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 속의 사내는 낯설었다. 금실로 촘촘하게 수놓인 가느다란 가면이 이마와 콧날을 가렸다. 입술을 제외한 모든 곳이 은폐된 얼굴은 제국의 태양이라 불리는 남자의 그것과 완벽히 닮아 있었다. 연우는 손톱으로 손바닥 정중앙을 강하게 눌렀다. 살점을 파고드는 예리한 통증만이 이곳이 현실임을 일깨웠다.
환영의 장갑을 낀 손끝이 화끈거렸다. 피부를 미세하게 갉아먹는 에테르의 박동이 팔뚝을 타고 심장으로 흘러들었다. 평민의 신체는 이 고결한 힘을 수용할 그릇이 되지 못했다. 장갑을 낄 때마다 생명력이 모래시계의 모래처럼 빠져나갔다. 거울에 비친 눈동자가 자아 상실의 공포로 인해 미세하게 흔들렸다.
오늘 밤만 버티면 된다.
연우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폐부 깊숙이 스며드는 차가운 공기에서 고도가 높은 구역 특유의 청명함이 느껴졌다. 잿빛 하수구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사치스러운 공기였다. 그곳에 홀로 남겨진 눈먼 여동생 연희를 떠올렸다. 아이의 마른 손목에 묶여 있던 낡은 리본의 감촉이 손바닥 위에서 되살아나는 듯했다.
태양의 첨탑 아래층, 연회장의 문이 열렸다.
수천 개의 수정 전구가 뿜어내는 빛이 망막을 찔렀다. 가면을 쓴 귀족들이 화려한 군무를 추며 바닥을 수놓고 있었다. 연우는 카이델의 걸음걸이를 흉내 내며 계단을 내려갔다.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고 시선은 허공의 한 점에 고정했다. 신분이 낮은 자는 귀족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가면 법칙이 오늘만큼은 연우를 보호하는 방패가 되었다.
기둥 뒤편에서 익숙한 그림자가 움직였다.
시안이었다. 그는 하수구 출신답게 주변의 소란 속에서도 기척을 죽인 채 연우에게 다가왔다. 시안의 눈동자가 연우의 가면 너머를 짧게 훑었다. 긴박함이 서린 시선이었다.
"준비됐어?"
낮게 깔린 목소리가 음악 소리에 섞였다. 연우는 대답 대신 고개를 아주 살짝 끄덕였다. 시안이 손가락으로 지하 감옥 방향을 가리켰다. 연희가 갇혀 있는 별궁의 입구는 무도회장 지하와 연결되어 있었다.
"경비병들은 내가 유인할게. 환영의 장갑 출력을 높여. 그놈들이 전하로 착각하게 만들어야 하니까."
시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연우의 가슴 안쪽이 뜨거워졌다. 낙인이 새겨진 자리가 불에 데인 듯 달아올랐다. 피의 계약으로 묶인 진짜 왕, 카이델이 가까이 오고 있다는 신호였다. 연우는 목 안쪽으로 차오르는 비릿한 혈향을 삼켰다. 고통은 공유되지만 권력은 공유되지 않는 불공정한 계약의 굴레가 전신을 옥죄었다.
인파가 갈라지며 카이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가면조차 쓰지 않은 채였다. 제국의 유일한 태양에게 법칙 따위는 무의미했다. 카이델의 시선이 연우의 전신을 느릿하게 훑었다. 상대를 응시하며 가장 아픈 곳을 찾아내는 냉혈한의 눈빛이었다. 그가 연우의 앞으로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나의 그림자에게 춤을 청해도 되겠나."
거절할 수 없는 명령이었다. 연우는 카이델의 손을 잡았다. 장갑 너머로 느껴지는 온기가 소름 끼치도록 차가웠다. 카이델의 손등 위로 불거진 힘줄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연우가 느끼는 고통의 절반이 그에게도 전달되고 있을 터였다. 카이델은 그 고통을 즐기기라도 하듯 연우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당겼다.
음악이 바뀌고 두 사람의 신체가 맞물렸다.
연우는 춤을 추는 척하며 카이델의 허리춤을 살폈다. 은색 사슬에 매달린 작은 열쇠 뭉치가 옷자락 사이에서 번뜩였다. 연희가 갇힌 감옥의 문을 열 수 있는 유일한 열쇠였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 나왔다. 환영의 장갑이 내는 진동이 팔의 감각을 마비시키기 시작했다.
"손이 떨리는군."
카이델의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연우는 입술을 짓누르며 표정을 관리했다. 타인의 숨소리 변화에 민감한 왕을 속이는 것은 살얼음판 위를 걷는 것과 같았다. 연우는 카이델의 어깨에 고개를 묻으며 최대한 자연스럽게 손가락을 움직였다.
"전하의 온기가 지나치게 뜨거울 뿐입니다."
"거짓말에 능숙해졌어. 하수구 쥐새끼치고는 제법이지."
카이델의 손이 연우의 척추를 타고 내려갔다. 척추 마디마디가 전율하며 비명을 질렀다. 연우는 이 기괴한 집착과 통제 속에서 오직 열쇠만을 생각했다. 발을 맞추며 회전하는 순간, 연우의 손가락끝이 차가운 금속에 닿았다.
그때였다. 연우의 발끝이 자신의 옷자락에 걸려 비틀거렸다.
황급히 중심을 잡았으나 품속에 숨겨두었던 작은 유리병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쨍그랑, 하는 소리가 오케스트라의 선율을 찢고 울려 퍼졌다. 연우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탈출 실패 시 사용하려 했던 독약이었다. 바닥에 흩어진 보랏빛 액체가 달빛 아래서 흉측하게 빛났다.
연우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굳어버렸다.
실수는 죽음을 의미했다. 카이델의 눈동자가 가늘어지며 바닥의 파편을 응시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움직인 인물이 있었다. 연회장 상석에 앉아 있던 벨로스 공작이었다. 그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손에 든 에테르 감지기를 가동했다.
웅, 하는 기분 나쁜 기계음이 홀 전체에 퍼졌다.
"전하, 축제의 밤에 어울리지 않는 불순한 마력이 느껴지는군요. 아무래도 이 안에 가짜가 섞여 있는 모양입니다."
벨로스 공작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서려 있었다. 감지기의 바늘이 연우를 향해 미친 듯이 회전했다. 귀족들의 시선이 일제히 연우에게 쏠렸다. 환영의 장갑이 한계에 다다랐는지 불꽃을 튀기며 지직거렸다. 연우는 절망적인 기분으로 카이델을 올려다보았다.
카이델의 입술이 기묘하게 뒤틀렸다.
"오늘 밤, 이 가면이 벗겨지면 우리는 서로의 목을 베어야 할 겁니다."
연우가 카이델만이 들을 수 있는 크기로 속삭였다. 그것은 예고이자 마지막 발악이었다. 연우는 그 혼란을 틈타 카이델의 허리춤에서 열쇠를 낚아챘다. 금속의 서늘한 감촉이 손바닥에 닿는 순간, 공중을 가르는 날카로운 파공음이 들렸다.
벨로스 공작이 등 뒤에 숨기고 있던 에테르 활을 쏜 것이었다.
빛의 화살이 연우의 얼굴을 향해 쇄도했다. 피할 시간은 없었다. 화살은 정확히 연우의 얼굴에 씌워진 가면 정중앙을 타격했다. 파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견고했던 금빛 가면이 산산조각 나며 사방으로 튀었다.
연우의 진짜 얼굴이 드러나기까지는 1초도 걸리지 않을 찰나였다.
카이델의 눈동자에 기괴한 광기가 어렸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파편을 밟으며 연우의 뒤통수를 감싸 안았다. 거대한 검은 망토가 연우의 상체를 통째로 덮어버렸다. 시야가 온통 암흑으로 물들었다.
동시에 카이델의 손이 공중을 휘저었다.
강력한 에테르의 파동이 연회장을 휩쓸었다. 천장에 매달려 있던 수천 개의 수정 전구가 일제히 폭발했다. 화려한 빛으로 가득했던 공간은 단숨에 적막과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비명과 유리 조각 떨어지는 소리만이 무질서하게 뒤섞였다.
어둠 속에서 카이델의 뜨거운 숨결이 연우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내 허락 없이는 죽지도, 들키지도 마라."
카이델은 망토 속에 갇힌 연우의 허리를 부서질 듯 껴안으며 어둠이 내려앉은 연회장의 출구를 향해 거침없이 발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