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튼 사이로 스며든 달빛이 차가운 대리석 바닥 위로 길게 늘어졌다. 태양의 첨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카이델의 침소는 소름 끼칠 만큼 정적에 잠겨 있었다. 고도가 높은 이곳의 공기는 희박하고 건조하여 숨을 쉴 때마다 폐부가 따끔거렸다. 연우는 자신의 거친 숨소리가 누군가에게 들릴까 싶어 입술을 짓눌렀다. 손등에 착용한 환영의 장갑이 미세하게 진동하며 신경을 갉아먹었다.
방 안에는 기이할 정도로 짙은 침묵이 흘렀다. 연우의 시선이 화려한 장식장 구석에 놓인 낡은 물건 하나에 멈추었다. 그것은 이 방의 우아한 가구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초라한 헝겊 인형이었다. 때가 타고 실밥이 터져 나온 인형의 모습에 연우의 손끝이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아랫입술이 터질 듯 말려 들어갔고 목구멍 너머로 뜨거운 덩어리가 치밀어 올랐다.
연우는 홀린 듯 다가가 인형을 집어 들었다. 거친 천의 촉감이 손바닥에 닿자마자 잿빛 하수구의 비릿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인형의 가슴팍에는 빛바랜 붉은 실로 서투르게 수놓아진 작은 꽃문양이 있었다. 그것은 제국의 그 어떤 귀족 가문도 사용하지 않는, 오직 하수구의 성녀라 불리던 여인만의 표식이었다.
연우의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시야가 흐릿해지며 발끝부터 차가운 소름이 돋아났다. 어머니가 남긴 유일한 유품이자, 오래전 실종과 함께 사라졌어야 할 물건이 왜 이곳에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생살을 짓이겼다.
"허락 없이 물건에 손을 대는 건 나쁜 버릇인데."
등 뒤에서 들려온 낮은 목소리에 연우의 어깨가 딱딱하게 굳었다. 카이델은 언제 들어왔는지 문가에 기대어 연우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그림자가 바닥을 가로질러 연우의 발등까지 길게 뻗어왔다. 카이델의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도 기괴할 만큼 투명하게 빛났다.
연우는 천천히 몸을 돌려 그를 마주했다. 심장 부근의 낙인이 달궈진 인두처럼 뜨겁게 타올랐다. 카이델의 무심한 시선이 연우의 손에 들린 인형에 머물렀다. 그는 조용히 다가와 연우의 숨결이 닿을 거리에서 멈춰 섰다.
"그 인형이 그렇게 궁금한가?"
카이델의 손가락이 연우의 뺨을 스치듯 지나갔다. 차가운 체온에 소름이 끼쳐 연우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뒤로 물렸다. 손에 쥔 인형을 부서질 듯 움켜쥐며 연우는 쉰 목소리를 냈다.
"왜 우리 어머니의 인형이 네 침소에 있지?"
질문은 공중에서 허무하게 흩어졌다. 카이델은 대답 대신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약간 기울였다. 그의 입가에 걸린 희미한 미소가 연우의 이성을 날카롭게 긁어내렸다. 연우의 호흡이 점점 가빠졌고 환영의 장갑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기운이 혈관을 타고 올라왔다.
"네가 죽인 사람들의 전리품인가?"
연우의 목소리가 격하게 떨리며 갈라졌다. 가슴 안쪽에서 무언가 무너져 내리는 감각이 느껴졌다. 카이델은 여전히 침묵을 지키며 연우의 고통을 관찰했다. 그의 눈에는 일말의 죄책감도, 당혹감도 서려 있지 않았다.
연우는 허리춤에 매달린 단검을 뽑아 들었다. 서슬 퍼런 칼날이 카이델의 목줄기를 향해 번뜩였다. 금속의 서늘한 감촉이 공기를 갈랐다. 하지만 카이델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칼날을 정면으로 받아냈다.
"말해. 어머니를 어떻게 한 거지."
칼끝이 카이델의 피부에 닿아 얇은 핏줄기를 만들어냈다. 붉은 선이 그의 하얀 목을 타고 흘러내려 옷깃을 적셨다. 연우의 팔은 경련하듯 떨리고 있었지만 칼날만은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배신감과 의구심이 뒤섞여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카이델은 자신을 겨눈 칼날을 무심하게 내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은 상처보다 연우의 일그러진 표정에 더 깊이 머물렀다. 그는 천천히 손을 뻗어 연우의 손등 위를 덮었다. 장갑 너머로 느껴지는 카이델의 힘은 거부할 수 없을 만큼 압도적이었다.
"진실이 항상 구원이 될 거라 믿나?"
카이델의 목소리가 고막을 타고 눅진하게 스며들었다. 연우는 이를 악물며 칼에 힘을 주었다. 칼날이 살점을 조금 더 깊게 파고들었다. 카이델의 목에서 흘러나온 피가 연우의 손가락을 타고 미끄러졌다.
연우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가설이 소용돌이쳤다. 하수구를 짓밟고 가족을 앗아간 원수가 바로 눈앞의 남자일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전신을 지배했다. 동시에 인형을 이토록 소중히 보관해온 그의 의중을 가늠할 수 없어 혼란스러웠다.
낙인이 강하게 진동하며 연우의 시야가 붉게 점멸했다. 카이델이 느끼는 기묘한 고양감이 계약을 타고 연우의 신경계로 흘러들어왔다. 그는 지금 이 상황을, 자신을 죽이려는 연우의 살의를 진심으로 즐기고 있었다.
연우는 구토감을 느끼며 고개를 저었다. 카이델의 손이 연우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그것은 위로보다는 포식자의 낙인에 가까운 행위였다. 카이델의 엄지손가락이 연우의 맥박 위를 느릿하게 문질렀다.
"너는 아무것도 모르는군."
카이델이 속삭이며 얼굴을 가까이 밀착했다. 그의 숨결이 연우의 입술 위로 흩어졌다. 연우는 눈을 질끈 감으며 단검을 쥔 손에 마지막 힘을 실었다. 죽이고 싶었다. 아니, 그에게서 도망치고 싶었다. 이 지옥 같은 연결고리를 끊어내고 싶다는 갈망이 폭사했다.
순간 카이델이 움직였다. 그는 피하거나 막는 대신, 자신의 긴 손가락으로 날카로운 단검의 칼날을 그대로 움켜쥐었다. 금속이 살을 파고드는 소름 끼치는 마찰음이 고요한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연우의 눈이 경악으로 크게 떠졌다. 칼날을 쥔 카이델의 손가락 사이로 액체가 울컥 쏟아져 내렸다. 하지만 그것은 방금 전 목에서 흘러나왔던 선명한 붉은색이 아니었다.
대리석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는 것은 점성이 강한 칠흑색 액체였다. 2화에서 연우가 지독한 통증과 함께 토해냈던 것과 똑같은, 불길하고 탁한 검은 피였다. 카이델의 손바닥을 타고 흘러내린 검은 혈액이 연우의 하얀 소매를 검게 오염시켰다.
연우의 손이 힘없이 풀리며 단검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챙그랑, 하는 금속음이 정적을 깼다. 카이델은 상처 입은 손을 펴 보이며 기괴하게 뒤틀린 미소를 지었다.
"이제 알겠나, 우리가 무엇을 나누고 있는지."
카이델이 검게 젖은 손으로 연우의 뺨을 거칠게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