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의 첨탑은 지나치게 고요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구름 아래는 전쟁의 잔해가 자욱했다. 이곳의 공기는 서늘할 정도로 맑았다. 연우는 화려한 금색 자수가 놓인 소매 끝을 만지작거렸다. 손등의 피부가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환영의 장갑이 에테르를 강제로 쥐어짜는 탓이었다. 평민의 신체는 본래 마력을 담지 못했다. 깨진 독에 물을 붓듯 생명력이 빠져나갔다. 그는 책상 모서리를 꽉 움켜쥐었다.
낙인이 사라진 자리에는 희미한 흉터만 남았다. 카이델의 심박이 멈췄던 그날 모든 감각이 끊어졌다. 피의 계약은 주인이 사라짐과 동시에 힘을 잃었다. 연우는 이제 제국의 유일한 통치자로 불렸다. 비단 옷감이 피부에 닿을 때마다 소름이 돋았다. 이것은 본래 제 것이 아니었다. 잿빛 하수구의 악취 대신 향료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공무를 집행하는 내내 등 뒤가 서늘했다. 누군가 가짜라고 손가락질하는 기분이었다.
집무실 책상 위에는 결재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에테르 결정석을 화폐로 사용하는 개혁안이었다. 하층민에게 생존세를 감면한다는 조항에 펜을 멈췄다.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려 잉크 한 방울이 번졌다. 검은 얼룩이 서류 위로 보기 싫게 퍼져나갔다. 중요한 법령 위에 오점을 남긴 자신이 한심했다. 손톱 정월로 손바닥을 강하게 눌렀다. 통증이 밀려오자 비로소 정신이 맑아졌다. 자신은 여전히 왕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는 대역이었다.
카이델은 죽지 않았다. 아니, 죽은 것과 다름없는 상태로 발견되었다. 모든 기억을 잃은 채 잿빛 하수구에서 깨어났다고 했다. 그는 더 이상 폭군도 제국의 태양도 아니었다. 이름 없는 평민으로 돌아가 살아가고 있었다. 시안은 그를 모른 척해야 한다고 매일같이 속삭였다. 제국의 안정을 위해 왕은 죽은 것으로 처리되었다. 대신 대역이었던 연우가 진짜 왕의 자리를 계승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대로 새롭게 쓰였다.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작은 발소리가 카펫 위를 가로질러 다가왔다. 연우는 반사적으로 표정을 갈무리하며 고개를 들었다. 연희가 하얀 드레스 자락을 붙잡고 서 있었다. 아이의 눈은 이제 앞을 보지 못해도 빛이 났다.
"오빠, 여기서 좋은 냄새가 나."
연희가 허공을 더듬으며 가까이 다가왔다. 연우는 아이의 마른 어깨를 조심스레 감싸 안았다. 손끝에 닿는 비단 옷감이 낯설어 손가락을 말아 쥐었다. 아이의 체온이 닿자 차갑게 식었던 가슴에 온기가 돌았다. 연희가 내민 손바닥 위에 낡은 리본 하나가 놓였다. 색이 바래고 끝이 해진 붉은 천이었다. 연우의 호흡이 순간적으로 멎었다. 그것은 서약 도중 몰래 숨겼던 여동생의 유품이었다.
"어디서 났니, 연희야."
목소리가 힘없이 갈라져 나왔다. 연희는 해맑게 웃으며 리본을 가슴에 품었다. 정원에서 만난 아저씨가 주었다고 아이는 대답했다. 목 안쪽이 뜨거워지며 시야가 일렁였다. 서류의 글자들이 검게 뭉개져 보였다. 그는 내 이름을 지워주었지만 나는 그의 삶을 지워버렸다. 심장 부근이 누군가 쥐어짜는 듯 저릿했다. 자신이 누리는 이 청명한 공기가 전부 도둑질한 것 같았다.
연희를 내보낸 뒤 창가로 다가갔다. 태양의 첨탑 아래로 아스테리아의 전경이 펼쳐졌다. 지형적 계급을 타파하겠다는 약속은 이행 중이었다. 하수구 출신의 아이들이 높은 구역에서 뛰어놀았다. 그들은 더 이상 독기에 오염된 공기를 마시지 않았다. 창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저들 사이에 섞여 있을 한 남자를 떠올렸다. 폭군이라 불리며 제국의 모든 고통을 짊어졌던 남자였다.
기억을 잃고 평범한 삶을 얻은 것이 그에게 축복일까. 아니면 자신을 잊은 채 살아가는 것이 더 큰 형벌일까. 연우는 환영의 장갑 없이도 마법을 부리는 연기를 했다. 사실은 시안이 몰래 설치한 장치들 덕분이었다. 매일 밤 생명력이 깎여 나가는 감각에 진저리를 쳤다. 거짓의 왕좌는 가시방석보다 날카로웠다. 바람이 불어 창문이 가볍게 흔들렸다. 광장에 모인 인파 사이로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낡은 갈색 셔츠를 입은 덩치 큰 남자였다. 그는 아이들과 함께 흙바닥 위를 달리고 있었다. 제국의 정점에 서 있던 자라고는 믿기지 않는 모습이었다. 연우는 홀린 듯 유리창에 손을 올렸다. 닿을 수 없는 거리임에도 온기가 느껴지는 착각이 들었다. 그때 아이 하나가 넘어지자 남자가 몸을 숙였다. 아이를 일으켜 세우고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다정했다. 카이델에게서는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이었다.
그는 정말로 모든 것을 잊은 것 같았다. 연우를 보며 조롱하던 눈빛도 고통을 공유하며 웃던 광기도 사라졌다. 이제야 비로소 평화가 찾아왔다고 믿어야 했다. 하지만 가슴 한구석이 구멍 난 것처럼 시렸다. 우리가 나누었던 그 지독한 감각들은 어디로 갔을까. 남자가 돌연 고개를 들어 위를 보았다. 수백 미터 상공에 있는 태양의 첨탑을 정확히 겨냥했다. 연우는 숨을 들이키며 몸을 뒤로 물렸다.
거리가 멀어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터였다. 그럼에도 심장이 조여드는 압박감은 여전했다. 시선이 허공에서 맞물린 듯한 착각이 일었다. 남자의 눈동자가 햇빛을 받아 기묘하게 번뜩였다. 기억을 잃은 평민의 눈이라고 하기엔 지나치게 날카로웠다. 연우는 마른침을 삼키며 창틀을 꽉 붙잡았다.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소름이 돋아났다. 남자의 입꼬리가 서서히 말려 올라갔다.
그것은 다정한 평민의 미소가 아니었다. 연우를 구석으로 몰아넣고 짓던 바로 그 미소였다. 상대의 공포를 탐닉하며 즐거워하던 포식자의 눈빛이었다. 카이델이 입술을 달싹이며 무어라 속삭였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으나 의미는 선명했다.
나의 대역.
그가 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팍을 가볍게 두드렸다. 낙인이 새겨져 있던 바로 그 자리였다. 카이델이 고개를 삐딱하게 꺾으며 기괴하게 웃었다. 남자는 성큼성큼 인파를 가로질러 첨탑 입구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가 지나가는 자리마다 사람들이 바다 갈라지듯 옆으로 비켜섰다. 연우는 떨리는 손으로 책상 밑의 비상종을 더듬었다.
"시안, 시안!"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굳게 닫혀 있던 집무실 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복도에는 경비병들의 쓰러진 그림자만 길게 늘어져 있었다. 계단을 밟고 올라오는 규칙적인 발소리가 고요한 정적을 깼다. 연우는 뒷걸음질 치다 차가운 벽에 등을 기댔다. 환영의 장갑에서 뿜어져 나온 푸른 빛이 위태롭게 깜빡였다. 문틈 사이로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지더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도 그 가짜 장갑을 끼고 있군."
카이델이 문지방을 넘으며 고개를 들었다. 기억을 잃었다던 남자의 눈에는 서늘한 이성만이 가득했다. 그는 품 안에서 붉은 낙인이 찍힌 구속구를 꺼내 바닥에 던졌다. 금속이 바닥에 부딪히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이제 진짜 왕이 돌아왔으니, 네 역할을 끝낼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