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테리아의 의회 광장은 구름보다 높은 곳에 매달려 있었다. 희박한 공기가 폐부를 찌를 듯이 차갑게 파고들었다. 고도 인장이 없는 자들에게 이곳의 공기는 서서히 목을 조르는 밧줄과 다름없었다. 연우는 태양의 첨탑 아래 늘어선 대귀족들의 시선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제단 위에 섰다.
등 뒤에서는 카이델 3세의 시선이 닿고 있었다. 왕좌에 앉은 그의 무게감이 공기 중에 섞여 연우의 목덜미를 짓눌렀다. 가슴 중앙에 새겨진 낙인이 화끈거리며 열을 내뿜었다. 그것은 카이델이 느끼는 지루함과 가학적인 흥분을 연우의 신경계로 고스란히 전달했다.
벨로스 공작이 느릿한 걸음으로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 그의 손에는 작은 유리병 하나가 들려 있었다. 병 안에는 말라붙은 갈색 찌꺼기가 아주 조금 남아 있었다. 그것은 연우가 집무실에서 마셨던 찻잔에서 긁어낸 잔여물이었다.
공작의 인자한 미소 뒤로 탐욕스러운 안광이 번뜩였다. 그는 유리병을 들어 올리며 의회 의원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병의 목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제국 테라노스의 혈통은 에테르와 공명하는 성질을 지녔습니다."
공작의 목소리가 광장의 정적을 깨고 울려 퍼졌다.
"하지만 비천한 피는 고결한 에테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거부 반응을 일으키기 마련이지요."
연우의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장갑 속에서 손톱을 세워 정월 부분을 강하게 눌렀다. 손바닥을 파고드는 통증이 자아를 붙들 수 있는 유일한 끈이었다. 잿빛 하수구에서 보았던 동생의 눈먼 얼굴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공작은 연우를 향해 한 걸음 다가왔다. 그의 그림자가 발끝을 덮쳤다.
"피는 거짓말을 하지 않지. 저 비천한 쥐새끼의 피가 과연 황금색으로 빛날까?"
공작의 조롱 섞인 속삭임이 귓가를 긁었다. 왕실 학자들이 하얀 가운을 휘날리며 은반반 위에 검사 도구를 늘어놓았다. 투명한 수정판과 에테르 감응 시약들이 햇빛을 받아 불길하게 반짝였다.
연우는 옆자리에 선 카이델을 곁눈질했다. 그는 무심한 표정으로 턱을 괸 채 이 광경을 관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연결된 감각을 통해 카이델의 손가락이 의자 팔걸이를 강하게 움켜쥐고 있다는 사실이 전해졌다. 카이델의 손톱이 살점을 파고드는 감각이 연우의 손등에서도 똑같이 느껴졌다.
학자 중 한 명이 연우의 왼손을 잡아챘다. 환영의 장갑 위로 차가운 금속 바늘이 닿았다. 장갑의 표면이 미세하게 떨리며 에테르를 방출했다. 가짜 마력이 공기 중으로 흩어지며 연우의 생명력을 갉아먹었다.
연우는 입안의 여린 살을 짓씹었다. 비릿한 혈향이 혀끝을 감돌았다. 만약 이대로 피를 흘린다면, 에테르 감응력이 없는 평민의 신체가 그대로 드러날 터였다. 그것은 곧 연우와 연희의 죽음을 의미했다.
바늘이 장갑을 뚫고 피부를 파고들려는 찰나였다. 카이델이 자리에서 일어나 연우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의 긴 그림자가 연우를 완전히 덮었다. 카이델은 학자의 손을 거칠게 밀쳐내고 연우의 손목을 직접 움켜쥐었다.
카이델의 손등에는 어젯밤 단검에 베였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그는 상처를 덮고 있던 붕대를 거칠게 뜯어냈다. 검게 변색된 피가 그의 손가락을 타고 흘러내렸다.
"내 형제의 피를 검증하겠다는데, 굳이 번거로운 절차를 거칠 필요가 있나."
카이델의 목소리에는 서늘한 살기가 서려 있었다. 그는 자신의 손목에서 흐르는 검은 피를 연우의 손등 위로 뚝뚝 떨어뜨렸다. 장갑의 찢어진 틈새로 카이델의 피가 스며들었다.
연우는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카이델의 검은 피가 자신의 살결에 닿는 순간, 가슴의 낙인이 타버릴 듯한 고통을 내뿜었다. 신체 내부에서 무언가 뒤틀리고 있었다. 5화에서 마셨던 독기가 혈관을 타고 역류하며 카이델의 피와 뒤섞였다.
벨로스 공작의 미소가 미세하게 경직되었다. 그는 학자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학자들은 떨리는 손으로 카이델의 피가 섞인 연우의 혈액을 수정판 위에 받았다.
수정판 위에 떨어진 액체는 기괴한 색을 띄고 있었다. 황금색도, 붉은색도 아니었다. 그것은 빛을 집어삼키는 칠흑에 가까웠다. 시약이 닿자마자 수정판에서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보라색 연기가 피어올랐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학자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수정판이 감당할 수 없는 열기를 내뿜으며 금이 가기 시작했다.
공작이 눈을 가늘게 뜨며 수정판으로 손을 뻗었다. 연우는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나려 했으나, 카이델이 그의 어깨를 강하게 붙들었다. 카이델의 손길은 구원인 동시에 족쇄였다.
갑자기 연우의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안구 뒤쪽에서 시작된 극심한 압박감이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장갑 속의 손가락 끝이 뜨겁게 달아오르더니, 이내 감각이 사라졌다.
수정판 위에 고여 있던 피가 돌연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액체의 움직임이라기보다 살아있는 생명체의 발악에 가까웠다. 칠흑색 혈액에서 검은 불꽃이 일렁이며 대기를 태웠다.
학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졌다. 검은 불꽃에서 뿜어져 나온 강렬한 섬광이 광장을 뒤덮었다. 연우의 혈관을 타고 흐르던 에테르가 폭주하며 환영의 장갑을 산산조각 냈다.
장갑의 파편이 허공으로 흩날렸다. 맨살이 드러난 연우의 손등에는 기괴한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것은 제국 그 어떤 가문에서도 본 적 없는, 심연의 형태를 닮은 문양이었다.
가장 가까이 서 있던 학자들이 눈을 움켜쥐며 바닥을 굴렀다. 그들의 손가락 사이로 검은 액체가 흘러내렸다. 검은 불꽃의 잔상이 그들의 망막을 태워버린 듯했다.
연우는 자신의 손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장갑이 없는데도 손끝에서 서늘한 마력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평민은 가질 수 없다던 힘이, 공허의 신체를 채우고 차올랐다.
벨로스 공작은 충격에 휩싸여 뒷걸음질 쳤다. 그의 인자한 가면이 완전히 부서져 내렸다. 공작의 입술이 경련하며 실낱같은 목소리를 내뱉었다.
"이건, 에테르가 아니야. 신성 모독이다."
연우는 공작의 말을 듣지 못했다. 귀 안쪽에서 거대한 파도 소리가 울려 퍼졌다. 카이델은 이 모든 아수라장을 지켜보며 연우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밀착시켰다.
카이델의 뜨거운 숨결이 소름 끼치게 번졌다. 그는 연우의 떨리는 어깨를 감싸 안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보아라, 네 안에서 깨어난 것이 무엇인지."
연우의 손등에서 피어오른 검은 안개가 공작의 발치를 감싸 안았다. 공작은 비명을 지르려 했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듯 컥컥거렸다. 연우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손을 뻗었다.
손가락 하나를 까닥이는 것만으로도 대기가 찢어지는 감각이 전해졌다. 연우의 눈동자가 금색과 흑색으로 기괴하게 번갈아 점멸했다. 이제껏 느껴본 적 없는 전능감이 공포를 잠식해 들어왔다.
카이델이 연우의 손을 맞잡았다. 그의 검은 피가 연우의 손등 문양 위로 스며들어 황금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심장 박동이 완벽하게 일치하며 광장 전체를 울렸다.
연우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아스테리아의 청명한 하늘이 검은 구름으로 뒤덮이고 있었다. 태양의 빛이 가려진 자리에 차가운 어둠이 내려앉았다.
공작은 바닥을 기며 의원석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를 도우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공포에 질린 채 왕좌 곁에 선 두 괴물을 응시할 뿐이었다.
연우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자신의 목소리인지, 혹은 낙인을 통해 들려오는 카이델의 목소리인지 알 수 없는 저음이 터져 나왔다.
"누가 비천하다고 했지?"
연우의 손끝에서 거대한 검은 화살이 형상화되었다. 그것은 벨로스 공작의 심장을 정확히 겨누고 있었다. 카이델은 연우의 손목을 부드럽게 뒤로 젖히며 시선을 맞췄다.
카이델의 눈속에는 광기 어린 환희가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연우의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주며 살며시 힘을 주었다.
"죽여라. 네 동생을 가둔 자의 숨통을 네 손으로 직접 끊어."
연우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화살 끝에 응축된 마력이 비명을 지르듯 진동했다. 공작의 눈에 생에 대한 처절한 갈망과 공포가 서렸다.
그 순간, 광장 너머에서 시안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우야, 안 돼."
연우의 시선이 흔들렸다. 화살의 끝이 미세하게 빗나갔다. 카이델의 표정이 순식간에 차갑게 식어 내렸다.
카이델은 연우의 목을 거칠게 움켜쥐어 자신을 보게 만들었다. 그의 손톱이 연우의 여린 피부를 파고들었다.
"집중해. 지금 멈추면 죽는 건 너와 네 동생뿐이다."
연우는 눈을 감았다. 감긴 눈꺼풀 너머로 검은 피가 눈물처럼 흘러내렸다. 손등의 문양이 심장 박동에 맞춰 점멸하며 온몸의 신경을 난도질했다.
공작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품 안에서 소형 에테르 포를 꺼내 들었다. 금속 총구가 연우의 미간을 정면으로 조준했다.
"괴물 새끼들, 전부 지옥으로 보내주마."
공작의 손가락이 트리거를 당겼다. 눈을 찌르는 백색 광선이 좁은 간격을 가로질렀다.
연우는 피하지 않았다. 아니, 피할 수 없었다. 카이델이 그를 껴안은 채 정면으로 광선을 마주 보았기 때문이었다.
섬광이 폭발하며 광장 바닥이 뒤집혔다. 자욱한 먼지 속에서 연우는 자신의 가슴을 관통하는 서늘한 감각을 느꼈다. 하지만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카이델이 입가로 검은 피를 울컥 쏟아내며 연우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낙인을 통해 전해지는 카이델의 고통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연우는 비명을 지르려 했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먼지가 걷히자 공작의 경악한 얼굴이 드러났다. 에테르 포의 총신은 녹아내려 있었고, 공작의 팔은 검은 안개에 잠식되어 형체를 잃어가고 있었다.
카이델이 피 섞인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동자는 이제 온전한 칠흑색이었다. 그는 연우의 뺨을 타고 흐르는 피 눈물을 손가락으로 닦아내며 속삭였다.
"이제 시작이야, 연우야."
카이델의 손이 연우의 가슴팍을 파고들었다. 가늘게 떨리던 연우의 신체가 뻣뻣하게 굳어졌다.
연우는 자신의 심장 근처에서 무언가 이질적인 것이 박동하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카이델의 마력이자, 동시에 제국을 멸망시킬 저주였다.
카이델은 연우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붙이고 마지막 명령을 내뱉었다.
"저 노인의 심장을 내게 가져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