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 묻은 열쇠가 손바닥 안에서 미끄러졌다. 축축한 지하 복도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벽면을 타고 흐르는 냉기가 얇은 예복을 뚫고 피부에 달라붙었다. 숨을 들이켤 때마다 쇠비린내와 곰팡이 냄새가 폐부를 찔렀다. 연우는 비틀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며 벽을 짚었다. 손가락 끝에 닿는 거친 돌벽의 감촉이 생생했다.
발소리가 울릴 때마다 가슴 안쪽이 조여들었다. 저 멀리 복도 끝에서 희미한 횃불 빛이 일렁였다. 연우는 입술을 깨물며 속도를 높였다. 신발 밑창이 고인 물을 칠퍽이며 가르 지르는 소리가 고요를 깼다. 마침내 육중한 철문 앞에 도달했을 때, 손목의 환영의 장갑이 기분 나쁜 박동을 내뿜었다.
철문 너머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연우는 떨리는 손으로 열쇠를 구멍에 밀어 넣었다. 끼익, 소름 끼치는 금속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그곳엔 하얀 드레스가 흙먼지로 뒤덮인 채 바닥에 쓰러진 연희가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목에 서슬 퍼런 칼날을 들이댄 남자가 보였다.
벨로스 공작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눈동자에는 상대를 비웃는 기색이 역력했다. 연우의 시선이 연희의 창백한 얼굴에 머물렀다. 동생의 감긴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목덜미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공작이 칼날을 조금 더 바짝 밀착시켰다. 연희의 하얀 목줄기에 붉은 선이 그어졌다. 연우는 비명을 지르려다 입을 틀어막았다. 목구멍까지 차오른 신음이 뜨거운 불덩이가 되어 타올랐다. 공작의 입술이 비열한 곡선을 그리며 움직였다.
왕을 죽여라.
그 한마디가 차가운 지하실의 공기를 얼려버렸다. 공작은 연우의 발치에 작은 단도를 던졌다. 금속이 바닥에 부딪히며 챙그랑 소리를 냈다. 동생을 살리고 싶다면 오늘 밤 안에 카이델의 심장을 꿰뚫으라는 제안이었다. 연우의 손끝이 경련하듯 떨렸다.
왕의 대역은 왕의 고통을 공유한다. 그를 찌르는 순간 자신 역시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연희의 생명이 공작의 손가락 하나에 달려 있었다. 연우의 시야가 붉게 점멸했다. 바닥에 떨어진 단도를 집어 들려는 찰나, 등 뒤에서 거대한 압박감이 밀려왔다.
복도 끝에서부터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묵직한 군화 소리가 일정한 박자로 바닥을 울렸다. 연우는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그 주인을 알 수 있었다. 가슴에 새겨진 낙인이 불에 달군 인두처럼 뜨겁게 달아올랐다. 카이델 3세가 천천히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카이델의 눈동자는 얼음처럼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공작과 연우를 번갈아 보며 입가에 비틀린 미소를 띄웠다. 그의 손에는 이미 뽑혀 나온 장검이 들려 있었다. 칼날 끝에서 뚝뚝 떨어지는 검은 액체가 바닥의 먼지를 적셨다.
공작의 얼굴에서 여유가 사라졌다. 그는 연희의 머리채를 잡아 올리며 카이델을 위협했다. 카이델은 멈추지 않고 한 걸음씩 다가왔다. 그가 발을 내디딜 때마다 지하 감옥의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연우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 숨을 몰아쉬었다.
왼쪽에는 목숨보다 소중한 여동생이 있었다. 오른쪽에는 자신의 생명과 연결된 폭군이 서 있었다. 누구를 찔러도 파멸뿐인 선택지였다. 연우의 머릿속이 깨질 듯이 아파왔다. 손목의 장갑이 피부를 파고들며 검은 에테르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평민의 몸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힘이었다. 장갑의 틈새로 푸른 불꽃이 튀며 연우의 팔을 태웠다. 살 타는 냄새가 진동했지만 연우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모든 생명력을 장갑 안으로 쏟아부었다. 공허의 신체가 비명을 지르며 뒤틀렸다.
장갑에서 뻗어 나온 에테르가 거대한 환영을 빚어냈다. 그것은 전설 속의 짐승처럼 거대하고 흉포한 형상이었다. 지하실 전체가 환영이 내뿜는 압력에 흔들렸다. 천장에서 먼지와 돌가루가 비처럼 쏟아졌다. 연우의 눈에서 검은 피가 흘러내렸다.
나는 누구의 대역도 아니다.
연우의 목소리가 갈라진 틈새로 터져 나왔다. 그는 환영의 발톱을 공작과 카이델 모두에게 겨누었다. 내 동생을 건드리는 자는 신이라 해도 죽이겠다. 그 선언과 함께 지하실의 공기가 폭발하듯 팽창했다. 거대한 진동이 발밑에서부터 올라왔다.
카이델의 눈에 흥미로운 광채가 스쳤다. 그는 자신의 목을 겨눈 환영의 칼날을 보고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가까이 다가와 연우의 일그러진 얼굴을 응시했다. 공작은 당황하며 연희를 방패 삼으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연우가 손을 휘두르자 환영이 폭발했다.
귀를 찢는 듯한 굉음이 지하를 뒤덮었다. 지지대 역할을 하던 기둥들이 힘없이 꺾여 나갔다. 천장이 무너져 내리며 거대한 바위들이 쏟아졌다. 연우는 마지막 힘을 짜내어 연희를 구석으로 밀어 던졌다. 그곳에는 어느새 나타난 시안이 대기하고 있었다.
시안은 연우와 짧은 시선을 교환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연희를 들쳐업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연우는 그제야 안도하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머리 위로 거대한 석판이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누군가의 강한 손길이 연우의 허리를 낚아챘다.
카이델이었다. 그는 무너지는 잔해 속에서도 연우를 놓지 않았다. 두 사람의 몸 위로 엄청난 양의 흙더미와 돌들이 쏟아졌다. 시야가 완전히 차단되고 사방이 고요해졌다. 무거운 침묵 속에서 거친 숨소리만이 서로의 귓가를 울렸다.
연우는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이 없었다. 어둠 속에서 카이델의 뜨거운 체온이 느껴졌다. 그의 어깨에서 흘러나온 피가 연우의 뺨을 적셨다. 비릿한 혈향이 두 사람 사이의 좁은 공간을 가득 채웠다. 연우의 가슴에 새겨진 낙인이 이전과는 다른 박동을 시작했다.
카이델의 손이 연우의 젖은 손등을 덮었다. 맞닿은 피부를 통해 뜨거운 에너지가 소용돌이치며 흘러들어왔다. 연우의 손등에 새겨졌던 검은 문양이 금색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지독한 통증을 동반한 기이한 변화였다.
낙인이 빛나며 지하의 어둠을 얇게 갈라냈다. 연우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카이델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카이델의 낮은 웃음소리가 흉벽을 타고 고스란히 전달됐다. 그의 피와 연우의 피가 바닥에서 하나로 섞여 들었다.
황금빛 문양이 연우의 손목을 타고 올라와 심장 근처에 자리 잡았다. 계약의 형질이 뒤바뀌는 진동이 전신을 휩쓸었다. 연우는 자신의 생명력이 카이델의 것과 기괴하게 융합되는 감각에 몸을 떨었다. 카이델이 연우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다가댔다.
"이제 넌 죽고 싶어도 내 허락 없이 못 죽어."
카이델의 손가락이 연우의 턱을 들어 올렸다. 어둠 속에서도 그의 눈동자는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연우는 대답 대신 그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손등의 문양이 완성되는 순간, 지하실을 누르던 잔해들이 황금색 안개로 변해 흩어졌다.
연우는 눈을 뜨고 카이델의 목에 팔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