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지하 감옥의 공기는 매캐한 잿가루와 비린 철분 냄큼으로 가득했다. 연우는 손바닥으로 거친 벽면을 짚으며 비틀거렸다. 방금 전까지 카이델의 폭주와 공작의 비명이 가득했던 의회 광장의 소음이 멀게만 느껴졌다. 환영의 장갑이 씌워진 손등이 타들어 가는 듯한 작열감에 떨렸다.
검은 피가 섞인 카이델의 숨결이 아직도 귓가에 남아 있었다. 연우는 가슴팍을 움켜쥐었다. 옷감 너머로 느껴지는 낙인의 박동이 불규칙했다. 카이델이 느끼는 고양감과 갈증이 신경줄을 타고 그대로 전이되었다.
“정신 차려, 연우야.”
익숙한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려왔다. 연우는 고개를 돌렸다. 그림자 사이로 시안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옷소매는 찢겨 있었고, 뺨에는 굳은 핏자국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시안은 연우의 어깨를 붙잡아 지탱했다.
연우의 시선이 시안의 어깨 너머, 무너진 벽면의 한 구석에 머물렀다.
연희가 갇혀 있었다던 그 자리에 기괴한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뾰족한 돌로 긁어 만든 듯한 불규칙한 선들. 연우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그것은 단순한 낙서가 아니었다. 7화에서 시안이 의회 구석에서 자신에게 보냈던, 긴박한 수신호의 궤적과 완벽히 일치했다.
연우는 시안의 팔을 뿌리치고 벽면으로 다가갔다. 손가락 끝으로 파여진 홈을 더듬었다. 차가운 돌의 감촉이 지문 끝을 파고들었다.
“이거, 네가 남긴 거지.”
연우의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시안은 대답 대신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는 연우의 시선을 피하며 주변을 살폈다. 천장에서 떨어진 먼지가 발치에 쌓여 있었다.
“시안, 대답해. 네가 왜 여기 암호를 남겨? 여긴 연희가 있던 곳이잖아.”
연우의 손가락이 암호의 마지막 획에서 멈췄다. 그것은 ‘구조’가 아니었다. ‘말살’을 뜻하는 그림자 일족의 고어였다.
시안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항상 장난기 어린 빛을 띠던 그의 눈동자가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연우의 손을 잡아 벽에서 떼어냈다. 시안의 손바닥은 굳은살로 딱딱했다. 하수구에서 함께 구르던 시절의 부드러움은 찾아볼 수 없었다.
“공작의 첩자라고 생각했어? 아니면 카이델의 충견?”
시안이 낮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지하 통로의 벽을 타고 기분 나쁘게 공명했다. 그는 허리춤에서 낡은 단검 하나를 꺼내 들었다. 검신에는 제국에 의해 멸망했다고 알려진 ‘그림자 일족’의 문장이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연우는 뒷걸음질 쳤다. 발꿈치에 돌덩이가 걸려 몸이 휘청였다. 시안의 정체는 단순한 정보원이 아니었다. 그는 제국의 뿌리를 증오하며 살아남은 복수의 화신이었다.
“연우야, 난 왕도 공작도 믿지 않아. 내가 믿는 건 오직 우리 같은 하수구 쥐새끼들의 생존뿐이야.”
시안의 눈에 서린 서늘한 안광이 연우를 꿰뚫었다. 그는 단검 끝으로 무너진 천장을 가리켰다. 그 위에는 태양의 첨탑이, 제국의 오만한 권력이 군림하고 있었다.
“카이델은 널 도구로 써먹고 버릴 거야. 공작은 네 동생을 제물로 삼으려 했지. 그들 사이에서 우리가 살아남으려면, 이 판을 통째로 뒤엎어야 해.”
연우는 숨을 몰아쉬었다. 가슴의 낙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카이델의 분노가 느껴졌다. 왕궁 어딘가에서 카이델이 이 배신을 감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전신을 훑었다.
시안은 연우에게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그의 그림자가 연우의 발치를 덮었다. 시안은 품 안에서 작은 유리병 조각을 꺼냈다. 9화에서 연우가 독약이라고 믿으며 떨어뜨렸던, 푸른 액체가 묻은 병 조각이었다.
“이걸 기억해? 네가 그날 마시려 했던 거.”
연우의 눈이 커졌다. 그 독약 때문에 한동안 호흡이 가빠지고 시야가 흐려졌던 기억이 선명했다.
“그건 독이 아니었어. 카이델의 낙인이 네 영혼을 완전히 잠식하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중화제였지. 내가 널 죽이려 했다면, 굳이 이런 수고를 했겠어?”
시안의 손가락이 연우의 턱 끝을 들어 올렸다. 연우는 고개를 돌리려 했으나 시안의 힘은 완강했다.
“카이델의 피는 저주받았어. 그와 연결될수록 넌 인간이 아닌 무언가로 변해갈 거야. 네 손등에 핀 그 문양처럼.”
연우는 자신의 왼손을 내려다보았다. 환영의 장갑 틈새로 검은 안개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생명력을 갉아먹는 마법 도구가 한계에 다다랐다는 증거였다.
시안은 다시 벽면의 암호를 가리켰다. 이번에는 더 깊숙한 곳, 무너진 잔해 너머로 이어지는 좁은 틈새였다. 그곳에서는 희미하게 황금빛 인광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제국의 경제를 지탱하는 에테르 결정석이 어디서 나오는지 알아? 하수구 사람들의 수명을 갈아 넣어서 만든 태양의 물이 어디로 모이는지?”
시안의 목소리가 속삭임처럼 잦아들었다. 그는 연우의 귀에 입술을 바짝 붙였다.
“왕궁 지하 가장 깊은 곳. 저들이 숨겨온 ‘태양의 근원’이 바로 저 너머에 있어. 거기엔 네 동생을 살릴 진짜 방법도 있지.”
연우의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시안의 제안은 달콤하면서도 치명적이었다. 카이델을 배신하고 이 지옥 같은 연결을 끊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시안의 눈동자 속에 숨겨진 뒤틀린 욕망 또한 무시할 수 없었다.
연우는 무너진 벽면의 틈새를 응시했다. 황금빛 인광이 일렁이며 마치 자신을 부르는 듯했다. 카이델과의 계약, 동생의 생존,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 모든 것이 그 어두운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시안이 연우의 손을 잡아 끌었다.
“선택해, 연우야. 가짜 전하로 살다가 카이델과 함께 타 죽을 건지, 아니면 진짜 반역자가 되어 살아남을 건지.”
연우는 시안의 손을 꽉 쥐었다. 손바닥에 맺힌 땀이 축축하게 배어 나왔다. 그는 고개를 들어 시안을 보았다.
“가자.”
두 사람은 무너진 지하 감옥의 잔해를 헤치고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다.
한참을 기어 들어갔을까. 공기의 밀도가 달라졌다. 습하고 퀴퀴한 냄새 대신, 비현실적으로 맑고 농밀한 마력의 향취가 코끝을 찔렀다. 고도가 낮은 빈민가에서는 절대로 느낄 수 없는, 상층 귀족들만이 독점하던 청명한 공기였다.
통로의 끝에 다다랐을 때, 연우의 눈앞에 믿기지 않는 광경이 펼쳐졌다.
거대한 지하 공동 전체가 거대한 에테르 결정석 기둥들로 가득 차 있었다. 제국의 모든 부를 상징하는 결정석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왕궁의 지반을 지탱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 거대한 호수처럼 고여 있는 황금빛 액체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것은 ‘태양의 물’이었다. 제국이 신성시하며 귀족들의 수명 연장을 위해 사용하던 절대 자원의 원천.
하지만 연우의 시선을 끈 것은 자원의 화려함이 아니었다. 호수 한가운데, 수많은 쇠사슬에 묶인 채 떠 있는 투명한 구체였다. 그 안에는 한 소녀가 잠들어 있었다.
“연희야…….”
연우의 다리에 힘이 풀리며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구체 속의 연희는 창백한 얼굴로 눈을 감고 있었다. 그녀의 가슴팍에는 연우와 똑같은, 하지만 훨씬 더 거대하고 정교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소녀의 몸에서 뻗어 나온 에테르 줄기들이 지하의 모든 결정석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제국을 지탱하는 힘의 근원은 다름 아닌 연우의 동생이었다.
“이게 바로 제국의 비밀이야. 에테르 감응력이 없는 평민의 신체를 거대한 배터리로 사용하는 거지.”
시안의 목소리에는 분노와 희열이 동시에 섞여 있었다. 그는 단검을 치켜들며 호숫가로 다가갔다.
그때, 거대한 진동과 함께 지하 공동의 천장이 갈라졌다. 황금빛 에테르가 폭주하며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연우의 가슴에 새겨진 낙인이 찢어질 듯한 통증을 내질렀다.
연우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굴렀다. 카이델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헤집었다.
[찾았구나, 나의 작은 대역.]
폭발적인 수증기 사이로 검은 망토를 휘날리며 누군가 내려앉았다. 카이델이었다. 그의 눈동자는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손에는 이미 피가 낭자한 환영의 장갑 한 짝이 들려 있었다.
시안이 본능적으로 연우의 앞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카이델은 시안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연우만을 응시했다.
“감히 내 허락도 없이 내 창고에 발을 들이다니.”
카이델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가 발을 내디딜 때마다 바닥의 에테르 결정석들이 검게 부서져 내렸다. 그는 연우의 앞에 멈춰 서서 허리를 숙였다.
“연우야, 네 동생이 왜 저기 있는지 궁금하지 않아?”
카이델의 손이 연우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소름 끼치는 다정함에 연우의 신체가 뻣뻣하게 경직되었다. 카이델은 연우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저 아이가 제국을 먹여 살리고, 넌 나를 대신해 죽어가는 거야. 완벽한 형제지?”
카이델의 웃음소리가 공동 전체를 뒤덮었다. 연우는 절망적인 눈으로 구체 속의 연희를 바라보았다.
시안이 카이델을 향해 단검을 내질렀다. 하지만 카이델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손을 뻗어 시안의 목을 움켜쥐었다.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고요한 지하에 울려 퍼졌다.
“시안!”
연우가 소리치며 달려들려 했지만, 카이델의 다른 쪽 손이 연우의 가슴팍을 강하게 내리눌렀다.
“움직이지 마. 낙인이 터지면 저 아이도 죽는다.”
연우의 호흡이 멎었다. 카이델의 손바닥을 통해 전해지는 살기가 실질적인 압박이 되어 심장을 조여왔다.
카이델은 시안을 바닥으로 내팽개치고 연우의 턱을 잡아 올렸다. 그의 시선은 이제 연우의 눈동자 깊숙한 곳을 헤집고 있었다.
“이제 결정해. 저 아이를 죽이고 나와 함께 영원히 이 제국의 꼭대기에서 타락할 건지.”
카이델이 연우의 손에 자신의 단검을 쥐여주었다. 차가운 칼날이 연우의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아니면 저 아이와 함께 이 구역질 나는 곳에서 재가 될 건지.”
카이델의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연희를 감싸고 있던 구체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쏟아져 나오는 에테르의 압력이 연우의 전신을 짓눌렀다.
연우는 떨리는 손으로 칼자루를 고쳐 쥐었다. 시야가 붉게 번졌다. 카이델의 광기 어린 눈동자가 눈앞에서 일렁였다.
“죽여, 연우야.”
카이델이 속삭이며 연우의 손등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쳤다. 두 사람의 피가 칼자루를 타고 흘러내려 바닥의 황금빛 호수에 떨어졌다.
연우는 이를 악물고 단검을 치켜들었다. 그리고 그가 겨냥한 것은 연희의 구체가 아니었다.
자신의 가슴, 황금빛으로 박동하는 낙인의 중심이었다.
“전하, 틀렸어요.”
연우가 피 섞인 미소를 지으며 칼날을 자신의 심장으로 밀어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