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화. 선택
공명(Resonance)의 시대
수요일. 14시. KCA 7층. 면담실 B.
도하는 문 앞에 서 있었다. 며칠 전 왔던 곳이었다. 같은 문. 같은 형광등. 같은 차가운 공기. 손을 쥐었다. 파동이 흔들리고 있었다. 어제부터. 복도에서 백서윤의 말을 들은 뒤부터.
문을 열었다.
백서윤이 앉아 있었다. 테이블 맞은편. 태블릿은 없었다. 손이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었다. 깍지를 끼지 않은 채. 열린 자세. 데이터를 앞세우던 사람이, 오늘은 빈손으로 앉아 있었다.
도하가 앉았다.
침묵이 3초 흘렀다.
"찾았다고 했죠."
도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처음이었다. 백서윤과의 대화에서 도하가 먼저 시작하는 것.
백서윤이 도하를 보았다. 유리 같은 눈. 어제보다 금이 깊었다. 밤새 무언가를 확인한 사람의 눈.
"찾았어."
"누군데요."
"조건이 있어."
도하의 손끝이 멈추었다.
"조건."
"이 정보를 줄게."
백서윤이 도하를 똑바로 보았다.
"대신, 비승인 가이딩 기록을 자진 보고해."
도하는 백서윤을 보았다. 자진 보고. 비승인 5건을 도하 스스로 KCA에 공식 제출하는 것. 그것은 계약 위반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인정하면 계약이 해지된다. 도하가 아크를 떠나게 된다.
"왜요."
"E급의 비인가 가이딩은 위험해."
백서윤의 목소리가 낮았다. 경멸이 아니었다. 확신에 가까운 톤이었다.
"교본에 없는 주파수로 S급 신경계에 접근하는 거잖아. 검증되지 않은 방식이야."
"작동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백서윤이 테이블 위에서 손가락을 한 번 두드렸다. "하지만 누적되면 어떻게 될지 몰라."
백서윤이 도하를 보았다.
"에스퍼 신경계에 저대역 파동이 장기간 축적되면. 데이터가 없어."
도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백서윤의 말이 틀리지 않았으니까. 120Hz의 장기 누적 효과는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도하의 파동이 강진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강진을 지키는 건 시스템이야."
백서윤이 말했다.
"너 같은 예외가 아니라."
그 말이 도하의 안에서 무언가를 건드렸다. 예외. 시스템이 도하를 분류하는 단어. 예외는 결함의 다른 이름이었다.
"그리고."
백서윤이 잠깐 멈추었다. 목소리가 한 톤 더 낮아졌다.
"나도 가이드야. S급이든 E급이든."
도하는 백서윤을 보았다. 이 사람의 눈에 있는 것이 처음으로 선명하게 보였다. 경멸이 아니었다. 제거하려는 것도 아니었다. 이 사람은 진심으로 위험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검증되지 않은 것이 S급의 신경계에 닿고 있다는 것을. 가이드로서.
"생각해볼게요."
도하가 답했다. 일어섰다.
백서윤이 도하를 보았다. 거절할 줄 알았다는 눈이 아니었다. 생각해본다는 답을 예상했다는 눈이었다.
"내일까지."
백서윤이 말했다.
"내일까지 답해. 그러면 이름을 줄게."
도하는 문을 열고 나갔다.
복도를 걸었다. 형광등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발소리가 울렸다. 도하의 발소리만.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 자진 보고하면 계약이 해지된다. 도하가 떠난다. 강진의 두통이 돌아온다. 18명의 가이드가 실패한 것처럼, 강진은 다시 혼자가 된다. 진통제로 버티는 날들.
자진 보고하지 않으면 이름을 알 수 없다. 7년 전. 에덴. 구하려다 파동이 뭉개진 날. 그 사람이 누구였는지.
두 가지가 저울 위에 있었다. 이름과, 이 자리.
아크. 52층.
현관에 들어섰다. 슬리퍼를 신었다. 260. 한 달 반의 눌린 자국.
거실에 강진이 있었다.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서류를 보고 있는 듯했다. 도하가 들어오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도하가 강진을 보았다.
오래 보았다.
처음으로, 이 시선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도하 스스로 알았다. 재는 시선이 아니었다. 확인하는 시선도 아니었다. 잡고 있는 시선이었다. 눈으로 잡고 있는 것. 이 사람을. 이 공간을. 한 달 반 동안 쌓인 것을.
강진이 도하를 보았다. 도하의 눈에서 무언가를 읽었다. 뭔지는 모를 것이었다. 도하도 몰랐으니까.
"뭐래."
강진이 물었다. 백서윤을 만나고 온 것을 알고 있었다. 어제 엘리베이터에서.
"…생각할 게 생겼습니다."
"뭔데."
도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강진이 2초 동안 도하를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렸다. 묻지 않았다.
도하는 부엌으로 갔다. 컵 두 개. 물. 강진 쪽에 하나. 자신 쪽에 하나.
강진이 컵을 받았다. 마시지 않았다. 컵을 쥐고 있었다.
"가이딩 시간이에요."
도하가 말했다. 수요일. 정기. 6건째.
강진이 일어섰다. 가이딩 공간으로 걸어갔다. 도하가 따라갔다.
간접등. 흡음재 벽. 모니터의 초록 점.
강진이 앉았다. 손바닥이 뒤집혔다. 무릎 위.
도하가 앉았다. 손을 올렸다.
손끝이 닿았다.
저주파를 보냈다. 120Hz 이하. 아래로.
오늘은 달랐다.
파동이 깊었다. 이유를 모르겠지만 깊었다. 평소보다 낮은 곳까지 내려갔다. 80Hz. 60Hz. 도하가 의식적으로 낮춘 것이 아니었다. 몸이 먼저 갔다. 손끝이 먼저 열렸다. 마치 마지막인 것처럼. 이것이 마지막 가이딩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손끝이 알고 있는 것처럼.
강진의 방어기제가 열렸다. 열린 것이 아니라, 도하의 파동이 너무 깊어서 방어기제의 아래를 통과한 것이었다. 벽의 기초 아래. 암반 아래. 지하수보다 더 깊은 곳.
강진의 미간이 풀렸다. 평소보다 빠르게. 3초가 아니라 1초. 호흡이 깊어졌다. 어깨가 내려갔다. 두통이 멈추었다.
세상이 고요해졌다.
도하는 느꼈다. 손끝에서. 강진의 안에서 올라오는 것을. 일요일의 공명 역류와 같았지만, 오늘은 분노가 아니었다. 차갑지 않았다. 따뜻했다.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것. 에스퍼의 감각이 가이드에게 전하는, 말이 되지 않은 것.
안도.
강진이 느끼고 있는 것이 안도라는 것을 도하는 알았다. 파동이 닿았을 때의 안도. 두통이 멈출 때의 안도.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 아래에 더 있었다. 안도보다 깊은 곳에. 도하의 파동이 닿는 것에 대한. 도하가 여기 있는 것에 대한.
도하의 눈가가 뜨거워졌다. 며칠 전 물과 함께 삼킨 것이 다시 올라왔다. 이번에는 삼키지 못했다. 삼키지 않았다.
30분이 지났다.
도하가 손을 뗐다.
뗄 때였다. 강진의 손끝이 도하의 손끝을 스쳤다. 도하가 손을 거두는 찰나에. 강진의 검지가 도하의 손가락 끝을 따라갔다. 1센티미터. 아주 짧은 접촉. 행사장 허리 1센티미터와 같은 거리. 하지만 이번에는 닿았다.
우연이 아니었을 수도 있었다.
도하의 손이 멈추었다. 떼어진 상태에서. 공중에서. 강진의 손끝이 닿았던 곳에 온기가 남아 있었다.
강진의 눈이 열려 있었다. 도하를 보고 있었다. 도하의 손끝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하가 일어섰다. 방으로 가려 했다.
"도하."
낮은 목소리. 강진이 도하를 불렀다.
도하가 멈추었다. 돌아보지 않았다.
"계속 해."
두 단어였다.
계약 조항이 아니었다. 횟수가 아니었다. 승인도 비승인도 아니었다. 그냥. 계속 해. 여기에. 이것을. 이 손을.
도하는 돌아보았다.
강진이 앉아 있었다. 소파에. 손바닥이 아직 위를 향한 채. 도하의 손이 떠난 자리를 비운 채. 그 빈 손바닥이 말하고 있었다. 강진의 입이 하지 못하는 말을.
도하는 강진을 보았다.
이 사람의 빈 손바닥. 어린 강진이 훈련실에서 허공을 향해 열었던 손바닥. 도하가 멘탈 멜트에서 본 기억. 잡아줄 사람이 없었던 손. 지금 그 손이 도하를 향해 열려 있었다.
"네."
한 글자.
도하의 입에서 나온 것은 그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 한 글자 안에 백서윤의 제안에 대한 대답이 들어 있었다. 도하는 아직 말하지 않았다. 강진에게도, 백서윤에게도. 하지만 이미 정해져 있었다.
이름을 모르는 채로 살 수 있다. 7년을 그렇게 살았다.
이 손을 놓는 것은 할 수 없다.
도하는 방으로 돌아갔다.
밤이었다. 아크의 통유리 너머로 세이프 존의 불빛이 보였다. 차폐벽이 먼 곳에 서 있었다. 서치라이트가 천천히 회전하고 있었다.
도하는 책상에 앉아 있었다. 교본은 덮혀 있었다. 에덴 사진이 교본 사이에 끼워져 있었다. 꺼내지 않았다.
핸드폰이 울렸다. 문자. 세린.
[도하야]
도하는 핸드폰을 들었다.
[나 오늘 KCA 전산에서 이상한 걸 봤어]
손끝이 차가워졌다.
[7년 전 에덴 사고 보고서]
메시지가 이어졌다. 하나씩. 천천히. 세린이 타이핑하고 있었다.
[수혜자 이름이 삭제된 게 아니야]
도하의 호흡이 멈추었다.
[덮어쓰기 된 거야]
멈추었다. 3초. 다음 메시지가 왔다.
[원래 이름이 따로 있었어]
도하는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화면이 밝았다. 세린의 메시지가 거기 있었다. 글자가 선명했다.
삭제가 아니라 덮어쓰기.
세린은 '공란'이라고 했었다. 백서윤은 '삭제'라고 했다. 하지만 둘 다 아니었다. 처음부터 비어 있었던 것도 아니고, 지워진 것도 아니었다. 이름이 있었다. 그 위에 다른 무언가가 씌워진 것이었다. 덮어쓰기. 원래 이름을 다른 값으로 대체한 것.
원래 이름이 따로 있었다.
도하는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손을 쥐었다 폈다. 파동이 흘렀다. 120Hz. 오늘 강진에게 보냈던 것보다 훨씬 불안정한 파동이 손끝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7년 전. 에덴. 도하가 구한 사람. 그 사람의 이름이 보고서에서 다른 값으로 대체되었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백서윤이 찾았다는 이름이 원래 이름인지, 덮어쓰기 된 이름인지.
그리고 도하는 이미 백서윤의 제안을 거절하기로 결정했다.
이름을 모르는 채로.
핸드폰을 다시 들었다. 세린에게 답을 쳤다.
[고마워. 조심해.]
보냈다.
그리고 핸드폰을 뒤집어 놓았다. 화면이 아래로. 강진이 며칠 전에 한 것처럼. 안 봐도 되는 것을 뒤집는 방식.
하지만 도하는 알고 있었다. 뒤집어도 거기 있다는 것을. 덮어쓰기 된 이름이. 원래 이름이. 도하의 7년이 그 안에 있다는 것을.
창밖의 서치라이트가 회전하고 있었다. 천천히. 어둠을 가르고, 돌아오고, 다시 가르고.
손끝에 두 가지가 남아 있었다.
강진의 손끝이 스쳐 간 온기.
그리고 세린의 메시지가 남긴 차가움.
도하는 창밖을 보았다. 차폐벽 너머, 아직 열리지 않은 것들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