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 끝이 서늘한 책상 모서리를 훑었다. 들이마신 공기에는 오래된 종이 냄새와 이름 모를 향료의 잔향이 섞여 있었다. 태양의 첨탑 최상층에 위치한 카이델의 집무실은 정적만이 고여 있었다. 가슴 중앙의 낙인이 이따금 맥박에 맞춰 뜨겁게 달아올랐다. 단검으로 스스로를 찔렀던 감각은 아직도 생생한 통증으로 남아 전신을 휘저었다. 피의 계약은 죽음조차 허락하지 않은 채 연우를 다시 이 화려한 감옥으로 불러들였다.
환영의 장갑을 낀 손이 잘게 떨렸다. 장갑 표면의 미세한 균열 사이로 검은 마력이 실핏줄처럼 새어 나오고 있었다. 연우는 책상 위의 서류들을 거칠게 뒤적였다. 시안이 말했던 제국의 비밀과 연희를 구할 단서가 이 어둠 속에 숨겨져 있어야 했다. 서랍 깊숙한 곳에서 낡은 양피지 뭉치가 손에 잡혔다. 그것을 꺼내려던 순간 어깨 부근의 살갗이 타들어 가는 듯한 작열감에 휩싸였다.
셔츠 단추를 풀어 헤치자 거울 속의 자신이 보였다. 카이델이 핥았던 상처 부위가 기괴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단순한 흉터라고 믿었던 흔적이 꿈틀거리며 기하학적인 문양으로 변했다. 그것은 제국의 지형을 정교하게 축소해 놓은 에테르 지도였다. 오직 황실의 직계 혈통만이 몸에 새길 수 있다는 금기의 이정표가 평민인 자신의 살점 위에 떠올랐다.
지도의 중심부가 황금빛으로 점멸했다. 연우의 시야가 급격히 뒤틀리며 주변의 풍경이 녹아내렸다. 정신이 거대한 소용돌이에 휘말려 어딘가로 거세게 끌려 내려갔다. 차가운 바닥의 감촉이 뺨에 닿았다. 눈을 떴을 때 연우는 더 이상 집무실에 있지 않았다. 사방이 가로막힌 좁고 습한 방 안이었다.
어린아이의 밭은 신음이 들려왔다. 방구석에 웅크린 작은 그림자가 보였다. 어린 시절의 카이델이었다. 그의 주변으로는 통제되지 않은 에테르가 날카로운 칼날처럼 휘몰아치고 있었다. 아이의 손등은 이미 피투성이였다. 카이델은 자신의 마력을 억지로 몸 안으로 밀어 넣으며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벽 너머에서 낮은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하수구 구역의 정화 작업에 관한 대화였다. 카이델이 마력을 방출할 때마다 고도가 낮은 빈민가의 독기가 강해진다는 내용이었다. 아이는 자신의 힘이 폭주할 때마다 누군가가 죽어 나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안에는 잿빛 하수구에 버려진 연우의 여동생, 연희의 이름도 섞여 있었다.
카이델은 비명을 삼키며 자신의 심장을 움켜쥐었다. 에테르를 억제하는 고통은 육신을 갈기갈기 찢는 것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소년은 멈추지 않았다. 스스로의 생명력을 갉아먹으며 제국의 동력을 차단하고 있었다. 연우는 그 처절한 희생을 보며 목 안쪽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폭군이라 믿었던 남자의 이면에는 피비린내 나는 배려가 고여 있었다.
기억 속의 카이델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허공을 응시하는 그의 눈동자가 현재의 연우를 꿰뚫는 듯했다. 소년의 입술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으나 의미는 파동이 되어 뇌리에 박혔다. 네가 보는 모든 고통은 내가 선택한 것이다. 그러니 너는 그저 왕으로 군림해라.
환청 같은 목소리와 함께 환영이 깨졌다. 연우는 바닥을 짚으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집무실의 차가운 대리석 바닥이 현실을 일깨웠다. 뺨 위로 뜨거운 액체가 흘러내렸다. 닦아낼 새도 없이 등 뒤에서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림자 속에서 형체 하나가 소리 없이 솟아올랐다.
검은 옷을 입은 사내가 단검을 치켜들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며칠 전 복도에서 발견했던 벨로스 가문의 문장 조각이 쥐여 있었다. 암살자의 시선은 연우를 지나쳐 등 뒤의 침소로 향했다. 그곳에는 방금 전까지 연우와 고통을 공유하며 잠든 카이델이 있었다. 사내의 움직임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암살자의 정체는 카이델의 가장 가까운 곳을 지키던 근위대원이었다. 연우는 소리를 지르려 했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환영의 장갑이 부서지며 검은 마력이 팔을 타고 올라와 전신을 결박했다. 살기가 공기를 찢으며 카이델의 심장을 향해 낙하했다. 단검의 끝이 잠든 황제의 가슴팍에 닿기 직전이었다.
연우는 본능적으로 몸을 날려 암살자의 팔을 붙잡았다. 서늘한 금속의 감촉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암살자가 고개를 돌리자 가면 너머로 익숙한 눈매가 드러났다. 그는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 연우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대역은 이제 필요 없다.”
사내가 힘을 주자 단검이 연우의 어깨를 관통했다. 뜨거운 피가 솟구쳐 카이델의 얼굴 위로 흩뿌려졌다. 감겨 있던 황제의 눈이 번쩍 뜨였다. 붉게 충혈된 카이델의 눈동자에 암살자의 칼날과 피 흘리는 연우의 모습이 동시에 담겼다. 암살자는 멈추지 않고 다시 칼을 휘둘렀다.
연우는 고통을 집어삼키며 바닥에 떨어진 문장 조각을 움켜쥐었다. 날카로운 모서리가 손바닥을 찢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는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암살자의 발목을 향해 몸을 던졌다. 우드득, 뼈가 어긋나는 소리와 함께 집무실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무장한 병사들이 들이닥치기도 전, 카이델이 연우의 허리를 낚아채 뒤로 끌어당겼다. 황제의 손에 쥐인 검은 에테르가 암살자의 목을 단숨에 휘감았다. 방 안은 순식간에 피 냄새와 타오르는 마력의 향으로 가득 찼다. 카이델은 바들바들 떨고 있는 연우의 턱을 잡아 강제로 시선을 맞췄다.
“말했을 텐데. 내 허락 없이는 죽지도 말라고.”
카이델의 손가락이 연우의 상처 입은 어깨를 강하게 눌렀다. 비명이 터져 나오려는 순간, 암살자가 품 안에서 작은 구슬 하나를 꺼내 바닥에 내던졌다. 고막을 찢는 듯한 굉음과 함께 자욱한 연기가 방 안을 뒤덮었다. 연우는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카이델의 손을 놓치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연기 너머에서 암살자의 목소리가 멀어지며 들려왔다. 벨로스 공작이 기다리고 있다는 짧은 전언이었다. 카이델의 신형이 연기를 가르고 앞으로 튀어 나갔다. 홀로 남겨진 연우는 바닥을 기어 겨우 벽을 짚고 일어섰다. 손바닥에 박힌 문장 조각이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그때, 발치에서 무언가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암살자가 놓치고 간 작은 금속 열쇠였다. 연우는 본능적으로 그것이 연희가 갇힌 지하 감옥의 열쇠임을 직감했다. 떨리는 손으로 열쇠를 집어 들려는 찰나, 닫혀 있던 비밀 통로에서 시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옷은 온통 피로 젖어 있었고 눈동자에는 알 수 없는 광기가 서려 있었다.
시안은 연우의 손에 든 열쇠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는 천천히 다가와 연우의 앞에 멈춰 섰다. 차가운 금속음이 정적을 깼다. 시안이 자신의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아 연우의 목에 겨누었다.
“그 열쇠, 내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