회랑의 마나 밀도가 낮습니다. 몸스터가 적고, 중앙 구역으로의 진입로가 짧습니다.”
지후가 승헌을 봤다. 2초. 그리고 왼쪽으로 걸었다. 질문하지 않았다. 지후는 실력으로 증명하는 것만 인정하는 사람이다. 말로는 안 된다.
▶ 전위 전투.
전위 4체. 철갑 몸스터. D급의 석형과는 차원이 달랐다. 속도가 빨랐다. 금속성 발톱이 회랑 벽면에 부딪힐 때마다 불꽃이 튀었다. 소리가 회랑 전체에 울렸다.
지후가 3체를 상대했다. S급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B급 몸스터가 종이처럼 베여나갔다. 3초에 1체. 압도적이었다. 전생에서 승헌은 S급이었다. 그래도 지후의 검은 빨랐다. 혀원히 빠른 것이 아니라, 미세하게 빠랐다. S급 중에서도 상위.
나머지 1체가 후방으로 돌아왔다. 승헌 쪽으로.
“뒤!” 지후가 말했다.
승헌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마켓 아이가 3초 전에 예측한 공격 방향이었다.
충분한 힘은 없었다. 하지만 각도가 정확했다. 관절의 축을 질렀다. 몸스터의 앞다리가 꺽였다. 금속성 갑각이 금이 가면서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검날이 진동했다. 손목이 저렸다. C급 검으로 B급 갑각을 베는 것은 검에게도 사용자에게도 무리였다.
마력 잔량 8%.
지후가 돌아봤다. 눈이 달라져 있었다.
“…너, 각성 실패자가 아니잖아.”
“맞습니다.”
“등급이 뭐야?”
승헌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회랑 안쪽을 봤다.
▶ 중위 전투.
중위 6체는 회랑 중앙에 밀집해 있었다. 지후가 앞에서 길을 열었다. 승헌은 뒤에서 마켓 아이로 공격 타이밍과 방향을 불렀다. 지후는 처음에 무시했다. 두 번째도 무시했다. 세 번째에서 승헌의 예측이 0.5초 앞서는 걸 봤다. 네 번째부터 지후는 승헌의 말을 따랐다. 말없이.
중위 6체 클리어. S급 1명과 마켓 아이의 조합은 예상보다 효율적이었다.
대답 대신, 승헌은 회랑 끝을 봤다. 붉은 조명 아래에서 보스가 움직이고 있었다. 철갑 거인. 다른 몸스터의 2배 크기. 핵이 가슴 중앙에 있었다. 마켓 아이가 위치를 읽었다.
“3초 후 오른팔. 그 다음 왼발.”
지후가 승헌을 봤다. 1초. 그리고 움직였다. 승헌의 말대로. 오른팔. 왼발. 핵 위치가 드러났다.
“지금.”
지후가 검을 꼽았다. 보스의 핵이 파괴됐다. 클리어.
회랑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금속 바닥에 몸스터의 체액이 흡러들어가고 있었다. 붉은 조명이 두 사람의 그림자를 길게 드리웠다.
지후가 검에 묻은 체액을 털었다. 그리고 승헌을 봤다.
“네가 지휘하고, 내가 베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어.”
“뭐입니까?”
“넌 직접 벨 수 있는 놈이야. 아까 봄잖아. C급 검으로 B급 관절을 끊는 놈이 어딘 있어. 근데 왜 내 뒤에 서서 숫자를 불러?”
“지금은 검보다 계산기가 더 강력하니까요.”
지후의 표정이 굳었다.
“그건 헌터의 답이 아니야.”
“헌터의 답이 아니어도 됩니다. 경영자의 답이니까요.”
“헌터는 사냥꿼이야. 기업가가 아니라.”
“사냥꿼은 먹잇감 하나를 잡죠. 기업가는 사냥터를 삽니다.”
지후가 승헌을 봤다. 5초간. 붉은 조명 아래에서 지후의 눈이 빛났다. 분노도 동의도 아니었다. 인정하지 않는 사람의 눈이었다.
그리고 고개를 저었다.
“언젠가 네 생각이 틀렸다는 걸 알게 될 거야.”
“그날이 오면, 다시 이야기합시다.”
지후가 돌아섰다. 세 걸음을 걷다가 멈겷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B급 승격 서류. 내 서명 넣어줄게.”
지후가 떠났다. 발소리가 금속 바닥에 울리다가 멀어졌다. 승헌은 그 뒷모습을 봤다. 전생에서 지후는 대균열에서 승헌을 막았다. 그리고 승헌은 지후를 지키지 못했다. 이번 생에서는 다르게 끝내야 한다.
‘언젠가 네 생각이 틀렸다는 걸 알게 될 거야.’ 지후의 말이 회랑에 울렸다.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날이 오기 전에, 할 일이 있다.
▶ 철의 회랑 출구.
승헌은 던전 입구에 서서 은설에게 전화했다.
“클리어했습니다. B급 공략 실적 확보. 지후 씨가 서명 제공합니다.”
“HMB에 재심사 신청서 바로 넣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하나 더.”
“네.”
“백호 길드의 최근 3분기 재무제표를 구할 수 있습니까?”
은설이 2초간 침묵했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왜요?'라고 물었을 것이다. 은설은 묻지 않았다.
“백호 채굴팀과 3개월 함께 일했습니다. 루트가 하나 있습니다.”
“부탁합니다.”
전화를 끊었다.
▶ 2시간 후. 이카루스 사무실.
은설이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비공개 자료. 백호 길드 최근 3분기 재무제표.
승헌은 한 장 한 장 넘겼다. 숫자를 읽었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재무제표의 숫자들은 백호 길드의 상황을 말해주고 있었다. 전생에서 백호는 S급 길드였다. 한기범이라는 남자가 주먹으로 잡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백호는 전생의 백호보다 약하다. 한기범이 늘었고, 길드는 약해졌다. 시간이 흔든 것이다.
부채비율 280%. 주력 S급 헌터 3명 계약 만료 임박. 제주 블랙 존 채굴 수익 적자 전환. 신규 던전 공략 실적 하락.
마켓 아이가 수치를 종합했다.
백호 길드 적대적 M&A 3대 조건 재평가:
주가 저평가 ✅ — EBITDA 대비 주가 30% 할인 상태.
낮은 대주주 지분 ✅ — 한기범 개인 지분 22%. 나머지 분산.
도덕적 흠결 ⬜ — 현재 확인 불가.
세 가지 중 두 가지.
승헌은 재무제표를 내려놓았다. 사무실 창밖으로 서울이 보였다. 어딘가에 백호 길드 본사가 있다. 22층. 로비의 대리석 엠블럼. 14화에서 받았던 압력. 한기범의 눈.
이카루스는 첫 번째 사냥이었다. 연습이었다.
백호가 두 번째다.
그리고 이번에는, 검도 계산기도 둘 다 쓴다.
HMB에서 문자가 왔다.
[이카루스 길드 등급 재심사 접수 완료. 심사 결과: B급 승격 승인.]
B급.
승헌은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부채비율 340%의 C급 파산 직전 길드를, 3개월 만에 B급 흑자 길드로 바꿨다.
밸류업 완료.
다음 단계: 백호 길드 장악. 백기사 위장 진입. 적대적 M&A.
마켓 아이가 마지막 수치를 올렸다.
백호 길드 지분 매집 개시 최적 시점: 2주 후. 블랙 먼데이 포지션 대비 잔여 기간: 22개월.
인수 전쟁 시작까지: 2주.
나는 멈추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