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는 무거웠다. 쇠사슬이 바닥을 긁었다. 어둠 속에서 기침 소리가 멀어졌다. 코끝에 들러붙은 잿빛 하수구의 비린내가 가시지 않았다. 축축한 습기와 곰팡이 냄새가 뒤섞인 공기는 폐부를 찔렀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족쇄가 날카로운 금속음을 내며 바닥을 훑었다. 태양의 첨탑 지하 밀실은 그 이름이 무색하게 차갑고 습했다. 계단을 내려갈수록 산소는 희박해졌고 의식은 진흙 속에 잠기듯 가라앉았다.
거대한 철문이 비릿한 쇳소리를 내며 열렸다. 방 안은 수천 개의 촛불이 일렁이며 기괴한 그림자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방 한가운데 놓인 화려한 의자에는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제국 테라노스의 정점, 카이델 3세가 붉은 빛을 머금은 눈동자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연우는 무릎을 꿇었다. 딱딱한 돌바닥에 부딪힌 무릎뼈가 둔탁한 통증을 내질렀다.
고개를 숙인 연우의 시야에 금실로 수놓아진 구두가 들어왔다. 기도가 좁아지며 호흡이 가빠졌으나 감히 소리를 내뱉을 수 없었다. 손등에 닿는 공기가 소름 끼칠 정도로 서늘하게 식어갔다. 카이델이 연우의 턱을 잡아 올렸다.
"이것이 잿빛 구석에서 굴러먹던 미천한 눈빛인가."
낮게 깔린 목소리가 고막을 타고 흘러 들어와 척추를 훑었다. 카이델의 입술 끝이 비틀리며 조소 섞인 숨결을 내뱉었다. 턱을 쥔 손가락은 피부를 파고들 듯 강한 압력으로 조여왔다. 연우는 떨리는 눈동자를 감추지 못한 채 그의 붉은 눈을 마주했다. 맹수 앞에 선 초식동물처럼 사지가 돌처럼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네 이름은 이제부터 죽음이다. 내 고통을 대신 짊어질 가련한 제물."
카이델의 선언은 돌이킬 수 없는 낙인처럼 밀실을 가득 채웠다. 연우는 마른침을 삼키며 품속에 숨긴 낡은 천 조각을 떠올렸다. 눈먼 여동생의 머리를 묶어주던, 색이 바랜 붉은 리본이었다. 고도 인장만 얻는다면 동생을 이 지옥 같은 하수구에서 건져낼 수 있었다. 그것만이 연우가 이 가혹한 계약을 받아들인 유일한 이유였다.
카이델이 손짓하자 옆에 서 있던 사제가 은반지 위에 놓인 물건을 내밀었다. 반투명한 재질로 만들어진 환영의 장갑이 촛불 아래서 기괴하게 번뜩였다. 평민의 비천한 신분을 감추고 왕의 마력을 흉내 내게 해주는 도구였다. 동시에 착용자의 생명력을 양분 삼아 작동하는 저주받은 유물이었다. 카이델은 직접 장갑을 집어 들어 연우의 왼손 앞에 가져다 댔다.
"직접 끼워 넣어라. 네 비천한 과거를 도려내듯."
연우의 손끝이 장갑 끝동에 닿자마자 얼음장 같은 냉기가 팔을 타고 올라왔다. 손가락을 밀어 넣는 순간, 수만 개의 바늘이 손등의 혈관을 찌르는 듯한 감각이 몰아쳤다. 으드득, 뼈가 어긋나는 소리가 귓가를 울렸고 시야가 번쩍이는 불꽃으로 가득 찼다. 비명을 지르려 벌린 입안으로 비릿한 피 냄새가 확 끼쳐 왔다.
연우는 어금니가 맞물려 삐걱거릴 정도로 신음을 삼켰다. 장갑이 살점 안으로 파고들어 신경과 결합하는 과정은 생살을 발라내는 고통이었다. 카이델은 그 광경을 흥미롭다는 듯 지켜보며 연우의 흐트러진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의 손길은 다정했으나 눈동자에는 일말의 동정도 서려 있지 않았다.
"참아라. 고통이야말로 네가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유일한 감각이 될 테니."
차가운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장갑이 연우의 손목 위로 완전히 밀착되었다. 피부와 경계가 사라진 장갑 위로 금빛 마력의 실핏줄이 요동치며 피어올랐다. 연우의 왼팔은 이제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미세하게 경련하며 기괴한 빛을 내뿜었다.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린 식은땀이 바닥을 적셨고 무릎 아래가 무너져 내렸다.
바닥에 엎드린 연우의 품에서 무언가 툭 하고 떨어져 나갔다. 소중하게 간직했던 여동생의 낡은 리본이 차가운 돌바닥 위로 볼품없이 굴러갔다. 연우는 그것을 잡으려 손을 뻗었으나 손가락은 마비된 듯 움직이지 않았다. 카이델의 시선이 바닥에 떨어진 붉은 천 조각에 잠시 머물렀다. 그는 구두 끝으로 리본을 짓밟으며 연우의 머리칼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과거는 죽었다고 했을 텐데."
머리 가죽이 뜯겨 나갈 듯한 통증에 연우의 상체가 강제로 일으켜졌다. 카이델의 서늘한 체온이 목덜미에 닿자 전신이 떨렸다. 사제가 붉게 달궈진 인장을 들고 다가왔고 연우의 가슴팍 옷자락이 찢겨 나갔다. 불길을 머금은 인장이 공기를 가르며 연우의 왼쪽 가슴 위로 내리눌렸다.
치익, 살이 타들어 가는 소리와 함께 자욱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단숨에 심장을 관통하는 듯한 극렬한 통증에 연우의 고개가 꺾였다. 비명조차 나오지 않는 고통 속에서 연우의 동공이 최대로 확장되며 경련했다. 가슴에 새겨진 문양은 왕의 상징인 태양이 아닌, 피를 흘리는 거꾸로 된 왕관이었다.
의식이 멀어지려는 찰나, 기이한 감각이 전신을 휩쓸고 지나갔다. 분명 자신의 몸에는 더 이상 인장이 닿아 있지 않았으나 가슴이 타는 듯한 통증은 멈추지 않았다. 아니, 그것은 자신의 고통이 아니었다. 연우는 고통의 근원지를 찾아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 카이델을 바라보았다.
멀리 떨어진 침소 쪽에 서 있던 카이델이 느릿하게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의 미간이 짧게 수축하더니 이내 입술 사이로 기괴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카이델은 고통을 즐기는 광인처럼 어깨를 떨며 연우의 절망적인 눈빛을 만끽했다. 그의 가슴에서도 연우와 똑같은 위치에 붉은 빛이 점멸하고 있었다.
"느껴지나? 내 심장이 너를 집어삼키는 소리가."
카이델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귓속을 파고들며 뇌를 뒤흔들었다. 연우는 자신의 심박수가 카이델의 박동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것을 느꼈다. 타인의 감각이 혈관을 타고 들어와 영혼을 오염시키는 불쾌한 연결이었다. 연우는 바닥을 긁으며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고 손톱 밑으로 돌가루가 박혀 들어갔다.
연우의 시야 속에서 카이델의 형체가 일그러지며 거대한 그림자로 변해갔다. 심장이 조여드는 압박감에 숨을 들이켜려 했으나 허파에는 뜨거운 열기만이 가득 찼다. 고통의 공유가 시작된 순간, 연우는 자신이 단순한 대역이 아님을 직감했다. 그는 왕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한 살아있는 부적이자, 죽음을 대신 받아낼 그릇이었다.
카이델은 바닥에 쓰러진 연우에게 다가와 그의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축축하게 젖은 연우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마지막 힘을 짜내 그를 노려보았다. 카이델의 붉은 눈동자 속에는 승리감과 알 수 없는 갈증이 뒤섞여 일렁이고 있었다. 그는 연우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밀착시킨 채 낮게 속삭였다.
"도망칠 생각은 버려라. 네가 죽으면 나도 아프겠지만, 내가 죽으면 너는 찢겨 죽을 테니."
카이델은 그대로 몸을 일으켜 어둠 속으로 유유히 걸어 나갔다. 홀로 남겨진 연우는 차가운 바닥에 뺨을 댄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가슴의 낙인은 꺼지지 않는 불씨처럼 계속해서 타오르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멀어지는 카이델의 발소리가 연우의 심장 박동과 겹쳐지며 머릿속을 난도질했다.
연우는 떨리는 오른손을 뻗어 바닥에 짓밟힌 붉은 리본을 간신히 움켜쥐었다. 더러워진 천 조각을 가슴에 품자 낙인의 통증이 더욱 거세게 몰아쳤다. 보이지 않는 사슬이 목을 조여오는 듯한 감각에 연우는 몸을 웅크린 채 숨을 죽였다. 지하 밀실의 촛불이 하나둘 꺼져가며 사방이 완전한 어둠에 잠겨들었다.
"전하, 이제 나가실 시간입니다."
어둠 속에서 정체 모를 그림자가 다가와 연우의 어깨를 붙잡았다. 연우는 대답 대신 핏기가 가신 입술을 굳게 다물며 몸을 일으켰다. 다리가 후들거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으나 가슴의 통증이 강제로 정신을 깨웠다. 그는 이제 연우가 아니었다. 잿빛 하수구의 흔적을 지운 채, 빛나는 태양의 첨탑 위에서 폭군의 그림자로 살아가야 할 가짜 왕이었다.
연우는 장갑을 낀 왼손을 들어 올려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환영의 마력이 작동하며 그의 평범한 이목구비가 카이델의 오만한 얼굴로 변해갔다. 거울 없이도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영혼이 서서히 깎여나가며 타인의 껍데기로 채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연우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밀실의 문을 향해 한 발짝을 내디뎠다.
문밖에는 수천 명의 기사와 귀족들이 가짜 왕의 등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연우는 가슴을 파고드는 카이델의 서늘한 웃음소리를 들으며 문고리를 잡았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자 잊고 싶지 않은 동생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가면 뒤로 자신의 진심을 깊숙이 묻어버렸다.
"가자, 이 역겨운 연극의 무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