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줄을 누르는 서늘한 감촉에 턱끝이 절로 들렸다. 시안의 손등에 불거진 핏줄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소년의 맑았던 눈동자는 이제 탁한 광기로 얼룩져 제 빛을 잃었다. 비릿한 피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그의 옷자락에서 뚝뚝 떨어진 선혈이 바닥에 웅덩이를 만들었다.
연우는 등 뒤의 벽에 몸을 밀착했다. 손바닥 안의 열쇠가 살을 파고들 만큼 차가웠다. 이것은 잿빛 하수구에 남겨진 여동생에게 닿을 유일한 끈이었다. 시안의 단검이 목 피부를 살짝 긁고 지나갔다. 따끔한 통증과 함께 뜨거운 액체가 쇄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걸 주면, 네 동생은 죽어.”
시안의 목소리가 쇳소리처럼 긁혔다. 그는 열쇠를 쥔 연우의 손목을 부러뜨릴 듯 움켜쥐었다. 연우는 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떨림을 숨기려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공기의 흐름이 뒤바뀌었다.
그림자 속에서 검은 칼날이 튀어 나왔다. 그것은 시안이 아닌, 저 멀리 서 있던 카이델의 등을 겨냥하고 있었다. 공기 중을 가르는 날카로운 파공음이 귀를 찢었다. 카이델은 여전히 연기 속에 몸을 반쯤 담근 채 암살자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연우의 몸이 머리보다 먼저 움직였다. 시안의 팔을 밀쳐내고 앞으로 튀어 나갔다. 허파가 터질 듯한 숨 가쁨이 가슴을 옥죄었다. 시야가 붉게 점멸했다. 카이델의 넓은 등이 바로 눈앞에 다가왔다.
검은 칼날이 연우의 옆구리를 깊숙이 뚫고 들어갔다.
차가운 금속이 내장을 헤집는 감각에 숨이 턱 막혔다. 입안 가득 비릿한 철분이 고였다. 뒤를 돌아본 카이델의 눈동자가 평소보다 크게 벌어졌다. 그의 가슴팍에 새겨진 낙인이 붉게 타오르며 맥동했다.
카이델의 상체가 비정상적으로 꺾였다. 피의 계약은 잔혹했다. 대역인 연우가 입은 자상이 왕의 신체에도 동일한 감각을 새겼다. 카이델은 자신의 옆구리를 움켜쥐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손가락 사이로 붉은 온기가 배어 나왔다.
“연우!”
비명에 가까운 부름이 귓가를 울렸다. 연우는 바닥으로 고꾸라지며 환영의 장갑을 낀 손을 뻗었다. 장갑의 표면에 미세한 균열이 생기며 불길한 푸른 빛이 새어 나왔다. 생명력을 에테르로 치환하는 금기의 도구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심장 깊은 곳에서 황금빛 빛줄기가 터져 나왔다. 가슴의 붉은 낙인이 황금색으로 변하며 전신을 휘감았다. 고통이 순식간에 휘발되었다. 잘려 나간 혈관이 이어지고 으스러진 근육이 재생되는 기괴한 진동이 몸 안을 울렸다.
상처 부위에서 피어오른 황금색 에테르가 칼날을 밀어냈다. 암살자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뒤로 주춤거렸다. 연우는 바닥을 짚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방금 전까지 치명상이었던 자리에 흉터조차 남지 않았다.
장갑이 에테르의 과부하로 인해 박살 났다. 연우는 암살자의 손목을 낚아채 그대로 비틀었다. 뼈가 어긋나는 소리가 정적을 깼다. 암살자의 손에서 단검이 떨어졌다. 연우는 그의 가슴을 걷어차 벽으로 몰아붙였다.
손등에 핀 검은 문양이 황금빛과 섞였다. 기괴한 위압감이 전신에서 뿜어져 나왔다. 카이델은 비틀거리며 다가와 암살자의 복면을 벗겼다. 드러난 얼굴을 확인한 왕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그는 제국에서 가장 충직하다고 칭송받던 기사단장이었다.
기사단장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피를 토해내며 카이델이 아닌 연우를 쏘아보았다. 증오와 슬픔이 뒤섞인 눈빛이었다. 그의 손가락이 바닥을 긁으며 흉측한 소리를 냈다.
“가짜가 폐하를 망치고 있다.”
기사단장은 울부짖으며 몸을 비틀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황실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이 깃들어 있었다. 그는 카이델이 평민 대역에게 마음을 주는 것을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제국의 질서가 무너지는 꼴을 보느니 차라리 왕을 죽이려 했던 것이다.
연우는 기사단장의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황금빛으로 변한 눈동자가 기사단장의 시선을 정면으로 맞받았다. 손바닥을 뚫고 나올 듯한 에테르의 박동이 전신을 지배했다.
“내가 가짜라면, 이 나라를 지키려는 내 의지도 가짜인가?”
연우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기사단장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연우는 그의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뜨거운 열기가 기사단장의 갑옷 너머로 전해졌다.
“왕은 혈통이 아니라 의지로 증명하는 것이다.”
그것은 카이델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연우는 자신의 존재가 단순히 누군가의 자리를 채우는 소모품이 아님을 선언했다. 기사단장은 대답 대신 마른 기침을 내뱉으며 눈을 감았다.
카이델이 연우의 어깨를 잡아당겨 일으켰다. 그의 손길은 거칠었으나 닿는 곳마다 미열이 남았다. 카이델은 연우의 상처가 있던 곳을 유심히 살폈다. 찢어진 옷 사이로 보이는 매끄러운 피부가 달빛을 받아 하얗게 빛났다.
“죽으려고 작정한 건가.”
낮은 속삭임에 연우는 고개를 저었다. 죽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처럼 살아있음을 강렬하게 느낀 적이 없었다. 황금빛 낙인이 심장 박동에 맞춰 은은하게 명멸했다.
성벽 너머에서 기괴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단순한 짐승의 것이 아니었다. 대기를 찢는 불쾌한 주파수가 고막을 자극했다. 연우와 카이델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성벽 위를 바라보았다.
먼지 구름이 일며 거대한 그림자가 솟아올랐다. 죽은 줄 알았던 벨로스 공작이었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더 이상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뒤틀린 근육 사이로 에테르 화살이 박혀 있었고, 피부는 검푸른 비늘로 덮여 있었다.
공작의 눈은 초점을 잃은 채 붉은 구멍처럼 뚫려 있었다. 에테르의 오남용으로 인해 인간의 이성을 잃고 변이된 괴물. 그는 성벽을 부수며 연우가 서 있는 곳으로 거대한 팔을 휘둘렀다.
석재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연우는 기사단장을 처단하려던 손을 멈추고 카이델의 앞을 가로막았다. 괴물이 된 벨로스 공작이 입을 벌리자 검은 독기가 안개처럼 쏟아져 나왔다. 그것은 망각의 습지대에서나 볼 법한 치명적인 가스였다.
“전하, 뒤로 물러나십시오.”
연우는 환영의 장갑이 사라진 맨손을 꽉 쥐었다. 살가죽을 뚫고 나오는 황금빛 에테르가 실핏줄을 타고 흐르며 기괴한 통증을 유발했다. 평민의 육체는 이 정도의 마력을 견딜 수 없게 설계되어 있었다.
괴물의 포효가 아스테리아의 밤을 찢어발겼다. 벨로스 공작의 일그러진 얼굴이 연우의 코앞까지 들이닥쳤다. 변이된 육체에서 풍기는 악취가 코를 찔렀다. 그는 이미 인간의 언어를 잊은 듯 짐승 같은 신음만을 내뱉었다.
카이델의 손이 연우의 허리를 강하게 낚아챘다. 거대한 손톱이 스치고 지나간 자리에 보도블록이 박살 나 파편으로 변했다. 연우는 반동을 이용해 공중으로 몸을 날렸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카이델의 고통 섞인 신음이 연우의 심장을 찔렀다. 자신이 힘을 쓸수록 계약으로 묶인 왕의 신체도 과부하를 견뎌야 했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지금 이 순간, 연우는 대역이 아닌 왕궁의 유일한 수호자였다.
황금빛 에테르가 연우의 발끝에 집중되었다. 그는 공중에 뜬 채로 벨로스 공작의 미간을 향해 강력한 발차기를 날렸다. 육중한 충돌음과 함께 괴물의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검푸른 피가 연우의 뺨에 튀었다. 뜨겁고 끈적한 감촉이 피부를 타고 흘러내렸다. 벨로스 공작은 분노에 찬 비명을 지르며 주변의 석상을 부수어 던졌다.
연우는 착지함과 동시에 카이델을 향해 손을 뻗었다. 왕의 눈동자에는 복잡한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공포와 경이, 그리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소유욕이 섞인 시선이었다.
“나를 보십시오, 전하.”
연우의 외침에 카이델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괴물이 다시 한번 거대한 몸집을 일으키며 그림자를 드리웠다. 달빛조차 가려진 어둠 속에서 벨로스 공작의 붉은 안광이 번뜩였다.
괴물이 된 공작의 가슴팍이 비정상적으로 부풀어 올랐다. 에테르를 압축해 발사하려는 징조였다. 연우는 자신의 전력을 끌어모았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박동하며 전신에 황금빛 문양이 새겨졌다.
“멈춰!”
카이델의 외침이 들렸지만 이미 늦었다. 연우의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온 황금빛 섬광이 어둠을 가르고 벨로스 공작의 심장을 향해 쇄도했다.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연회장 전체가 흔들렸다.
자욱한 먼지 속에서 연우는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입가에서 검은 피가 울컥 쏟아졌다. 환영의 장갑 없이 에테르를 방출한 대가였다. 시야가 흐릿해지며 카이델의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카이델이 연우의 몸을 안아 올렸다. 그의 가슴에서도 연우와 같은 위치에 검은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고통을 공유하는 계약은 죽음의 문턱까지 그들을 함께 밀어 넣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카이델의 목소리가 젖어 있었다. 그는 연우의 뺨을 타고 흐르는 피를 떨리는 손가락으로 닦아냈다. 연우는 힘겹게 눈을 뜨고 왕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태양의 첨탑 위에서 보았던 그 어떤 보석보다 카이델의 눈동자가 선명했다.
먼지 구름 너머에서 벨로스 공작의 거대한 손이 다시 한번 움직였다. 심장이 꿰뚫렸음에도 괴물은 죽지 않았다. 오히려 더 거대하고 흉측한 형상으로 몸을 불리며 두 사람을 덮쳐왔다.
변이된 괴물이 연우의 목을 향해 거대한 손톱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