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로그
서버실은 항상 차갑다. 감정까지도.
박이현은 자리에 앉자마자 내부 메신저를 확인했다. 상부 발신. 보안 등급 2. 메시지는 짧았다.
'SEQUENCE 0047 관련 로그 일체를 72시간 내 정리할 것. 미이행 시 보안 감사 대상으로 전환.'
72시간. 정리. 그 두 단어가 의미하는 것은 삭제였다. 박이현은 메시지를 닫았다. 모니터 세 개. 가운데 화면에 방금 전의 로그가 열려 있었다.
SEQUENCE 0047 / CHECKSUM MISMATCH / OVERRIDE ORIGIN: [REDACTED]
그가 지우지 않은 것이었다. 지울 수 있었는데. 지우지 않았다. 72시간 전에도 지울 수 있었다. 그것이 지금 화면에 남아 있는 이유였다.
냉각 팬의 소리가 균일하게 울렸다. LED가 초록과 주황을 교대로 깜빡였다.
박이현은 로그를 스크롤했다. 이도하-차강진 조합. 접수 이후 세 번의 오라클 판정이 있었다. 세 번 모두 부적합 플래그가 먼저 떴다. 그리고 세 번 모두 그 위에 덮어씌워졌다. MATCH_0_OVERRIDE. 파일명이었다. 혹은 명령이었다.
가장 오래된 것은 이 조합이 처음 접수되던 날이었다. 그날 박이현은 출근했다. 하지만 그 OVERRIDE 명령이 어디서 내려왔는지는 로그에서 지워져 있었다. ORIGIN: [REDACTED].
삭제는 한 번이면 충분했다. 흔적만 지우면. 그런데 누군가 완전히 지우지 않았다. 파일 본체는 삭제했지만, CHECKSUM 값이 맞지 않아서 로그에 오류가 남은 것이었다. 실수였거나, 급했거나. 아니면 일부러 남긴 것이었거나.
박이현은 세 번째 가능성에서 손이 멈추었다.
내부고발이라는 단어가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했다. 그리고 접었다. 자신의 권한 바깥이었다. 오라클 개발자는 시스템을 관리하는 사람이지, 시스템이 어떻게 쓰이는지를 결정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SEQUENCE 0047에서 오늘 안정화 데이터가 올라왔다.
박이현은 그것을 열었다. 파동 출력 120Hz 이하. 비표준 저주파 대역. 감각 부하 지수 정상 하단. 심박수 72. 두통 수치 감지 불가.
E급 가이드의 파동이 S급 에스퍼를 안정시켰다는 것이 실시간 데이터로 남아 있었다. 오라클이 0%를 유지하는 동안.
박이현은 의자를 뒤로 밀었다. 서버실 천장을 보았다. 냉각 팬이 돌고 있었다.
0%는 숫자가 아니라 명령이었다.
접근 권한 리스트를 열었다. 내부 계정들이 있었다. KCA 관리관. 매칭실 직원. 감사부. 그리고 — 외부 네트워크 접속 기록. IP가 마스킹되어 있었다. 하지만 접속 패턴이 군 네트워크와 일치했다.
군부였다.
박이현은 화면을 닫았다. 열었다. 다시 닫았다.
명령의 수령인은 KCA가 아니었다. KCA는 실행자였다. 명령을 내린 쪽이 따로 있었다.
박이현은 파일을 닫고 의자를 당겼다. 다시 로그 화면을 열었다. 삭제 버튼 위에 커서를 올렸다. SEQUENCE 0047. 이것을 지우면 오늘 일은 없었던 것이 된다.
커서가 버튼 위에 있었다.
박이현은 클릭하지 않았다.
대신 화면을 최소화했다. 서랍을 열었다. USB 드라이브를 꺼냈다. 컴퓨터에 꽂았다. 폴더를 열었다. 파일을 드래그했다. SEQUENCE_0047_LOG_FULL.
복사가 진행되었다. 3초. 완료.
USB를 뺐다. 서랍에 넣었다. 잠갔다.
손끝이 차가웠다. 서버실의 냉기가 아니었다.
외부 전화가 울렸다.
발신자 표시가 없었다.
박이현은 두 번 울리는 것을 기다렸다가 받았다.
"네."
"박이현 씨. 오늘 테스트 로그 관련해서 확인할 게 있어서요."
낮은 목소리였다. 공손했다. KCA 내부 사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군부입니다. 내일 출격 건으로 직접 협의가 필요합니다. 해당 조합의 현장 투입이 확정됐습니다."
현장 투입. 언노운 존.
박이현의 손이 서랍 쪽으로 갔다. 잠근 것을 확인하는 동작이었다.
"내일 일정 확인하겠습니다."
전화를 끊었다.
서버실이 다시 조용해졌다. 냉각 팬만 울렸다.
박이현은 최소화된 로그 창을 보았다. 작업표시줄 아래. 열지 않았다. 닫지도 않았다. 그냥 두었다.
72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내일, 0%로 판정된 조합이 벽 너머로 간다.
같은 시각, 아크였다.
펜트하우스로 돌아오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강진과 도하는 나란히 서 있었다. 말이 없었다. KCA 중앙에서 아크까지의 이동 시간. 차 안에서도 말이 없었다. 엘리베이터에서도.
52층. 문이 열렸다.
강진이 먼저 나왔다. 현관 신발장을 열었다. 슬리퍼를 꺼냈다. 자신 것을 신고, 도하 것을 내려놓았다. 도하 쪽을 보지 않은 채로.
도하는 그 슬리퍼를 보았다. 내려놓는 동작이었다. 말이 없는 사람의 가장 조용한 배려. 계약 첫날의 것과 같았다.
"오늘 MANUAL 봤지."
강진이 말했다. 신발을 정리하면서. 거실 쪽을 보지 않은 채로.
"네."
"생각은?"
도하는 슬리퍼를 신었다. 들어왔다.
"오라클의 판정값이 수동으로 조정될 수 있다면, 0%는 측정 결과가 아니라 입력된 값일 수 있습니다."
강진이 도하를 돌아보았다.
"그걸 알고도."
"네."
"계속 있겠다고 했어."
도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이 이미 나와 있었다. 테스트실에서. 복도에서. 그것이 대답이었다.
강진이 거실로 들어갔다. 소파에 앉지 않았다. 창 앞에 섰다. 세이프 존의 불빛이 아래로 펼쳐졌다. 차폐벽이 먼 곳에 있었다.
"내일 임무가 있어."
도하가 멈추었다.
"언노운 존."
강진이 창밖을 보며 말했다.
"현장 검증이라고 한다. KCA 요청이고 군부가 관여했어. 너도 동행이야."
"계약서에 가이드 현장 동행 조항이—"
"있어. 제21조."
도하는 계약서를 기억했다. 42쪽. 제21조. 에스퍼의 임무 수행 시 전담 가이드의 동행은 KCA 판단에 따른다. 도하가 세 번 읽으면서 넘겼던 조항이었다. 실제로 발동될 줄 몰랐던 것.
"가이딩 장갑을 준비해."
강진이 말했다. 창밖을 보면서.
"알겠습니다."
도하가 답했다.
강진이 창에서 눈을 거두었다. 도하를 보았다. 짧게.
"두렵지 않아?"
도하는 잠깐 생각했다.
"두렵습니다."
"그런데."
"0%라도… 저는 합니다."
강진이 더 말하지 않았다. 도하도 더 말하지 않았다.
도하는 방으로 돌아갔다. 문을 닫았다. 창밖으로 차폐벽이 보였다. 서치라이트가 천천히 회전하고 있었다.
가이딩 장갑. 도하는 가방을 열었다. 에덴에서 가져온 것들. 옷 세 벌, 교본 두 권, 세면도구. 그리고 가방 맨 아래에, 에덴 졸업 때 지급된 가이딩 장갑이 있었다. 표준형. E급용. 손끝이 열려 있어서 접촉식 가이딩에 쓰는 것이었다.
도하는 장갑을 꺼냈다. 손에 끼었다. 손끝이 밖으로 나왔다.
저주파가 손끝에서 흘렀다. 여전히 거기 있었다. 120Hz 이하. 인지 불가 영역. 아무에게도 닿지 않는다고 판정받은 파동.
하지만 닿았다.
도하는 장갑을 벗었다. 손끝을 쥐었다 폈다. 차폐벽이 창밖에 서 있었다. 그 너머로 내일 가야 하는 곳이 있었다.
도하는 교본을 펼쳤다. 제9장. 에스퍼 폭주 대응. 언노운 존 가이딩 프로토콜. 읽기 시작했다.
밤이 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