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라버니.
환청이 아니었다. 귓가를 간지럽히는 목소리는 서늘한 연회장의 공기를 가르고 뇌리에 박혔다. 잿빛 하수구의 습한 냄새가 섞인, 그리운 동생의 숨결이었다. 연우의 눈꺼풀이 잘게 떨렸다. 시야를 가득 채운 먼지 구름 너머로 괴물의 형상을 한 벨로스 공작이 보였다. 비대해진 근육 사이로 검붉은 에테르가 혈관처럼 꿈동거렸다. 공작의 비릿한 웃음소리가 고막을 할퀴었다.
왼손이 뜨거웠다. 환영의 장갑에 실금이 가며 그 틈으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평민의 육체는 이미 한계를 넘어서고 있었다. 등 뒤에서 서늘한 체온이 느껴졌다. 카이델이었다. 그의 긴 손가락이 연우의 손등을 덮었다. 맞물린 손가락 사이로 이질적인 박동이 전해졌다. 그것은 고통이자, 동시에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유일한 감각이었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하나로 겹쳐졌다. 붉은 낙인이 새겨진 가슴팍이 타 들어가는 듯한 작열감에 휩싸였다. 카이델의 숨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평소보다 거칠고 낮은 파동이었다. 그의 손바닥에서 흘러나온 에테르가 연우의 혈관을 타고 역류했다. 그것은 차가운 얼음물이 흐르는 듯한 감각이었다가, 이내 끓어오르는 용암으로 변했다.
공작이 바닥을 박차고 도약했다. 거대한 그림자가 머리 위를 덮쳤다. 연우는 도망치는 대신 카이델의 손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손바닥을 파고드는 손톱의 통증이 선명했다. 맞잡은 두 손끝에서 황금빛 섬광이 폭발했다. 그것은 제국의 역사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은, 불온하고도 아름다운 빛이었다.
우리는 누구의 노예도 아니다.
연우가 입술을 짓씹으며 내뱉었다. 목소리는 낮았으나 연회장 전체를 공명시켰다. 이 고통도, 이 운명도 우리가 선택한 것이다. 카이델의 입술이 연우의 귓가에서 호를 그렸다. 그의 눈동자에 서린 광기가 황금빛 마력과 섞여 기괴한 광채를 내뿜었다. 두 사람의 마력이 합일되는 순간, 공간이 비틀리는 소리가 들렸다.
공작의 가슴 한복판에 박힌 에테르 심장이 요동쳤다. 탐욕으로 부풀어 오른 그 심장은 순수한 빛의 파동을 견디지 못하고 균열을 일으켰다. 연우는 자신의 생명력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장갑 너머의 살점이 타들어 가는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손끝에 모인 빛의 화살이 공작의 심장을 꿰뚫었다.
거대한 굉음과 함께 공작의 신체가 뒤로 튕겨 나갔다. 검은 피가 분수처럼 솟구쳐 대리석 바닥을 적셨다. 무너져 내리는 괴물의 잔해를 보며 연우는 무릎을 꿇었다. 허파가 짓눌리는 듯한 압박감에 숨을 몰아쉬었다. 옆에 서 있던 카이델의 신체가 힘없이 기울어졌다. 그의 안색은 핏기를 잃어 투명할 정도로 창백했다.
카이델의 손이 연우의 뺨을 스쳤다. 얼음장보다 차가운 감촉이었다. 그의 몸 안에서 에테르가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있었다. 연우의 가슴에 새겨진 낙인이 미친 듯이 박동했다. 피의 계약이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주인이 죽으면 대역도 죽는다. 그러나 지금 느껴지는 공포는 자신의 죽음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카이델은 자신의 모든 마력을 연우에게 밀어 넣고 있었다. 그것은 명백한 자살 행위였다. 제국의 태양이라 불리는 남자가, 하수구 출신의 대역을 위해 소멸을 택하고 있었다. 연우의 눈앞이 흐릿해졌다. 눈 안쪽이 뜨거워지며 시야가 일그러졌다. 안 돼. 입술 밖으로 나오지 못한 비명이 목구멍에 걸렸다.
연우는 떨리는 손으로 카이델의 멱살을 잡았다. 그의 가슴 위에 손을 얹고 기억의 심연을 더듬었다. 망각의 서약. 자신의 이름과 과거를 지워버린 그 저주받은 계약의 실타래가 머릿속에서 엉켜 있었다. 이것을 역으로 풀어내야 했다. 서약을 해지하는 대가는 영혼의 파편을 내놓는 것이라 들었다.
손가락 끝에서 검은 실 가닥 같은 마력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카이델의 심장을 감싸 안으며 파고들었다. 뇌가 바늘로 찔리는 듯한 통증이 몰려왔다. 자신의 진짜 이름이, 동생과의 추억이, 낡은 리본의 감촉이 하나둘 휘발되는 감각이 생생했다. 기억이 지워지는 자리에 카이델의 차가운 체온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연우의 코에서 검은 피가 툭, 툭 떨어졌다. 바닥에 고인 피가 황금빛 마력과 섞여 기묘한 무늬를 그렸다. 1화에서 떨어뜨렸던 여동생의 낡은 리본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것마저 잊어서는 안 된다는 강박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하지만 카이델의 심장 박동은 점점 느려지고 있었다.
조금만 더. 연우는 어금니를 꽉 눌렀다. 잇몸에서 비릿한 피 맛이 났다. 서약의 매듭이 하나씩 풀릴 때마다 온몸의 신경이 끊어지는 듯한 발작이 일어났다. 카이델의 닫힌 눈꺼풀 아래로 눈동자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의 차가웠던 피부에 아주 미미한 온기가 돌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연회장 중앙에서 거대한 폭발이 다시 한번 일어났다. 공작의 시신에서 터져 나온 잔여 마력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천장의 거대한 샹들리에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추락했다. 굉음과 먼지가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연우는 본능적으로 카이델을 끌어안고 몸을 웅크렸다. 등 뒤로 날카로운 파편들이 박히는 감각이 무디게 느껴졌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사위가 정적에 잠겼다. 자욱한 먼지 사이로 달빛이 스며들었다. 연우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온몸의 뼈가 어긋난 듯한 통증이 전신을 지배했다. 품 안의 온기를 확인하려 손을 뻗었다. 하지만 손끝에 닿는 것은 차갑게 식어가는 비단 옷감뿐이었다.
연우는 고개를 숙여 카이델의 얼굴을 살폈다. 그의 눈은 여전히 감겨 있었다. 가슴에 귀를 가져다 댔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규칙적으로 귓가를 울리던 그 오만한 박동이 멈춰 있었다. 연우의 심장이 바닥 아래로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손끝이 파르르 떨리며 그의 흉부를 더듬었다.
자신의 가슴팍을 내려다보았다. 옷감 너머로 은은하게 빛나던 황금빛 낙인이 보였다. 그 빛이 마치 꺼져가는 촛불처럼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문양의 테두리부터 서서히 흐릿해지며 피부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것은 계약의 종말을 의미했다. 혹은, 그 이상의 파국을.
연우는 카이델의 뺨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제발. 떨리는 숨결이 그의 입술에 닿았으나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황금빛 문양이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 연우의 시야에 바닥에 떨어진 낡은 인형 하나가 들어왔다. 카이델의 방에 놓여 있던, 연희의 것과 똑 닮은 그 인형이었다.
인형의 머리 부분이 검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연우의 가슴에 남은 마지막 빛줄기가 명멸했다. 연우는 필사적으로 카이델의 이름을 부르려 입을 벌렸다. 그러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자신의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공백의 공포가 전신을 잠식했다.
연우는 카이델의 가슴 위에 머리를 묻었다. 정적 속에서 자신의 거친 숨소리만이 유령처럼 떠돌았다. 그때, 멈춰버린 카이델의 손가락이 아주 미세하게 경련했다. 그것은 살아나려는 몸부림인지, 아니면 죽음 뒤의 사후 경직인지 알 수 없었다. 연우는 감각이 마비되어가는 손으로 그의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멀리서 구두 소리가 들려왔다. 규칙적이고 느릿한,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였다. 연우는 고개를 돌릴 힘조차 없었다. 그저 카이델의 심장이 다시 뛰기만을 바라며 텅 빈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발자국 소리가 바로 등 뒤에서 멈췄다. 서늘한 그림자가 연우와 카이델의 위로 길게 드리워졌다.
죽은 줄 알았나?
익숙하면서도 낯선 목소리가 뒤통수에 꽂혔다. 연우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것은 카이델의 목소리였으나, 품 안에 누워 있는 남자의 입술은 여전히 굳게 닫혀 있었다. 연우는 삐걱거리는 고개를 천천히 돌려 등 뒤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카이델과 똑같은 얼굴을 한 남자가 서 있었다.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깨끗한 예복 차림이었다. 남자는 바닥에 쓰러진 카이델을 내려다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그의 손에는 연우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연희의 낡은 리본이 들려 있었다.
남자가 허리를 숙여 연우의 턱을 잡아 올렸다.
고생했다, 나의 대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