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의 틈새로 서늘한 공기가 스며들었다. 비릿한 흙먼지가 폐부 깊숙이 박혔다. 연우는 마른기침을 내뱉으며 상체를 비틀었다. 가슴 한가운데에 누군가 불붙은 인장을 지지는 기분이었다. 얇은 천 너머로 일렁이는 황금빛이 시야를 어지럽혔다. 검게 죽어있던 낙인이 맥박에 맞춰 점멸을 반복했다. 단순한 빛이 아니었다. 타인의 생명력이 혈관을 타고 강제로 주입되는 감각이었다. 연우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손끝에 닿는 박동은 평소보다 훨씬 무겁고 진했다. 카이델의 것이었다. 제국의 태양이라 칭송받던 남자의 생기가 보잘것없는 대역의 몸 안으로 흘러들고 있었다. 연우의 입술이 경련하며 벌어졌다. 비명조차 나오지 않는 목구멍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옆에 쓰러져 있던 카이델이 상체를 비틀어 일으켰다. 은색 머리카락은 잿가루에 뒤덮여 엉망이었다. 평소의 오만함은 간데없이 창백하게 질린 낯이었다. 카이델은 떨리는 손으로 연우의 멱살을 잡아당겼다. 서로의 숨결이 엉킬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그의 눈동자에 서린 것은 분노보다 깊은 공포였다.
"내 생명이 느껴지나."
카이델의 목소리가 젖은 흙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연우는 대답 대신 신음하며 고개를 저었다. 몸 안의 에테르가 충돌하며 장기를 뒤트는 기분이었다. 환영의 장갑이 깨진 손등에서 진물이 배어 나왔다. 평민의 신체는 고귀한 마력을 견디지 못했다. 피부가 갈라지고 붉은 살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카이델은 연우의 가슴에 새겨진 황금빛 문양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쳤다. 뜨거운 열기가 두 사람의 피부 사이에서 소용돌이쳤다. 낙인은 이제 붉은색이 아닌, 순수한 황금의 색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이것은 일방적인 고통의 전가가 아니었다. 생명 그 자체가 하나로 묶여버린 피의 속박이었다.
"계약이 변했어. 네가 죽으면 나도 죽는다."
카이델이 내뱉은 말은 얼음송곳처럼 연우의 고막을 찔렀다. 연우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깊은 자국을 남겼다. 왕의 대역은 왕의 고통을 나누는 존재였을 뿐이다. 왕의 죽음을 대신하는 소모품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 가슴을 채우는 이 감각은 정반대의 사실을 고하고 있었다. 연우의 심장이 멈추는 순간, 제국의 주인 역시 심장이 터져 나갈 터였다. 카이델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연우의 얇은 어깨뼈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네가 숨을 멈추면 내 심장도 멈춘다."
카이델의 눈가에 핏발이 섰다. 그는 연우의 가슴팍에 이마를 묻으며 짧게 숨을 들이켰다. 오만한 제왕의 자존심이 잔해 바닥에 처참하게 짓밟히고 있었다. 연우는 자신의 옷자락을 적시는 카이델의 거친 호흡을 느꼈다. 강철 같던 남자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것은 제국 그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았던 패배자의 얼굴이었다. 연우의 손가락이 바닥의 모래를 긁었다. 신분의 벽이 무너진 자리에는 생존을 향한 비참한 갈망만이 남았다.
"그러니 죽지 마라. 이건 명령이 아니라 간청이다."
연우는 혀끝을 감도는 쓴맛을 삼켰다. 여동생 연희를 위해 시작한 연극이었다. 고도 인장을 얻어 동생을 살리려 했던 계획이 발밑부터 무너졌다. 이제 그는 카이델의 목숨을 담보로 잡은 유일한 인간이 되었다. 동시에 카이델이 결코 놓아주지 않을 가장 귀한 인질이 되기도 했다. 연우는 힘겹게 손을 들어 카이델의 젖은 머리카락을 밀어냈다. 손바닥에 닿는 카이델의 체온이 지독하게 뜨거웠다.
"전하께서 저 같은 평민에게 간청을 하시다니요."
비릿한 웃음이 연우의 입가에 걸렸다. 카이델은 고개를 들어 연우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의 눈동자 속에 비친 연우의 모습은 유령처럼 파리했다. 환영의 장갑이 깎아 먹은 생명력은 황금빛 낙인으로 겨우 연명하고 있었다. 카이델의 손가락이 연우의 목줄기를 타고 올라와 턱 끝을 강하게 쥐었다. 그 손길에는 절박함과 증오가 뒤섞여 있었다. 타인에게 자신의 운명을 맡겨야 하는 자의 비참함이 그 손등 위로 고스란히 드러났다.
"네 목숨이 내 것이라는 뜻이다. 네 멋대로 꺼뜨릴 수 없는 내 목숨."
카이델은 연우를 바닥으로 거칠게 밀쳐냈다. 그리고 무너진 석재 사이를 손으로 파헤치기 시작했다. 에테르를 사용할 수 없는 연우는 그저 흙바닥에 누워 그 뒷모습을 보았다. 먼지가 자욱한 어둠 속에서 카이델의 움직임은 기괴할 정도로 절박했다. 황제라는 직위도, 고귀한 혈통도 이곳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오직 살아남아야 한다는 본능만이 공기를 무겁게 짓눌렀다.
연우는 무거운 눈꺼풀을 깜빡이며 천장을 보았다. 무너진 천장 틈새로 은밀한 달빛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잿빛 하수구에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청명한 빛이었다. 고도가 높은 곳에서만 허락되는 그 빛이 오늘은 유독 차갑게 느껴졌다. 카이델이 잔해 하나를 치우자 차가운 금속음이 정적을 깼다. 연우의 시선이 카이델의 손끝으로 향했다. 그의 손에는 흙먼지로 뒤덮인 작은 천 뭉치가 들려 있었다.
연우의 호흡이 순간 멎었다. 그것은 서약 도중 잃어버렸던 연희의 낡은 리본이었다. 동생이 직접 땋아주었던, 연우에게 남은 유일한 집의 기억이었다. 리본은 카이델의 가죽 장갑 위에서 초라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카이델은 그것을 소중하게 쥐기는커녕,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물건처럼 익숙하게 만졌다. 손가락 끝이 리본의 해진 부분을 느릿하게 훑었다.
"이걸 찾고 있었나."
카이델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달빛을 받은 그의 얼굴에 기괴한 미소가 번졌다. 그는 리본 끝에 매달린 작은 방울을 손가락으로 튕겼다. 맑은 소리가 폐허 안에 울려 퍼졌다. 연우는 상체를 일으키려 했으나 가슴의 낙인이 다시 한번 뜨겁게 요동쳤다. 목구멍에서 비릿한 혈향이 올라와 입술을 적셨다. 연우의 시선이 리본을 쥔 카이델의 손에 고정되었다.
"예전에 본 적이 있지. 잿빛 하수구의 그 눈먼 아이가 달고 있던 것과 똑같군."
카이델의 목소리에 담긴 확신이 연우의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그는 리본을 연우의 코앞까지 가져다 대며 낮게 속삭였다. 연우의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자신의 과거와 동생의 존재를 이 남자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 공포로 다가왔다. 카이델의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도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사냥감을 몰아넣은 포식자의 눈빛이었다.
"네 동생은 내가 아주 잘 아는 곳에 있다."
카이델은 리본을 자신의 품속으로 거칠게 집어넣었다. 연우의 손이 허공을 긁었으나 카이델의 옷자락에 닿기도 전에 바닥으로 떨어졌다. 카이델은 연우의 뺨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손가락으로 닦아냈다. 그 손길은 다정하면서도 소름 끼치도록 차가웠다. 연우는 숨을 들이켜려 했지만 가슴을 짓누르는 압박감에 헉 소리를 내며 몸을 떨었다.
"내가 허락하기 전까지는 누구도 그 아이를 볼 수 없어."
카이델은 연우의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얼굴을 가까이 밀착했다. 연우의 귓가에 닿는 뜨거운 숨결이 독처럼 퍼졌다. 연우는 입술을 깨물며 신음을 참아냈다. 동생의 목숨줄이 이 폭군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제국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 동시에 가장 위험한 감옥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연우는 깨달았다. 카이델은 만족스러운 듯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가자. 네가 살아야 할 이유를 내가 쥐고 있으니."
카이델이 연우의 허리를 감싸 안아 일으켰다. 연우의 몸이 힘없이 그의 어깨에 기대어졌다. 무너진 폐허 너머로 멀리 태양의 첨탑이 보였다. 그곳은 구름 위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가장 높은 곳이었다. 동시에 연우가 평생을 바쳐 도달하려 했던 목적지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그곳은 거대한 묘비처럼 차갑게 서 있었다. 연우의 시야가 점차 흐려졌다.
"전하, 제발."
연우의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카이델은 대답 대신 연우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의 품 안에서 느껴지는 심장 박동이 연우의 것과 완벽하게 일치했다. 두 개의 심장이 하나의 리듬으로 뛰는 기묘한 감각이 온몸을 지배했다. 카이델은 연우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가져다 댔다.
"네 동생을 살리고 싶다면 내 심장을 지켜라."
카이델은 연우를 안은 채 폐허의 잔해를 밟고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발밑에서 부서지는 돌 가루 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멀리서 기사들의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연우는 떨리는 손으로 카이델의 젖은 셔츠를 꽉 움켜쥐었다. 손등에 새겨진 환영의 장갑 파편이 피부를 파고들었다. 통증이 선명해질수록 동생의 리본을 가져간 카이델의 잔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아스테리아의 지하 감옥은 꽤 춥지."
카이델이 툭 내뱉은 말에 연우의 어깨가 다시 한번 경직되었다. 지하 감옥이라는 단어는 연우의 이성을 마비시키기에 충분했다. 잿빛 하수구보다 더 어둡고 습한 곳에 동생이 갇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카이델은 연우의 반응을 즐기는 듯 그의 목덜미를 가볍게 깨물었다.
"울지 마라. 네가 울면 내 마음도 아프니까."
카이델의 비릿한 농담이 공중에 흩어졌다. 연우는 눈을 감으며 뜨거운 기운을 삼켜냈다. 이제 도망칠 곳은 없었다. 자신의 생명과 동생의 목숨, 그리고 제국 황제의 심장이 하나의 실타래처럼 엉켜버렸다. 카이델은 연우를 말 위에 태우고 자신도 그 뒤에 올라탔다. 거친 말의 호흡이 밤공기를 갈랐다.
"이제부터 너는 누구도 만날 수 없다."
카이델이 연우의 허리를 단단히 구속하며 고삐를 잡아당겼다. 말이 앞발을 들며 크게 포효했다. 연우는 카이델의 가슴에 등을 기댄 채 점점 멀어지는 폐허를 보았다. 그곳에 남겨진 것은 자신의 진짜 이름과 지워진 과거뿐이었다. 카이델은 말의 옆구리를 강하게 차며 어둠 속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나를 위해서만 숨 쉬어라, 연우야."
카이델이 처음으로 연우의 진짜 이름을 불렀다. 연우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망각의 서약을 통해 지워졌어야 할 이름이 폭군의 입술을 타고 흘러나왔다. 연우는 대답할 힘조차 잃은 채 카이델의 팔 안에서 정신을 놓아버렸다. 말발굽 소리가 점점 빨라지며 제국의 수도를 향해 달려갔다.
성문 앞에 도착한 기사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으며 길을 열었다. 카이델은 멈추지 않고 왕궁의 가장 깊은 곳으로 향했다. 태양의 첨탑 아래, 금지된 구역의 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카이델은 말에서 내려 연우를 다시 품에 안았다. 그의 시선은 연우의 파리한 입술을 집요하게 훑었다.
"어서 오너라, 나의 유일한 약점이여."
카이델은 연우를 침상 위에 눕히고 그의 가슴 위로 손을 올렸다. 황금빛 낙인이 여전히 두 사람의 생명을 연결하며 고요하게 맥동하고 있었다. 카이델은 연우의 목에 걸린 낡은 펜던트를 거칠게 잡아 뜯어 바닥으로 던졌다. 펜던트가 바닥에 부딪히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이곳에 너를 위한 방을 준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