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천장 사이로 잿빛 먼지가 폭포처럼 쏟아졌다. 비명이 고막을 찢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태양의 첨탑을 지탱하던 거대한 기둥들이 맥없이 고개를 꺾었다. 화려했던 연회장은 순식간에 시신과 비명이 뒤섞인 도살장으로 변했다. 공기는 비릿한 피 냄새와 타버린 에테르의 악취로 가득 찼다. 사람들은 출구를 향해 짐승처럼 엉겨 붙어 기어갔다.
연우는 바닥을 짚은 손끝으로 전해지는 진동을 느꼈다. 지면이 살아있는 생물처럼 꿈틀대며 비명을 질렀다. 저 멀리서 거대한 그림자가 일렁였다. 심장을 관통당하고도 죽지 않은 벨로스 공작이었다. 그의 육체는 이제 인간의 형상을 완전히 잃어버린 상태였다. 등 뒤로는 뒤틀린 뼈대가 날개처럼 돋아났고, 피부는 검게 괴사하여 부풀어 올랐다. 괴물이 내딛는 발걸음마다 대리석 바닥이 모래알처럼 바스러졌다.
입안에서 비릿한 액체가 울컥 배어 나왔다. 연우는 소매로 입가를 훔쳤으나 검은 얼룩은 점점 더 커질 뿐이었다. 목 안쪽이 타들어 가는 감각에 숨이 막혔다. 옆에서 자신을 부축하던 카이델의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의 가슴팍 역시 연우와 같은 위치에서 검은 피로 젖어 들었다. 고통을 공유하는 낙인이 맥박에 맞춰 붉게 점멸했다. 카이델의 안색은 종잇장처럼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발소리가 들렸다. 무너진 잔해 너머에서 그림자 하나가 빠르게 다가왔다. 시안이었다. 그의 옷소매는 여기저기 찢기고 검댕이 묻어 엉망이었다. 시안은 연우의 앞에 멈춰 서더니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은색으로 빛나는 얇은 금속 제구였다.
“이걸 찾으려다 늦었어.”
시안의 손바닥 위에 놓인 것은 4화에서 잃어버렸던 환영의 장갑 여분이었다. 왕실의 문장이 선명하게 새겨진 장갑은 차가운 빛을 내뿜고 있었다. 연우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저 장갑을 다시 낀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것은 남은 생명력을 연료로 삼아 육체를 태우는 행위였다. 장갑의 실들이 혈관을 파고들어 에테르를 강제로 끌어낼 것이다.
벨로스 공작이 거대한 손을 휘둘렀다. 근처에 있던 기둥이 힘없이 부서지며 대피하던 사람들을 덮쳤다. 잿빛 하수구에서 올라온 어린 시종이 미처 피하지 못하고 잔해 아래 깔렸다. 아이의 작은 손이 허공을 긁다 이내 힘없이 늘어졌다. 그 모습이 별궁에 갇힌 여동생의 환영과 겹쳐 보였다. 연우의 손바닥이 손톱자국이 남을 정도로 강하게 말려 쥐어졌다.
“연우야, 안 돼. 저걸 끼면 네 몸은….”
카이델이 신음 섞인 목소리로 만류했다. 그의 눈동자에는 전례 없는 공포가 서려 있었다. 연우는 카이델의 손을 천천히 밀어냈다. 그리고 시안의 손바닥 위에 놓인 장갑을 집어 들었다. 차가운 금속의 촉감이 손가락 끝을 타고 전신으로 퍼졌다. 소름 끼치는 냉기가 척추를 타고 흘러내렸다.
장갑을 왼손에 끼워 넣었다. 미세한 기계 장치들이 작동하며 손목을 강하게 조여 왔다. 윽, 하는 신음이 절로 터져 나왔다. 장갑 안쪽에서 솟아난 가느다란 침들이 피부를 뚫고 신경계에 접속했다. 혈관 속을 흐르던 피가 역류하는 듯한 극통이 뇌를 난타했다.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가 다시 하얗게 점멸하기 시작했다.
“내 이름을 지우고 왕이 된 이유는 여동생을 위해서였어.”
연우가 한 걸음을 내디뎠다. 다리가 후들거렸으나 멈추지 않았다. 장갑을 낀 왼손에서 황금빛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공허했던 신체 내부로 감당할 수 없는 질량의 에테르가 밀려 들어왔다. 장기가 뒤틀리고 뼈마디가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연우는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강력한 힘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지금 이 장갑을 끼는 건 나의 백성들을 위해서다.”
괴물이 된 벨로스 공작이 연우를 향해 포효했다. 고막을 마비시키는 굉음과 함께 괴물의 거대한 손톱이 허공을 가르며 날아왔다. 연우는 피하지 않았다. 대신 왼손을 뻗어 그 거대한 공격을 정면으로 받아냈다. 황금빛 장벽이 허공에 펼쳐지며 금속음이 울려 퍼졌다. 충격 여파로 주변의 먼지들이 원형으로 비산했다.
장갑의 틈새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가죽이 타들어 가는 냄새와 살점이 익는 악취가 코를 찔렀다. 연우는 이를 악물었다. 잇새로 피가 섞인 침이 흘러내렸다. 카이델이 뒤에서 비틀거리며 무릎을 꿇었다. 연우가 겪는 과부하의 고통 절반이 그대로 그에게 전이된 탓이었다. 두 사람은 같은 박자로 신음하며 서로의 생명이 깎여 나가는 것을 느꼈다.
벨로스 공작의 눈동자가 기괴하게 뒤집혔다. 괴물은 자신의 공격이 막힌 것에 분노하며 다른 쪽 손을 휘둘렀다. 연우는 장갑의 출력을 최대로 높였다. 신성 모독이라 불리던 평민의 마력 조작이 실체화되어 폭발했다. 손등 위에 새겨진 검은 문양이 황금색으로 타오르며 맥동했다. 그것은 제국의 지형을 형상화한 에테르 지도였다.
“그만둬! 그러다간 네 영혼까지 다 타버릴 거야!”
시안이 절규하며 다가오려 했으나 접근할 수 없었다. 연우의 몸을 중심으로 거대한 마력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공기가 비틀리며 진공 상태가 형성되었다. 연우의 머리카락이 중력을 거스르고 허공으로 치솟았다. 눈동자는 이미 인간의 색을 잃고 눈부신 금색 광채로 가득 찼다.
연우는 자신의 의식이 서서히 흐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육체의 감각이 사라지고 오직 거대한 힘의 흐름만이 느껴졌다. 잿빛 하수구의 어둠 속에서 보았던 여동생의 눈물, 카이델의 서늘한 미소, 그리고 제국을 덮친 이 지옥 같은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다는 예감이 확실한 통증으로 다가왔다.
황금빛 에테르가 줄기줄기 뻗어 나가 괴물의 몸을 옥죄었다. 벨로스 공작의 육체가 빛의 밧줄에 묶여 비명을 질렀다. 괴물의 몸에서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오며 부풀어 올랐던 살점이 쪼그라들었다. 연우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 내어 주먹을 내질렀다. 거대한 빛의 기둥이 괴물의 흉부를 관통하며 하늘 높이 솟구쳤다.
태양의 첨탑 꼭대기까지 닿은 빛의 줄기가 구름을 찢어발겼다. 제국 전역에서 볼 수 있을 만큼 거대한 폭발이었다. 연우는 그 빛의 중심에서 자신의 존재가 지워지는 감각을 받아들였다. 장갑은 이미 과부하로 인해 붉게 달궈져 살점과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달라붙어 있었다.
같은 시각, 아스테리아 외곽의 비밀 은신처.
두꺼운 석벽으로 둘러싸인 침대에 누워있던 연희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의 가슴팍에 놓여있던 낡은 리본이 정체 모를 바람에 휘날려 바닥으로 떨어졌다.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소녀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서서히 치켜 올라갔다.
초점 없던 눈동자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연희의 눈동자 속에서 작은 불꽃이 일렁였다. 이내 그 불꽃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가더니 안구 전체를 황금빛으로 물들였다. 소녀는 상체를 일으켜 세우며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오라버니.”
연희의 입술이 가늘게 떨리며 나지막한 이름을 뱉었다. 그녀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황금빛 광채가 어두운 방 안을 대낮처럼 밝히기 시작했다. 벽면에 새겨진 고대 문자구들이 소녀의 빛에 반응하며 하나둘씩 공명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제국 그 누구도 가져보지 못한, 순수한 정화의 힘이었다.
소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창밖의 태양의 첨탑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