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화. 기억
공명(Resonance)의 시대
금요일 오전이었다. 정기 가이딩 전.
도하의 핸드폰이 울렸다. KCA 발신이었다. 담당관이 아닌 번호.
"이도하 가이드님, KCA 정보관리실입니다."
사무적인 여자 목소리였다.
"에덴 수료 기록에 열람 요청이 접수되었습니다. 고지 의무에 따라 안내드립니다."
도하의 손끝이 멈추었다.
"누가 요청했습니까."
"S급 가이드 백서윤. 열람 사유는 '가이딩 효율 비교 연구'입니다."
전화가 끊겼다.
도하는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화면이 꺼졌다. 검은 화면 위에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백서윤. S급 가이드. 아크에 장비를 설치하며 도하를 지나쳤던 사람. "E급이 S급을 안정시킨다고?" 그 말을 한 사람이 지금 도하의 에덴 기록을 열람하고 있었다.
E�� 판정. 과사용 사고. 파동 측정 이력. 졸업 성적. 배정 거절 기록. 에덴에서의 11년이 데이터로 정리되어 있을 것이었다. 그 데이터가 백서윤의 손에 있었다.
핸드폰이 다시 울렸다. 문자였다.
[발신: KCA 가이드관리과]
[백서윤 가이드가 면담을 요청합니다. 금일 14:00. KCA 7층 면담실 B.]
도하는 문자를 읽었다. 두 번.
거실에서 강진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 관자놀이를 누르고 있었다. 사흘째. 진통제로 버티고 있었다. 오늘이 금요일이었다. 정기 가이딩 날. 3번째 비승인 기록이 쌓이는 날.
"강진 씨."
강진이 고개를 돌렸다.
"오늘 가이딩 후에 KCA에 가야 합니다."
"왜."
"면담이 있어서요."
"누구랑."
"…가이드관리과에서요."
강진의 눈이 좁아졌다. 도하의 표정을 읽었다. 아무것도 없는 표면. 단정하고 평평한. 하지만 강진은 한 달 동안 그 표면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배우고 있었다.
"같이 갈까."
"아뇨. 혼자 가겠습니다."
강진이 도하를 보았다. 3초. 고개를 돌렸다.
"가이딩부터 해."
손바닥이 뒤집혔다. 무릎 위. 말 대신 손.
가이딩을 마쳤다. 30분. 비승인 기록 3건.
도하는 아크를 나섰다.
KCA 7층. 면담실 B.
문을 열었다. 작은 방이었다. 테이블 하나, 의자 둘. 창이 없었다. 형광등이 희고 고르게 빛나고 있었다. 재검증실과 비슷한 공기. 차갑고 건조한.
백서윤이 앉아 있었다.
처음 본 것은 아크에서였다. KCA 장비 설치 때 스쳐 지나갔다. 그때는 멀리서 봤다. 지금은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었다.
백서윤은 도하의 기억보다 날카로운 인상이었다. 단정한 머리. 고른 이목구비. 눈이 맑았다. 맑다는 것이 따뜻하다는 뜻이 아니었다. 잘 닦인 유리의 맑음이었다. 투명하지만 차가운.
백서윤 앞에 태블릿이 놓여 있었다. 화면에 데이터가 떠 있었다. 도하의 이름이 보였다. 이도하. 에덴 3기. E급.
"앉으세요."
백서윤의 목소리는 정확했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톤. 경어를 쓰고 있었지만 위에서 내리는 경어였다.
도하가 앉았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백서윤이 태블릿을 돌려 도하 쪽으로 밀었다. 화면에 그래프가 있었다. 파동 측정 이력. 에덴에서의 11년치. 선이 하나 그어져 있었다. 거의 평평한 선. 120Hz 부근. 한 번도 올라간 적이 없었다.
"당신의 파동 이력입니다."
도하는 그래프를 보았다. 자신의 11년이 한 줄의 선이 되어 있었다. 평평하고 낮은 선.
"120Hz 이하. 일반 에스퍼의 인지 가능 대역은 2,000Hz 이상이에요." 백서윤이 그래프를 가리켰다. "이 주파수로는 어떤 에스퍼에게도 닿을 수 없어요. 교본에도 그렇게 적혀 있죠."
"네."
"그런데 닿고 있어요."
백서윤이 도하를 보았다. 유리 같은 눈.
"어떻게요?"
도하는 백서윤을 보았다. 이 사람은 답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답을 들으려는 것이었다. S급 가이드의 자존심이 요구하는 절차. E급이 자신이 하지 못한 것을 어떻게 했는지, 입으로 말하게 하는 것.
"통과한 게 아닙니다."
도하가 답했다. 담담하게.
"아래로 스며든 겁니다."
백서윤의 손가락이 태블릿 위에서 멈추었다.
"스며들었다?"
"방어기제를 넘는 게 아니라, 방어기제가 인식하지 못하는 깊이로 갑니다."
백서윤이 도하를 보았다. 3초. 5초. 유리 같은 눈에 처음으로 균열이 생기는 것을 도하는 보았다. 이해할 수 없다는 균열이 아니었다. 이해하고 싶지 않다는 균열이었다.
"그게 가이딩이에요?"
"모르겠습니다."
"교본에 없는 방식으로?"
"교본에 제 주파수가 없으니까요."
백서윤이 입을 다물었다. 태블릿을 가져왔다. 화면을 넘겼다. 다른 데이터가 떴다. 도하는 거꾸로 읽을 수 없었지만, 백서윤의 표정이 바뀌는 것을 보았다. 유리가 한 겹 더 맑아지는 것. 차가움이 깊어지는 것.
"에덴 사고 보고서."
백서윤의 톤이 달라져 있었다. 질문이 아니라 놓는 것이었다. 테이블 위에 무언가를 내려놓듯.
"7년 전. 졸업 한 달 전에 당신이 능력을 과사용했어요."
도하의 손끝이 차가워졌다.
"네."
"누군가를 구하려다."
"네."
"그 사고로 당신의 표면 파동이 손상돼서 E급이 됐어요."
"네."
세 번의 '네'가 연속으로 나왔다. 사실이었으니까. 모두 사실이었으니까.
백서윤이 태블릿을 내려놓았다. 도하를 똑바로 보았다.
"그때 구한 사람이 누군지 알아요?"
"모릅니다."
"보고서에도 없어요."
도하가 멈추었다.
"수혜자 항목이 비어 있어요."
세린이 한 말과 같았다. 카페에서. 며칠 전. 수혜자 공란. 이름이 없다.
하지만 백서윤은 세린이 아니었다. 세린은 업무 중에 발견했다. 백서윤은 찾으러 간 것이었다.
"왜 그걸 찾으셨습니까."
도하가 물었다. 처음으로 도하가 먼저 질문했다.
백서윤의 눈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었을 수도 있었다. 혹은, 예상했지만 이 타이밍은 아니었을 수도.
"당신이 이상하니까요."
백서윤이 답했다. 솔직한 답이었다.
"E급이 S급을 안정시키는 건 말이 안 돼요. 교본으로도, 데이터로도." 백서윤이 태블릿을 닫았다. "그래서 원인을 찾으려고 했어요. 에덴 기록에."
"찾았습니까."
"아니요." 백서윤이 고개를 저었다. "대신 다른 걸 찾았어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형광등이 희게 빛나고 있었다. 면담실의 공기가 차가웠다.
"7년 전 보고서."
백서윤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수혜자 이름이 지워져 있어요."
도하는 그 말을 들었다. 세린에게 들었을 때와 같은 내용. 하지만 무게가 달랐다. 세린은 걱정을 담았다. 백서윤은 데이터를 담았다.
"지워진 거예요. 삭제된 거. 처음부터 없었던 게 아니라."
백서윤이 도하를 보았다.
"사고 조사에 수혜자 기록은 필수예요. 누군가 의도적으로 지운 거예요."
도하의 손이 무릎 위에서 쥐어졌다. 펴지지 않았다.
"왜 저한테 말씀하시는 겁니까."
백서윤이 잠깐 멈추었다. 태블릿을 가방에 넣었다. 의자에서 일어섰다.
"당신이 뭔지 모르겠으니까요."
백서윤이 문 앞에 섰다. 돌아보았다.
"E급인데 S급을 안정시키고. 교본에 없는 방식을 쓰고. 사고 보고서의 수혜자가 삭제돼 있고."
잠깐 멈추었다.
"당신 주변에 지워진 것이 너무 많아요, 이도하 가이드."
백서윤이 나갔다. 문이 닫혔다.
도하는 면담실에 혼자 남았다.
형광등이 빛나고 있었다. 희고 고른 빛. 에덴의 복도와 같은 빛이었다. 7년 전의 복도. 형광등이 깜빡이고, 누군가의 등이 보이고, 손을 뻗었다. 닿았다. 파동이 몸 전체를 통과했다. 시야가 흐려졌다. 바닥이 가까워졌다. 깨어났을 때 의무실이었다. 교관이 서 있었다. "E급 재판정." 구한 사람은 이미 없었다.
이름을 물었다. 교관은 대답하지 않았다. 기록에도 없었다.
7년 동안 그것을 생각하지 않았다. 기억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도하에게 중요한 것은 닿았다는 것이었지, 누구에게 닿았는지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백서윤이 지적했다. 지워진 것이 너무 많다고.
세린은 수혜자가 공란이라고 했다. 백서윤은 삭제라고 했다. 공란과 삭제는 달랐다. 공란은 빈 것이고, 삭제는 채워진 뒤 지운 것이다.
누군가가 채우고, 누군가가 지웠다.
도하는 면담실에서 일어섰다. 복도로 나왔다. KCA 7층 복도. 형광등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사람들이 지나갔다. KCA 배지를 단 사람들. 아무도 도하를 보지 않았다.
아크로 돌아왔다. 52층. 현관. 슬리퍼. 260. 한 달치 눌린 자국.
거실에 강진이 있었다. 소파가 아니라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도하가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표정을 읽었다.
"뭐래."
강진이 물었다. 누구를 만났는지 묻지 않았다. 도하의 표정을 먼저 읽는 사람이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거짓말."
두 글자. 이 단어를 강진이 도하에게 쓰는 것은 두 번째였다.
도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신발을 벗고, 슬리퍼를 신고, 부엌으로 갔다. 컵 두 개를 꺼냈다. 물을 따랐다. 강진 쪽에 하나. 자신 쪽에 하나.
강진이 컵을 받았다.
도하는 물을 마셨다. 차가웠다. 면담실의 공기보다는 따뜻했다.
"강진 씨."
"뭐."
"7년 전에 에덴에서 사고가 있었어요."
강진이 컵을 내려놓았다.
"제가 누군가를 구하려다 능력을 과사용했어요."
강진이 도하를 보았다.
"그때 파동이 손상돼서 지금의 등급이 됐습니다."
강진의 시선이 도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말을 기다리는 자세.
"그때 구한 사람의 이름이 기록에서 지워져 있대요."
강진의 눈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누가 말했어."
"면담에서요."
강진이 도하를 보았다. 오래. 그리고 입을 열었다.
"찾고 싶어?"
도하는 그 질문 앞에서 멈추었다. 찾고 싶은가. 7년 동안 찾지 않았다. 기억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지워졌다는 것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은 달랐다.
"…모르겠습니다."
강진이 물컵을 들었다. 마셨다. 내려놓았다.
"알면 말해."
두 번째로 이 사람이 같은 말을 했다. 가이딩 공간에서. '못 하게 되면 말해.' 그리고 지금. '알면 말해.' 강진은 해결을 제안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들을 준비가 돼 있다는 것을 놓는 사람이었다.
도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방으로 돌아갔다. 문을 닫았다.
책상 위에 교본이 있었다. 교본 사이에 에덴 사진. 꺼냈다. 세린의 웃는 얼굴. 그리고 도하 자신의 16살 적 얼굴. 에덴 교복. 줄무늬 없는 흰 셔츠.
사진 속의 도하는 웃고 있지 않았다.
7년 전. 이 사진이 찍힌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도하는 누군가를 구했다. 그리고 파동이 뭉개졌다. E급이 되었다. 구한 사람의 이름은 사라졌다.
당신 주변에 지워진 것이 너무 많아요. 백서윤은 그렇게 남기고 갔다.
도하는 사진을 교본에 다시 끼웠다.
창밖의 세이프 존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차폐벽 너머로 서치라이트가 켜지기 시작했다. 낮에서 밤으로 넘어가는 시간. 빛이 줄고, 그림자가 늘어나는.
손끝에 파동이 남아 있었다. 120Hz. 사고 이후 고정된 주파수.
이것이 손상인지, 결과인지, 설계인지.
그 답이 지워진 이름 안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