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중한 집무실 문이 예고도 없이 벌어졌다. 태양의 첨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집무실은 구름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연우는 책상 위의 서류 뭉치를 만지작거리며 시선을 낮추었다. 벨로스 공작이 허리도 굽히지 않은 채 안으로 발을 들였다. 대귀족의 발소리가 대리석 바닥을 울릴 때마다 연우의 발가락 끝이 딱딱하게 굳었다. 허벅지 근육이 미세하게 경련하며 바지 천을 밀어 올렸다.
"무례하군. 짐의 허락도 없이 발을 들이다니."
연우는 카이델의 목소리를 흉내 냈다. 낮고 서늘한, 상대를 벌레처럼 취급하는 어조였다. 목 안쪽이 껄끄러웠으나 애써 침을 삼켜 이물감을 눌렀다. 공작은 입가에 인자한 미소를 걸었지만 눈동자만큼은 사냥감을 노리는 뱀처럼 번뜩였다. 그는 품 안에서 복잡한 문장이 새겨진 양피지를 꺼내 탁자 위로 미끄러뜨렸다. 종이가 마찰하며 내는 소리가 고요한 방안을 날카롭게 긁었다.
"식량 배분령 초안입니다. 서명을 부탁드리지요."
누런 양피지에는 수도 아스테리아에 전체 식량의 구십 퍼센트를 집중시킨다는 가혹한 조항이 적혀 있었다. 외곽 지역 사람들은 굶어 죽으라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연우는 깃펜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손바닥을 파고드는 손톱의 통증이 비현실적인 감각을 일깨웠다. 여기서 머뭇거리면 의심의 칼날이 목을 겨눌 것이다. 잿빛 하수구에 남겨진 여동생의 마른 얼굴이 망막 위로 스쳐 지나갔다.
그는 카이델이라면 지었을 오만한 표정으로 서류를 훑었다. 글자들이 시야에서 일렁였으나 내용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주인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행위였다. 연우는 거칠게 깃펜을 휘둘러 서명을 마쳤다. 잉크가 번진 끝부분이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보였다. 펜촉이 종이를 찢을 듯이 깊게 파고들어 검은 흔적을 남겼다.
"오늘따라 폐하의 서명이 무척이나 역동적이군요."
벨로스 공작이 서류를 집어 들며 중얼거렸다. 그의 시선이 서명 끝의 미세한 떨림을 집요하게 훑었다. 연우는 심장 근처가 옥죄어오는 압박감을 느끼며 등을 의자에 깊숙이 기댔다. 등받이의 차가운 가죽 감촉이 셔츠를 뚫고 전해졌다. 식은땀이 척추를 타고 흘러내렸으나 겉으로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폐부 깊은 곳에서 뜨거운 기운이 울컥 치솟았다.
"용건이 끝났으면 물러가라. 공작의 얼굴을 오래 보고 싶지 않군."
"폐하의 손길이 오늘따라 무척이나 인간적으로 느껴지는군요. 평소라면 이 서류를 제 면상에 던지셨을 텐데 말입니다."
공작은 한 걸음 더 다가와 책상 모서리를 짚었다. 그의 그림자가 연우의 무릎 위를 덮쳤다. 공기가 희박해지는 착각이 들 정도로 위압감이 상당했다. 연우는 왼손에 낀 환영의 장갑을 책상 아래로 숨겼다. 장갑 안쪽에서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치솟기 시작했다. 에테르가 강제로 신체를 통과하며 혈관을 태우는 감각이었다. 살점이 지져지는 비린내가 코끝을 스치는 듯했다.
"성역의 기운이 부족하신 모양입니다. 축복을 내려주시겠습니까?"
공작의 요구는 명백한 시험이었다. 에테르 감응력이 없는 평민은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왕족만의 고유한 영역이었다. 연우는 아랫입술 안쪽을 세게 깨물어 신음을 삼켰다. 장갑에 새겨진 마법 회로가 작동하며 그의 생명력을 급격히 빨아들였다. 폐부가 오그라들고 명치끝이 뒤틀리는 감각이 전신을 지배했다. 골격 마디마디가 어긋나는 고통이 척추를 타고 뇌를 때렸다.
그는 떨리는 오른손을 천천히 들어 올려 공작의 머리 위로 뻗었다. 손가락 끝에서 푸르스름한 빛무리가 희미하게 피어올랐다. 환영의 장갑이 뿜어내는 가짜 축복이었다. 빛이 강해질수록 연우의 시야는 붉게 점멸했다. 내장이 한데 엉켜 타버리는 것 같은 극심한 고통에 눈앞이 번쩍였다. 전신이 잘게 떨렸으나 의복의 두꺼운 장식이 그 흔들림을 간신히 가려주었다.
"충분한가."
목소리가 갈라져 나오지 않도록 온 힘을 다해 성대를 눌렀다. 공작은 눈을 가늘게 뜨며 그 빛을 지켜보았다. 한참 후에야 그는 고개를 숙이며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아까보다 훨씬 짙어져 있었다. 공작이 물러가는 발소리가 멀어질수록 연우의 의식도 서서히 흐려졌다. 손끝에서 피어오르던 빛이 명멸하다가 재가 되어 바스러졌다.
육중한 문이 닫히는 소리가 정막을 깼다. 연우는 참았던 숨을 몰아쉬며 책상 위로 상체를 무너뜨렸다. 억눌렀던 기침이 터져 나오며 뜨거운 비린내가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하얀 카펫 위로 검붉은 선혈이 점점이 흩뿌려졌다. 장갑을 낀 왼손이 경련하며 책상 모서리를 긁어내렸다. 손톱 밑이 터져 피가 배어 나왔으나 환영의 장갑이 주는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고통은 멈추지 않고 파도처럼 밀려왔다. 피의 계약으로 얽힌 카이델이 지금 어디선가 즐거움을 느끼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가 느끼는 쾌락은 연우에게 물리적인 통증으로 치환되어 돌아왔다. 연우는 피 섞인 침을 뱉어내며 바닥을 기었다. 눈물이 고인 시야 사이로 누군가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그림자는 일렁이며 서서히 연우의 머리맡을 점령했다.
"이런, 너무 무리하셨네요."
그림자 속에서 나타난 시안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는 연우의 곁으로 다가와 차가운 손으로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신음조차 밖으로 새 나가지 못하게 하려는 배려였으나 손길은 지나치게 강압적이었다. 연우는 시안의 품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시안의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굳은살이 뺨의 피부를 거칠게 문질렀다.
시안의 시선은 바닥에 떨어진 핏자국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는 연우의 등을 토닥이며 다른 쪽 손을 천천히 폈다. 시안의 손바닥 위에서 금색 동전 하나가 미끄러지듯 바닥으로 떨어졌다. 챙그랑 소리를 내며 구르던 동전이 연우의 코앞에서 멈췄다. 거기에는 방금 나간 벨로스 공작의 문장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동전의 날카로운 테두리가 연우의 손등을 스쳤다.
시안은 바닥에 떨어진 동전을 발로 지그시 밟으며 연우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구두 굽 아래에서 금속이 일그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연우는 초점이 흐릿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시안의 표정에는 평소의 가벼운 농담이 한 톨도 남아 있지 않았다. 차가운 대리석 바닥의 냉기가 연우의 뺨을 타고 뇌수까지 전달되는 기분이었다.
"이걸 어디서 주웠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시안이 몸을 숙여 연우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갖다 댔다. 축축한 숨결이 닿자 소름이 돋았다. 연우는 대답 대신 거친 숨을 몰아쉬며 시안의 소매를 붙잡았다. 하지만 시안은 그 손을 가볍게 털어내며 주머니에서 낡은 리본 하나를 더 꺼냈다. 잿빛 하수구의 흙먼지가 잔뜩 묻은, 연우가 매일 밤 몰래 품에 안고 자던 여동생의 유품이었다.
연우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손끝이 리본을 향해 허공을 저었으나 시안은 그것을 높게 들어 올렸다. 고통으로 마비되었던 감각이 공포로 인해 다시금 날카롭게 살아났다. 시안의 입가에 얇은 미소가 번졌다. 그것은 조력자의 것이라기엔 지나치게 비릿하고 잔혹한 종류의 것이었다. 연우는 목 안에서 끓어오르는 비명을 억누르며 바닥을 긁었다.
"동생분은 아주 안전한 곳에 모셔뒀습니다. 공작님의 배려 덕분이죠."
시안은 리본을 다시 품 안에 갈무리하더니 연우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마치 주인을 달래는 충견 같은 손길이었으나 전해지는 온기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연우는 자신의 심장이 아래로 툭 떨어지는 감각을 느꼈다. 카이델의 고통이 공유되는 낙인이 가슴 중앙에서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멀리 떨어진 침소에서 카이델의 기괴한 웃음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이제 우리가 누구 말을 들어야 할지 정해야 할 시간이에요."
시안이 연우의 목덜미를 움켜쥐며 상체를 강제로 일으켰다. 시선이 허공에서 사정없이 맞물렸다. 연우는 자신의 정체가 이미 공작에게 완전히 발가벗겨졌음을 직감했다. 시안의 손등에 솟은 핏줄이 그의 배신을 증명하듯 꿈틀거렸다. 공작의 인장이 찍힌 동전이 연우의 무릎 아래에서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대답하세요, 연우 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