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의 첨탑 상층부는 공기가 희박했다. 고도가 높은 이곳의 숨결은 귀족의 전유물이었다. 벨로스 공작은 폐부를 찌르는 서늘한 냉기를 삼켰다. 옥좌의 팔걸이를 쓸어내리는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금빛으로 세공된 태양 문양이 손바닥을 자극했다. 텅 빈 알현실에는 오직 그의 구둣발 소리만이 울렸다.
카이델 3세는 자취를 감춘 지 오래였다. 대역이라 의심하던 자의 행방도 묘연했다. 공작은 받침대 위의 가시 면류관을 보았다. 날카로운 금속 끝에 맺힌 빛이 눈동자에서 번뜩였다. 제국의 정점은 이제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었다.
왕실의 상징을 머리에 올리려던 순간이었다. 웅장한 청동문이 거칠게 열리며 바닥을 긁었다. 비릿한 혈향이 청명한 공기를 단숨에 더럽혔다. 시안이 문턱에 기대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가슴팍은 갈가리 찢겨 검붉은 피로 젖어 있었다. 대리석 바닥에 뚝뚝 떨어지는 액체가 궤적을 그렸다.
공작의 눈썹이 비스듬하게 치켜올라갔다. 시안은 고개를 들어 공작의 탐욕스러운 얼굴을 보았다.
왕은 죽지 않았습니다.
시안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낮았으나 확신에 찼다. 공작의 손에 들린 면류관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시안은 입가에 고인 피를 손등으로 거칠게 닦아냈다. 비릿한 웃음이 그의 창백한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다만 당신이 알던 그 나약한 인간이 아닐 뿐이죠.
공작은 면류관을 다시 받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그는 우아한 걸음걸이로 시안에게 다가갔다. 구둣발이 피웅덩이를 밟으며 기분 나쁜 소리를 냈다. 공작은 시안의 턱을 잡아 강제로 들어 올렸다. 시안의 눈동자 속에는 여전히 생존 본능이 번뜩였다.
연우의 여동생은 이미 안전한 곳으로 옮겼습니다.
시안이 내뱉은 말에 공작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것은 공작이 가장 먼저 확보하려 했던 인질이었다. 공작은 시안의 목을 조르듯 힘을 주어 압박했다. 숨막히는 침묵이 알현실의 공기를 무겁게 짓눌렀다. 잿빛 하수구 출신답게 목소리에 쇳소리가 섞였다.
거짓말은 서투르구나.
공작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갑고 날카로웠다. 그는 시안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밀착시켰다. 광장에서 보냈던 그 은밀한 수신호를 잊었느냐 물었다. 시안의 어깨가 눈에 띄게 경직되며 떨리기 시작했다. 공작은 시안의 상처 입은 옆구리를 구둣발로 짓이겼다.
비명이 터져 나오려 했으나 시안은 입술을 물었다. 잿빛 하수구 출신다운 지독한 인내심이었다. 공작은 품 안에서 에테르 단검을 꺼내 들었다. 푸른 빛을 내뿜는 칼날이 시안의 목줄기에 닿았다. 서늘한 금속의 감촉에 시안의 목울대가 크게 출렁였다.
진실을 말하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목을 치겠다.
공작의 위협에도 시안은 흐릿해지는 정신을 붙들었다. 그는 연우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연우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직감했다. 낙인을 통해 전해지는 고통이 시안의 감각을 깨웠다. 지하 깊은 곳에서부터 기묘한 진동이 시작되었다.
태양의 첨탑 전체가 거대한 생명체처럼 꿈틀거렸다. 공작은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벽면에 박힌 에테르 결정석들이 일제히 공명했다. 소름 끼치는 금속음이 고막을 사정없이 찔러댔다. 연우는 차가운 지하실 바닥에서 몸을 떨었다.
가슴에 새겨진 황금빛 낙인이 살을 태우듯 뜨거웠다. 카이델의 존재가 신경 줄을 타고 머릿속에 박혔다. 두 사람의 의식이 하나의 선 위에서 뒤섞였다. 환영의 장갑이 부서지며 검은 연기를 내뿜었다. 연우의 손등에는 기괴한 문양이 핏줄처럼 솟았다.
평민의 몸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고귀한 힘이었다. 하지만 카이델의 생명력이 그의 빈껍데기를 채웠다. 연우는 바닥을 짚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동자는 이미 인간의 색을 잃고 금색으로 빛났다. 카이델의 분노와 연우의 절망이 하나로 융합되었다.
두 사람의 심장 박동이 완벽한 대칭을 이루었다. 알현실의 바닥이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갈라졌다. 눈부신 황금빛 에테르가 분수처럼 솟구쳐 올랐다. 공작은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가리고 뒤로 물러났다. 시안은 그 빛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림자를 보았다.
먼지구름 속에서 서서히 드러난 형체는 기괴했다. 연우의 육신이었으나 그 위로 카이델이 겹쳐졌다. 두 존재의 목소리가 겹쳐지며 공간을 산산조각 냈다. 인간의 것이라 믿기 힘든 거대한 포효가 터졌다. 공작의 고도 인장이 열기에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네가 감히 나의 왕좌를 넘보는가.
공작은 단검을 떨어뜨린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황금빛 빛줄기가 그의 고도 인장을 새카맣게 태웠다. 귀족의 증표가 사라지자 공작은 숨을 쉬지 못했다. 연우의 손이 공작의 목을 향해 천천히 뻗어 나갔다. 그의 손가락 끝에서 검은 독기가 소용돌이쳤다.
시안은 공포에 질린 눈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연우의 입가에서 검은 피가 한 줄기 흘러내렸다. 카이델의 웃음소리가 연우의 입술을 타고 울려 퍼졌다. 연우는 공작의 목을 움켜쥐고 그를 들어 올렸다. 발버둥 치는 공작의 구두가 허공을 무력하게 저었다.
알현실의 모든 유리창이 동시에 박살 나며 쏟아졌다. 쏟아지는 유리 파편 사이로 붉은 노을이 들이쳤다. 연우는 공작을 바닥으로 내동댕이치고 시안을 보았다. 그의 눈동자 속에 서린 것은 파괴를 향한 갈망이었다. 연우의 발걸음이 시안의 코앞에서 멈췄다.
시안의 시야가 연우의 금빛 눈동자로 가득 찼다. 연우의 손이 시안의 피 젖은 가슴팍으로 다가왔다. 손끝에 맺힌 에테르가 시안의 상처를 헤집을 듯 떨렸다. 시안은 눈을 감으며 죽음을 예감하고 몸을 굳혔다. 연우의 입술이 천천히 열리며 쉰 목소리를 뱉었다.
시안, 도망쳐.
연우의 손이 시안의 어깨를 밀쳐내며 바닥을 짚었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독기가 시안을 덮쳤다. 시안의 신형이 뒤로 튕겨 나가며 부서진 난간 너머로 추락했다. 허공을 가르는 시안의 시야 속에서 연우가 무너졌다. 연우의 등 뒤로 카이델의 거대한 그림자가 덮쳐왔다.
카이델의 환영이 연우의 목을 조르며 광기 어린 웃음을 터뜨렸다. 성벽 아래로 떨어지던 시안의 손에 차가운 금속이 걸렸다. 그것은 연우가 마지막 순간 던진 낡은 구리 열쇠였다. 여동생의 거처가 적힌 쪽지가 열쇠 꾸러미에 매달려 있었다. 시안은 추락하는 와중에도 열쇠를 가슴에 품고 이를 악물었다.
지하 감옥의 철문이 저절로 열리며 불길한 소리를 냈다. 왕궁의 모든 촛불이 일제히 꺼지며 암흑이 찾아왔다. 어둠 속에서 연우의 비명이 아닌 카이델의 명령이 울렸다. 모든 기사단은 지금 즉시 도망친 쥐새끼를 추격하라 명했다. 시안은 숲을 향해 달리기 시작하며 뒤를 보았다.
연우의 금색 눈동자가 창가에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아니, 그것은 이미 연우의 눈이 아닌 포식자의 시선이었다. 시안은 멈추지 않고 어둠 속으로 몸을 던져 숨었다. 뒤편에서 수백 명의 말발굽 소리가 지면을 울리며 다가왔다. 제국의 모든 에테르가 시안의 뒤를 쫓아 요동치기 시작했다.
성문 밖으로 벗어난 시안은 품속의 열쇠를 더 세게 쥐었다. 열쇠 끝에 묻은 연우의 검은 피가 손바닥을 태웠다. 이것은 구원이 아니라 또 다른 지옥으로의 초대였다. 시안은 피 냄새를 쫓아오는 사냥개들의 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멈추지 않고 망각의 습지대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연우의 목소리가 바람에 섞여 귓가를 스치듯 들렸다. 살아서 돌아오지 말라는 마지막 당부가 뇌리에 박혔다. 시안은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고 뜨거운 박동을 느꼈다. 연우의 고통이 자신의 심장을 타고 그대로 전해지고 있었다. 그는 숲의 가장 깊은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추격대의 횃불이 숲 입구를 환하게 밝히며 일렬로 늘어섰다. 시안은 나무 뒤에 숨어 거친 숨을 고르며 칼을 뽑았다. 숲의 적막을 깨고 누군가의 발소리가 낙엽을 즈려밟았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감촉에 시안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연우의 장갑을 낀 정체불명의 기사가 서 있었다.
그대가 왕의 대역을 훔쳐 간 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