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맥 안정기가 박동했다.
푸른 빛줄기가 잿빛 대지를 가르며 솟구쳤고, 칼데라의 메마른 공기가 한 박자 늦게 진동했다. 벨리알 아르스 노바는 그 떨림을 발바닥으로 읽었다. 출력 안정. 주파 정상. 지하 기단으로부터의 공명도 허용 범위 내.
손가락이 허공을 가르자 반투명한 마도 설계도가 펼쳐졌다. 기하학적 선분들이 공중에서 교차하며 무너진 외벽의 단면을 정밀하게 재현한다. 잔해의 균열 패턴, 응력 분포, 지맥과의 접점. 전부 푸른 선으로 변환되어 눈앞에 떠 있었다.
"3번 구획 외벽 잔존율 12퍼센트."
나직한 음성이었다. 보고가 아니라 독백. 벨리알은 설계도 위의 붉은 점 하나를 검지로 눌렀다. 응력 집중점. 이 지점에 하중이 가해지면 남은 벽체가 연쇄적으로 무너진다. 재건이 아니라 철거가 먼저였다.
손가락을 튕기자 설계도의 층위가 바뀌었다. 지하 1층 지맥 도관의 배치도. 안정기에서 뻗어나가는 여섯 갈래의 마력 순환로가 파란 정맥처럼 그려져 있었다. 그중 두 갈래가 점멸한다. 출력의 미세한 흔들림. 수치로는 0.7퍼센트에 불과했으나 벨리알의 눈꺼풀이 가늘어졌다.
"도관 접합부의 정렬이 0.2도 틀어졌군."
설계도를 접었다. 접힌 푸른 빛이 손끝에서 사라지기 전, 잠깐 그 빛이 손등의 핏줄을 비추었다. 핏줄 아래로 검은 마력의 흐름이 보였다.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 전장에서는 쓸모없는 유산.
지맥 안정기가 있는 중앙 영지점은 바람이 없었다. 흑요석 협곡에서 초속 30미터로 불어대는 칼바람도, 레테아 강에서 피어오르는 망각의 안개도, 이 반경 안에서는 멈춘다. 벨리알이 직접 설계한 지맥 간섭 회로가 환경을 제어하기 때문이다. 그 덕에 이 폐허 한가운데서만 섬세한 조각이 가능하고, 대리석 표면에 머리카락 한 올 굵기의 선을 새길 수 있다.
유일하게 예술이 살아남은 땅.
벨리알은 안정기에서 돌아서 무너진 성벽 쪽으로 걸었다. 잿빛 먼지가 발 아래서 부서졌다. 한때 정문이었던 자리. 아치형 석재가 반쯤 남아 하늘을 향해 이빨처럼 솟아 있었다.
석재의 표면에 손을 얹었다.
차가웠다. 마계의 대기보다도 차갑다. 돌에 깃든 마력이 완전히 소진된 것이다. 살아 있는 성이었다면 따뜻했을 표면이 지금은 시체와 같았다. 손바닥으로 돌의 결을 따라 쓸었다. 거친 단면에 손가락 끝이 긁혔고, 미세한 통증이 피부 아래로 번졌다.
"크로셀."
이름 하나를 입 밖에 놓았다. 이 정문을 지키던 경비대장.
"모르가스."
벽체 내부에 마력 순환로를 새기던 석공.
"라이자."
성의 최상층 첨탑에서 마력 관측을 담당하던 관측관. 라이자는 첨탑이 무너질 때 함께 떨어졌다고 들었다. 용사의 일격이 성 전체를 갈랐을 때, 탈출할 시간은 없었을 것이다.
벨리알의 눈이 석재 위에 머물렀다. 턱 아래 근육이 미세하게 경직되어 있었으나 그 외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바람이 없는 공간이라 먼지조차 흩날리지 않았고, 침묵이 더 무거웠다. 성벽의 단면에서 희미한 광물 냄새가 올라왔다. 철과 유황이 뒤섞인, 마계 특유의 냄새. 과거 이 성이 살아 있을 때는 마력의 온기에 묻혀 느낄 수 없었던 것이다.
손을 거두었다. 손끝에 잿빛 가루가 묻어 있었다.
외투 안쪽 주머니에서 접힌 양피지를 꺼냈다. 모서리가 닳고 접힌 자국이 깊은, 수십 번은 펼쳤다 접었을 오래된 설계도. 아버지가 남긴 것이 아니다. 벨리알 자신이 열네 살에 처음 그린 마왕성의 초안이었다. 여백에는 이름들이 빼곡했다. 크로셀, 모르가스, 라이자. 그리고 더 많은 이름들이 기울어진 필체로 적혀 있었다. 가장 최근에 쓴 이름은 아직 잉크가 마르지 않은 듯 진했다.
양피지를 다시 접어 넣었다.
"안식처를 짓겠다."
누구에게 하는 말도 아니었다. 석재 위에 남은 손자국만이 그가 이곳에 섰었다는 흔적이다. 벨리알은 돌아섰다. 망설임은 없었다.
지맥 안정기의 박동이 한 번 더 울렸다. 그때 안정기 하부의 지하 기단에서 미세한 진동이 전해졌다. 0.7퍼센트의 출력 편차가 아니었다. 지맥 자체가 흔들린 것이다. 발이 멈추었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기단의 진동은 3초 만에 멈추었으나 미간에 접힌 주름은 풀리지 않았다.
"이건 나중에 확인한다."
설계도를 다시 펼칠 시간은 없었다. 흑요석 협곡 너머에서 움직임이 감지되었기 때문이다. 안정기 외곽에 설치한 감지 룬이 네 개의 생체 반응을 포착했다. 인간. 마력 총량으로 미루어 C급.
벨리알은 감지 룬의 데이터를 손끝에 띄웠다. 네 명. 검사 둘, 궁수 하나, 사제 하나. 전형적인 C급 파티 구성이었다. 이들이 협곡의 바람을 뚫고 여기까지 왔다면 최소 4서클 이상의 보호 마법을 보유하고 있거나, 레테아 강을 건너지 않고 우회로를 찾은 것이다.
"은빛 갈기."
감지 룬이 읽어낸 파티 식별 각인. 용사 협회에 등록된 정규 파티였다. 면책 특권 보유. 마계 내에서의 살상에 대한 법적 책임이 면제된다.
벨리알은 안정기 옆 제어반에 손을 얹었다. 차가운 금속 표면에 마력을 흘려넣자 마왕성 재건 구역 전체의 내부 구조도가 떠올랐다. 완성된 구역은 전체의 18퍼센트. 그중 함정이 가동 중인 구역은 비탄의 회랑 단 하나뿐이었다.
"입구 쪽 잔해를 치우지 않은 게 다행이군."
무너진 성벽의 파편들이 자연스러운 길을 만들고 있었다. 침입자의 시선을 유도하는 동선.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잔해의 배치가 비탄의 회랑으로 향하는 경로를 가장 매력적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열린 문은 닫힌 문보다 위험하다. 건축의 기본이었다.
감지 룬의 반응이 가까워졌다. 벨리알은 중앙 영지점에서 빠져나와 회랑 상부의 관측실로 이동했다. 관측실의 바닥은 반투명한 마도 유리로 되어 있어 아래쪽 회랑의 전경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회랑이 보였다. 길이 47미터, 폭 6미터, 천장고 12미터. 양쪽 벽면에는 벨리알이 직접 조각한 마족 전사의 대리석 상이 열두 기 늘어서 있었다. 각 조각상의 눈에는 감압식 룬이 새겨져 있고, 입에서는 조건부로 독가스를 분사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리고 천장.
천장 중앙에는 순수 흑요석으로 깎아 만든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었다. 무게 2.3톤. 각 가지에 마력 증폭 룬이 새겨져 있어 평상시에는 은은한 푸른 빛을 발한다. 아름다운 조명 기구로 보이도록 만들었다. 실제로 아름답기도 하다. 다만 그 아름다움의 내부에 2.3톤의 물리적 질량이 수직 낙하할 수 있는 해제 장치가 숨겨져 있을 뿐.
"자연재해는 가호를 무시한다."
벨리알이 중얼거렸다. 손가락이 허공에서 다시 설계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회랑의 단면도. 샹들리에의 낙하 궤적, 충돌 시의 파편 산개 범위, 독가스 분사의 타이밍. 모든 변수를 선으로 그려냈다.
입구가 열렸다.
정확히는, 무너진 성벽의 틈 사이로 첫 번째 침입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은빛 갑옷을 입은 검사. 그 뒤를 이어 방패를 든 두 번째 검사, 짧은 활을 맨 궁수, 마지막으로 흰 법의를 걸친 사제가 나타났다.
"이게 마왕성이라고?"
선두의 검사가 코웃음을 쳤다. 폐허를 둘러보는 눈에 경멸이 가득했다. 벨리알은 관측실에서 그 표정을 내려다보았다. 미간의 주름도, 입꼬리의 각도도 놓치지 않았다.
"잔해밖에 없잖아. 마력 반응도 미미하고."
궁수가 벽면을 두드렸다. 둔탁한 소리가 회랑으로 퍼졌다. 사제가 손에 든 성물을 들어올려 주변을 탐색했다. 작은 수정 구슬. 성황청에서 지급하는 표준형 탐지 도구였다.
"마력 함정 반응 없음. 저주 계열도 없어요."
사제의 보고에 선두 검사가 어깨를 으쓱했다. 당연하다는 듯이. 벨리알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마력 함정이 아니니까. 물리 함정에 마도 탐지가 반응할 리 없다.
"안쪽으로 가보자. 마왕 후계자가 있다면 가치 있는 전리품이 있을 거다."
네 명이 회랑 안으로 발을 들였다. 대리석 바닥에 군화 소리가 울렸다. 열두 기의 조각상 사이를 지나간다. 궁수가 조각상 하나를 힐끗 보더니 휘파람을 불었다.
"조각 솜씨는 끝내주는데. 마족치고는."
그 말이 관측실까지 올라왔다. 벨리알의 손가락이 멈추었다. 허공에 그리던 설계도의 선분 하나가 흔들렸으나 곧 다시 정밀해졌다.
사제가 다시 성물을 높이 들었다. 수정 구슬에서 빛이 번졌다. 이번에는 탐지가 아니었다. 성스러운 가호의 잔향. 수정이 뿜어내는 빛이 회랑 벽면을 훑었고, 그 빛이 관측실 바닥의 마도 유리를 투과해 벨리알의 발밑까지 닿았다.
예상보다 강했다.
C급 사제의 성물이 이 정도 광량을 낼 수 없다. 벨리알의 동공이 수축했다. 목 뒤의 근육이 당겨지며 경직되었다. 성물의 빛은 단순한 탐지광이 아니라 가호의 능동적 발현이었다. 그 빛줄기가 천장의 샹들리에를 스쳤을 때, 룬 각인의 푸른 빛이 한 순간 깜빡였다.
간섭.
벨리알의 손가락이 빨라졌다. 허공의 설계도를 접고 새로운 변수를 산입한다. 성물의 간섭 범위, 가호 광의 투과율, 룬 각인에 대한 억제 효과. 숫자들이 머릿속에서 충돌했다. 샹들리에의 해제 장치는 마력이 아닌 물리적 기계장치로 작동하도록 설계했다. 낙하 후 파편 산개를 증폭시키는 보조 룬까지 무력화된다면 살상 반경이 23퍼센트 줄어든다.
허용 범위 내인가.
아래에서 사제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상해요. 성물이 반응하고 있어요. 뭔가 있긴 한데…… 마력이 아니에요."
"마력이 아니면 뭔데?"
"모르겠어요. 구조적인 거? 건물 자체에서 뭔가 느껴져요."
선두 검사가 검을 뽑았다. 날이 성물의 빛을 받아 하얗게 빛났다. 성스러운 가호가 검날에 깃들어 있었다. C급이라도 용사는 용사다. 마족의 직접적인 공격에 대해서는 절대적인 방어력을 지닌다.
건물은 마족이 아니다.
벨리알은 관측실에서 일어섰다. 허공의 설계도를 최종 확인했다. 낙하 궤적, 충격 범위, 탈출 불가 반경. 성물의 간섭을 감안해도 회랑 중앙 3미터 이내의 생존 확률은 2퍼센트 미만이었다. 충분하다.
그의 손이 관측실 벽면의 레버를 감쌌다. 차가운 금속이 손바닥에 밀착되었다.
네 명의 용사가 회랑 중앙에 도달했다. 샹들리에의 바로 아래. 사제의 성물이 더 밝게 빛나며 경고를 보내고 있었으나 검사들은 이미 관심을 잃은 듯 앞만 보고 걸었다.
궁수만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샹들리에의 흑요석 표면에서 푸른 룬 각인이 요동치고 있었다. 아름다운 빛이었다. 마치 별이 깨어나는 것처럼.
"위에 뭐가……"
벨리알의 입이 열렸다.
"가호의 맹점은 통계적으로 완벽하다."
그의 목소리가 관측실의 마도 유리를 투과해 회랑 전체에 울렸다. 네 쌍의 눈이 천장을 향했다. 반투명한 바닥 너머로, 감정이 지워진 얼굴 하나가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희의 죽음은 사고사로 기록될 것이다."
레버를 당겼다.
팅.
쇠사슬이 비명을 지르며 끊어졌다.
콰아아앙.
2.3톤의 흑요석이 룬 각인의 빛을 흩뿌리며 용사들을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