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화. 연기
공명(Resonance)의 시대
토요일 오후. 아크의 현관에 옷이 걸려 있었다.
KCA에서 배달된 것이었다. 검은 정장 두 벌. 하나는 강진 사이즈, 하나는 도하 사이즈. 행거에 비닐이 씌워진 채로. 비닐 위에 메모가 붙어 있었다. '백야 그룹 주최 에스퍼 관계자 행사. 금일 18:00. 참석 필수. 대외적 부부 연기 조항 적용.'
도하는 메모를 읽었다. 두 번. 그리고 어제의 면담실이 떠올랐다. 형광등 아래에서 백서윤이 말했다. 당신 주변에 지워진 것이 너무 많아요. 그 말이 아직 손끝에 남아 있는데, 오늘은 웃는 얼굴을 만들어야 했다.
계약서 제9조. 대외적 부부 연기. 에스퍼 관련 공식 행사에 부부로 참석할 의무. 도하는 이 조항을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적용되는 것은 처음이었다.
강진이 거실에서 메모를 봤다.
"백야."
"아세요?"
"에스퍼 명문가 수장. 정태현." 강진의 목소리가 평평했다. 하지만 턱에 미세하게 힘이 들어갔다. "군부 쪽 사람이야."
도하는 그것을 보았다. 이 이름이 강진에게 좋은 의미가 아니라는 것.
"안 가면 안 됩니까."
"KCA 공문이야. 안 가면 계약 위반."
"계약 위반이 참 많습니다."
강진이 도하를 봤다. 도하의 입에서 자조가 나오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강진이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대신 정장 비닐을 벗겼다.
도하도 비닐을 벗겼다. 정장이 드러났다. 검은 원단. 깔끔한 재단. 에덴에서 입어본 적 없는 종류의 옷이었다.
행사장은 세이프 존 중심부의 호텔이었다.
로비에 사람이 많았다. 정장과 드레스. KCA 배지를 단 사람과 달지 않은 사람이 섞여 있었다. 에스퍼, 가이드, 관계자, 그리고 돈으로 이 세계에 들어온 사람들. 로비 한쪽에서 A급 에스퍼와 그의 가이드가 나란히 서 있었다. 가이드가 에스퍼의 팔짱을 끼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익숙하게. 오래 함께한 사람들의 거리였다.
도하는 강진 옆에 서 있었다. 강진의 정장이 어깨에 맞았다. 맞는 정도가 아니라, 이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듯했다. S급 에스퍼의 체격은 정장이 가장 잘 드러내는 종류였다.
도하의 정장도 맞았다. 사이즈는. 하지만 도하의 몸에서 정장은 빌려 입은 것처럼 보였다. 마른 어깨. 얇은 손목. 검은 원단이 도하를 더 창백하게 만들었다.
나란히 서 있었다. 부부로. 하지만 손 하나 잡지 않고 있었다. 30센티미터의 거리. 팔꿈치가 닿을 듯 말 듯한 간격. 14화의 문 5센티미터보다 넓었지만, 사람들이 보고 있다는 것이 그 거리를 더 좁게 만들었다.
"차강진."
목소리가 왔다. 낮고 무거운 남자 목소리. 도하가 고개를 돌렸다.
남자가 다가오고 있었다. 육십대. 은발. 체격이 크고 얼굴에 주름이 깊었다. 하지만 주름이 나이가 아니라 권력으로 보이는 종류의 얼굴이었다. 그 뒤에 수행원 두 명이 따르고 있었다.
강진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아까와 같은 반응. 하지만 이번에는 더 단단했다.
"정회장님."
강진의 목소리가 수직이었다. 예의는 있지만 거리가 있는 톤.
정회장이 강진을 훑었다. 위에서 아래로. 그리고 옆으로. 도하에게.
"이 사람이?"
"이도하입니다."
도하가 고개를 숙였다. 정회장의 시선이 도하 위에 머물렀다. 무게가 있는 시선이었다. 평가하는 시선이 아니라, 이미 평가를 끝낸 시선.
"E급이라고 들었는데."
도하는 고개를 들었다.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이니까. 사실에 대답은 필요하지 않았다.
정회장이 피식 웃었다.
"S급의 배우자가 E급이라니." 주변의 시선이 모였다. 정회장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알고 하는 것이었다. "차강진도 많이 약해졌군."
공기가 얇아졌다.
강진의 손이 주머니 안에서 쥐어지는 것을 도하는 보았다. 정장 주머니의 천이 당겨졌다. 이 사람이 지금 참고 있다는 것. S급의 참음은 주변 공기를 미세하게 진동시켰다. 도하의 피부 위로 소름이 올라왔다. 에스퍼의 감정 방출. 아주 미미한.
도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재미없는 게 더 오래 갑니다."
정회장이 도하를 보았다. 웃음이 멈추었다.
"뭐?"
"재미없는 조합이 오래 간다는 뜻입니다."
도하의 목소리가 담담했다. 팩트를 읽는 톤. 공손했지만 물러서지 않은. 에덴에서 교관이 "E급은 배정 대상 외야"라고 했을 때에도 도하는 이 톤이었다. 울지 않고, 화내지 않고,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이되 거기 서 있는 것.
정회장의 눈이 좁아졌다. 도하를 다시 보았다. 이번에는 평가가 있었다.
강진이 움직였다. 반 걸음. 도하 쪽으로. 30센티미터가 15센티미터가 되었다.
"약해진 게 아니라 고른 겁니다."
강진이 말했다. 정회장을 보면서. 목소리가 낮았다. 평평했다. 하지만 그 평평함 아래에 무언가가 깔려 있었다. 경고.
정회장이 강진을 보았다. 3초. 웃음이 돌아왔다. 하지만 눈이 웃지 않았다.
"고른 거라." 정회장이 고개를 돌렸다. 도하를 한 번 더 보았다. 재는 눈이었다. "재미있는 조합이긴 하군."
정회장이 돌아섰다. 수행원들이 따랐다. 사라졌다. 하지만 '재미있는 조합'이라는 말이 남았다. 관심이었다. 관심은 무관심보다 위험했다.
도하는 숨을 내쉬었다. 모르는 사이에 멈추고 있었다.
강진이 도하를 보았다. 짧게.
"괜찮아?"
"괜찮습니다."
"또 그 말이야."
"사실인데요."
"사실이면 숨을 참지는 않지."
도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강진이 도하의 호흡이 멈추었던 것을 알고 있었다. S급의 감각.
행사가 이어졌다. 칵테일. 인사. 악수. 도하는 강진 옆에 서서 고개를 숙이고, 이름을 말하고, 미소를 짓는 것을 반복했다. 미소는 에덴에서 배운 것이 아니었다. 지금 도하가 쓰고 있는 것은 계약서 제9조가 요구하는 미소였다.
사진 촬영 요청이 왔다.
행사 공식 촬영이었다. 에스퍼-가이드 커플이 나란히 서서 찍는 것. SNS 업로드용이었다. KCA 홍보팀 직원이 카메라를 들고 다가왔다.
"차강진 에스퍼, 이도하 가이드. 커플 촬영 부탁드립니다."
강진이 도하를 보았다. 도하가 강진을 보았다. 카메라가 앞에 있었다.
강진이 움직였다. 손이 올라왔다. 도하의 허리 쪽으로.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서 멈추었다.
손바닥이 도하의 허리 뒤에 있었다. 닿지 않았다. 1센티미터. 옷 위에서. 하지만 도하는 그 1센티미터를 느꼈다. 체온이 옷감을 통과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존재가 통과했다. 이 사람의 손이 거기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 도하의 호흡이 한 번 멈추었다.
짧게. 아주 짧게.
플래시가 터졌다.
"감사합니다."
촬영이 끝났다. 강진의 손이 내려갔다. 도하는 호흡을 되찾았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었다. 멈춘 것이 반 초도 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강진은 눈치챘을 수도 있었다. 이 사람은 감각이 예민한 사람이었으니까. 도하의 호흡이 반 초 멈춘 것을, 옆에 서 있는 S급의 감각이 잡아냈을 수도.
강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행사가 끝났다. 밤이었다.
아크로 돌아가는 차 안이었다. KCA 배차. 강진이 앞에, 도하가 뒤에 탔다. 운전은 KCA 기사가 했다. 창밖으로 세이프 존의 불빛이 흘러갔다.
침묵이었다.
강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앞을 보면서.
"저 사람 앞에서."
도하가 창밖에서 눈을 거두었다.
"괜찮았어?"
도하는 강진의 뒷머리를 보았다. 짧은 머리카락. 정장 깃 위로.
"괜찮습니다."
강진이 피식 웃었다. 아주 짧게. 소리 없이. 어깨가 한 번 미세하게 움직인 것으로 알 수 있었다.
도하는 그것을 보았다. 이 사람이 웃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한 달 동안. 미간의 주름, 닫힌 입, 평평한 표정. 그것이 강진의 기본값이었다. 그런데 지금 어깨가 움직였다.
강진이 앞을 보면서 말했다.
"그 말, 진짜인 적 있어?"
도하가 멈추었다.
"뭐가요."
"괜찮다는 말."
창밖의 불빛이 흘러갔다. 도하는 대답하지 못했다. 괜찮다는 말. 도하가 가장 많이 쓰는 말. 에덴에서부터. 배정 거절당했을 때. 매칭 부적합 판정받았을 때. 강진의 두통을 멈추고 관자놀이가 욱신거릴 때. 정회장이 E급이라고 했을 때.
한 번도 진짜였던 적이 있는가.
"…있었을 겁니다."
"언제."
도하는 창밖을 보았다. 불빛이 눈 위를 스쳐 갔다.
"기억 안 납니다."
강진이 다시 웃었다. 이번에도 짧게. 하지만 아까보다 분명하게. 콧바람이 나왔다. 웃음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작고, 한숨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가벼운 것.
"솔직한 거, 그건 좋아."
도하는 강진의 뒷머리를 보았다. 이 사람이 '좋아'라는 단어를 쓰는 것을 처음 들었다. 무엇에 대해서든. 두통이 멈춰서 좋다고도, 가이딩이 좋다고도 한 적이 없었다. 처음이었다.
도하는 그 단어를 어디에 놓아야 할지 몰랐다. 주머니에 넣기에는 모양이 이상하고, 버리기에는 온기가 남아 있는 것.
차가 아크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52층. 현관. 슬리퍼. 각자의 방.
도하는 자신의 방에서 정장을 벗었다. 행거에 걸었다. 검은 원단에 주름이 잡혀 있었다. 허리 쪽. 강진의 손이 닿을 듯 말 듯 했던 자리.
닿지 않았다. 1센티미터. 하지만 그 1센티미터가 도하의 호흡을 멈추게 했다는 것을, 도하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계약서의 어느 조항에도 적혀 있지 않다는 것도.
창밖으로 세이프 존의 밤이 보였다. 불빛이 잔잔했다. 차 안에서 보던 불빛과 같은 것이 먼 곳에서 흘러가고 있었다.
강진이 '좋아'라고 했다. 도하의 솔직함이.
괜찮다는 말이 진짜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도하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답했다.
하지만 지금, 이 방에서, 정장을 벗으며, 강진의 어깨가 움직이던 것을 떠올리는 이 순간이.
괜찮은 것에 가장 가까운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도하는 그 생각을 접었다. 접히지 않았다. 모서리가 맞지 않았다.
정장 허리 쪽의 주름이, 어둠 속에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거기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