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테아 강 한복판에서 마력의 불꽃이 솟구쳤다.
수면을 뚫고 치솟는 청백색 화염은 지맥 안정기의 과잉 출력이 강물과 충돌하며 빚어낸 현상이었다. 기억을 갉아먹던 독기는 이미 사라졌고, 대신 지맥의 잔향이 수면 위로 미세한 무지개를 피워 올리고 있었다. 벨리알은 성벽 위에 서서 그 불꽃을 내려다보았다. 왼쪽 어깨의 만성적 통증이 오늘따라 무디게 느껴졌다. 강물 속 화염이 한 줄기 더 터져 올랐다가 허공에서 흩어졌다.
아르스 마그나는 더 이상 성이 아니었다.
칼데라 상공에 부양한 거대한 구조체는 첨탑과 거주 구역, 시장과 광장을 품은 하나의 도시로 변모해 있었다. 흑요석 협곡의 바람조차 지맥 안정기의 출력 범위 안에서는 고요한 미풍으로 길들여져 있었다. 성벽 아래 새로 조성된 테라스 정원의 이름 모를 풀들이 흔들렸다.
벨리알의 손가락이 허공을 훑었다. 설계도를 그리는 습관이었으나 이번에는 선이 이어지지 않았다. 더 이상 그릴 함정이 없었다.
아니. 그리고 싶지 않았다.
"멍하니 서 있으면 감기 걸려."
에린이 계단을 올라왔다. 군화 대신 가죽 샌들을 신고 있었고, 허리춤에 걸린 성물의 파편은 여전히 희미한 빛을 머금고 있었다. 한때 선대 마왕을 찔렀던 창의 잔해. 성황청의 추적기이기도 했던 물건. 지금은 그 어떤 신호도 보내지 않는 단순한 유물로 침묵하고 있었다.
에린이 성벽 난간에 팔꿈치를 기대며 벨리알 옆에 섰다.
"아래쪽 광장에서 싸움이 났어."
"누가."
"서큐버스 자치구 상인이랑 인간 측 대장장이. 노점 자리 문제래."
벨리알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전쟁이 아닌 노점 자리 다툼이라니.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종류의 분쟁이었다.
"중재는?"
"그라키스가 나섰는데, 둘 다 그라키스한테 욕을 퍼붓더라. 마족이든 인간이든 관료는 싫은 거지, 뭐."
에린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 동작에 성물의 파편이 찰랑 흔들리며 아침 빛을 쪼개 벨리알의 왼쪽 가슴팍에 작은 빛점 하나를 떨어뜨렸다. 재생과 괴사가 반복되는 영구적 부상의 자리. 벨리알은 그 빛을 내려다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노점 배치도를 다시 짜야겠군."
"역시 그 반응이야."
에린이 코웃음 비슷한 숨을 내쉬었다. 눈가에는 날이 선 긴장이 없었다. 처음 이 성에 침입했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난간에 기대어 있었다.
칼데라 중앙 광장은 전쟁의 잔해를 걷어낸 자리에 세워졌다.
대심판관 아르카디우스의 성검이 지맥을 갈랐던 균열은 이제 수로로 변했고, 그 위로 아치형 다리 세 개가 놓여 있었다. 벨리알이 직접 설계한 것이다. 다리 난간에는 살상용이 아닌 순수한 장식 목적의 룬 각인이 새겨져 있었는데, 밤이 되면 은은한 청색 빛을 내뿜어 가로등 역할을 했다.
벨리알은 광장 한쪽에 임시로 설치된 행정 천막으로 걸음을 옮겼다. 에린이 반보 뒤에서 따라왔다.
천막 안에는 칠흑의 원탁에서 파견된 하급 관리 두 명과 인간 측 임시 대표로 남은 전직 모험가 세 명이 긴 탁자를 사이에 두고 앉아 있었다. 공기가 무거웠다. 마족 관리의 뿔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인간 대표 중 한 명은 탁자 아래에서 단검 자루를 쥐었다 놓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좌석 배치가 마음에 안 드는 건가."
벨리알이 천막에 들어서며 말했다. 시선이 일제히 쏠렸다.
마족 관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마왕 대행 각하, 인간 측이 수로 동쪽의 창고 구역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곳은 원래 골렘 채굴단의 정비 구역인데―"
"그건 전쟁 때 사용한 군사 시설이잖아." 인간 대표가 끼어들었다. 덥수룩한 수염 사이로 거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족이 군사 시설을 계속 보유하는 건 휴전 조건에 어긋난다고 봅니다."
"휴전 조건은 아직 문서화되지도 않았어요." 에린이 벨리알 옆에 서며 허리춤에서 접힌 양피지 한 뭉치를 꺼내 탁자 위에 펼쳤다. 성황청의 특수 인장이 찍힌 보고서들이었다. 용사들의 유품 속에서 발견된 바로 그 문서. "이건 성황청이 마족 사냥을 공인한 내부 지령서입니다. 용사 협회에 면책 특권을 부여한 근거 문서이기도 하고요."
탁자 위의 공기가 얼었다.
인간 대표의 손이 단검에서 떨어졌다. 마족 관리의 뿔 떨림도 멈췄다.
에린은 보고서의 한 페이지를 집어 들어 인간 대표 앞에 놓았다. "여기 보시면, 마족을 '지성체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조항이 있어요. 이걸 폐기하지 않는 한 어떤 휴전 조건도 종이 위의 잉크에 불과합니다."
"그건 성황청의 문서지, 우리가 쓴 게 아니오."
"당신들은 이 문서의 보호 아래 이곳에 왔죠."
침묵이 내려앉았다. 벨리알은 에린이 문서를 다루는 방식을 지켜보았다. 공격이 아니었다. 수술이었다. 곪은 부위를 정확히 절개하는.
벨리알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창고 구역은 해체한다."
마족 관리가 고개를 돌렸다. "각하?"
"골렘 채굴단의 정비 기능은 지하 3층 공방으로 이전한다. 동쪽 창고는 공동 물류 거점으로 재편한다. 마족 상인과 인간 상인이 함께 사용하는 조건으로."
벨리알의 손가락이 탁자 위 양피지의 빈 여백을 두드렸다. 허공이 아닌 실제 종이 위에 설계를 시작한 것이다. 펜을 집어 들자 선이 빠르게 그어졌다. 창고 구역의 평면도가 즉석에서 태어났다.
"입구는 두 개. 동쪽과 서쪽. 한쪽은 마계 시장으로, 다른 쪽은 인간 거주 구역으로 연결한다. 내부에 벽은 세우지 않는다."
펜이 멈추지 않았다. 선 위에 치수가, 치수 옆에 자재 목록이 빼곡히 적혀 나갔다. 인간의 언어와 마족의 문자가 뒤섞인 주석들이 여백을 채웠다. 에린은 그 주석을 읽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처음 발견했던 것과 같은 필체. 벨리알은 처음부터 두 종족 모두를 염두에 두고 설계해 왔던 것이다.
인간 대표가 평면도를 들여다보았다. "이 구조면… 어느 쪽도 물자를 독점할 수 없겠군."
"그게 요점이다."
벨리알이 펜을 내려놓았다.
정오가 지나자 광장에 사람이 모이기 시작했다.
사람이라는 표현이 적확한지는 모르겠으나, 마족과 인간이 뒤섞인 군중을 달리 부를 말이 없었다. 서큐버스 상인이 향신료를 진열하는 노점 옆에서 인간 약초상이 건조대를 펼쳤다. 둘 사이에는 아직 대화가 없었다. 적어도 칼을 뽑지는 않았다.
벨리알은 성벽 위 관측 지점에서 그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왼쪽 어깨의 통증이 다시 날카로워지기 시작했다. 괴사와 재생이 교차하는 주기가 돌아온 것이다. 이를 악물었다.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손에는 두루마리 한 장이 들려 있었다.
아르스 마그나의 전체 설계도가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큰 규모의 도면이었다. 칼데라를 중심으로 흑요석 협곡과 레테아 강, 그 너머의 인간 영토까지 아우르는 거대한 청사진. 도면의 상단에는 벨리알의 필체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대륙 통합 도시 계획.'
함정은 없었다. 살상식도 없었다. 대신 수로와 도로, 교역소와 공동 광장의 배치가 정밀하게 그려져 있었다. 건축이 무기가 아닌 다리가 되는 설계.
"언제부터 그걸 그린 거야?"
에린이 다가왔다. 벨리알은 두루마리를 말지 않았다.
"전쟁 중이었다."
"전쟁 중에?"
"대심판관의 성검이 지맥을 가를 때, 그 균열의 패턴을 보았다." 벨리알의 시선이 도면 위를 훑었다. "파괴의 궤적도 결국은 선이다. 선이 있으면 설계할 수 있다."
에린이 도면에 손을 뻗었다. 손가락 끝이 인간 영토와 마계의 경계선 위를 따라갔다. 그 경계에는 벽 대신 넓은 도로가 그려져 있었다.
"벽이 없네."
"여기에 벽은 없다."
벨리알이 도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오직 우리가 함께 걸어갈 복도와, 함께 바라볼 창문이 있을 뿐이다."
에린의 손가락이 도면 위에서 멈췄다. 허리춤의 성물이 미약하게 떨렸다. 예전처럼 경고의 빛이 아니었다. 지맥 안정기의 파동과 공명하는 잔잔한 울림. 처음 감지되었던 그 공명이 지금은 적의가 아닌 조율의 형태로 두 사람 사이를 흘렀다.
바람이 불었다. 흑요석 협곡에서 올라온 바람이 성벽을 스치며 두 사람의 옷자락을 날렸다.
해가 기울었다.
서쪽 성벽 아래로 긴 그림자가 드리워질 무렵, 벨리알은 지하 동력실로 내려갔다. 지맥 안정기가 설치된 핵심 구역. 자신의 생명력과 직결된 거대한 마력원이 잠든 곳이기도 했다.
안정기의 수정 코어가 규칙적으로 맥동하고 있었다. 미세하게 흔들리던 출력은 이제 완전히 안정되어 있었다. 지하 기단의 진동도 사라졌다. 벨리알은 코어에 손을 대었다. 차가운 표면 아래로 따뜻한 맥동이 전해졌다. 자신의 심장 박동과 동기화된 리듬.
이 성은 살아 있다. 내가 살아 있는 한.
에린이 동력실 입구에 기대서 있었다. 성물을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파편은 수정 코어와 같은 주기로 깜빡이고 있었다.
"이거, 원래는 너희 아버지를 죽인 무기의 조각이었지."
벨리알의 손이 코어 위에서 멈췄다.
"알고 있었나."
"처음부터 의심했어. 확신한 건 대심판관과 싸울 때." 에린이 파편을 손가락으로 굴렸다. "이게 네 지맥 안정기와 공명하는 이유, 이제는 알 것 같아. 같은 마력원에서 태어난 거잖아. 네 아버지의."
벨리알은 대답하지 않았다. 수정 코어의 맥동이 한 박자 빨라졌다가 되돌아왔다.
"돌려줄까?"
"그건 네 것이다."
"살상 무기의 잔해가?"
"도구는 쓰임에 따라 이름이 바뀐다." 벨리알이 코어에서 손을 뗐다. "그 파편이 더 이상 창이 아닌 것처럼, 이 성도 더 이상 요새가 아니다."
에린이 파편을 다시 허리춤에 걸었다. 금속이 가죽에 부딪히는 짧은 소리가 동력실에 울렸다.
성벽 끝에 다시 섰을 때는 저녁이었다.
칼데라 너머로 지평선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레테아 강이 석양을 받아 금빛으로 변했다. 독기가 사라진 강물은 평범한 강처럼 흘렀고, 강둑에는 마족 아이 둘과 인간 아이 하나가 물수제비를 뜨고 있었다. 돌이 수면을 세 번 튀겼다. 네 번. 다섯 번.
벨리알은 손에 든 대륙 통합 도시 계획도를 펼쳤다. 석양빛이 도면의 잉크를 따뜻하게 물들였다. 살상 함정의 기호는 어디에도 없었다. 대신 학교와 병원, 도서관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었다.
에린이 옆에 섰다. 어깨가 벨리알의 팔에 거의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
"성황청이 가만있을 리 없어."
"알고 있다."
"일루미나의 추기경단은 아직 건재하고, 마족 사냥을 신앙으로 규정한 교리도 폐기되지 않았어. 이 도시 계획이 알려지면―"
"그래서 알려야 한다." 벨리알이 도면을 접지 않은 채 말했다. "함정으로 죽인 용사의 수보다, 이 도면 한 장이 더 많은 것을 바꿀 수 있다."
에린이 벨리알의 옆얼굴을 보았다. 영구적 부상의 흔적이 목선 위로 드러나 있었다. 괴사한 피부와 재생 중인 살점이 얼룩처럼 뒤섞인 자리를 석양이 비추고 있었다.
"네가 이걸 들고 인간 영토에 가면 죽어."
"혼자 가면."
벨리알이 에린을 보았다. 에린의 손이 허리춤의 성물 위에 얹혀 있었다. 파편이 지맥 안정기의 잔향을 받아 맥동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심장 박동 사이 어딘가에서 세 번째 리듬이 울리고 있었다.
에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짧게. 한 번.
바람이 도면의 모서리를 날렸다. 벨리알이 손으로 눌러 잡았다. 석양이 칼데라 너머로 기울어 가고 있었고, 아래쪽 광장에서는 마족 상인과 인간 약초상이 처음으로 서로의 물건 값을 물어보는 소리가 올라왔다.
벨리알은 도면을 말아 등 뒤의 가죽 통에 넣으려다 멈췄다.
지맥 안정기의 맥동이 변했다. 규칙적이던 리듬이 불규칙한 삼박자로 흐트러졌다. 발밑의 성벽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아르스 마그나가 안정된 이후 처음 느끼는 종류의 떨림이었다.
에린의 성물이 갑자기 강렬한 빛을 토해냈다. 파편이 허리춤에서 저절로 떠올랐다. 에린이 성물을 움켜쥐었으나 빛은 손가락 사이로 새어 나왔다.
"이건 공명이 아니야." 에린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외부에서 신호가 오고 있어."
벨리알의 시선이 지평선을 향했다.
석양 너머, 인간 영토 방향에서 빛의 기둥 하나가 솟아올랐다. 성황청 일루미나의 성광. 추기경단의 소환 신호. 도면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두 번째 빛기둥이 솟았다. 세 번째가 뒤따랐다. 에린이 성물을 붙잡은 채 벨리알의 팔을 잡아당겼다.
"세 개. 삼위 소집이야. 성황청이 새 용사를 임명했다는 뜻이야."
벨리알은 떠오르는 빛기둥을 세었다. 넷. 다섯.
여섯 번째 기둥이 지평선을 갈랐다. 하늘이 찢어졌다. 여섯 줄기의 성광이 저녁 하늘의 붉은빛을 백색으로 덮어쓰며 칼데라까지 뻗어왔고, 빛이 닿는 곳마다 대기가 비명처럼 갈라지며 충격파를 토해냈다. 성벽 위의 돌이 덜덜 떨렸다. 아래쪽 광장에서 물건값을 묻던 목소리들이 일제히 끊겼다. 여섯 개의 빛기둥은 지평선 위에 거대한 창살처럼 박혀, 석양마저 삼켜버렸다.
에린의 얼굴에서 혈색이 빠졌다.
"여섯은 전례가 없어."
벨리알이 도면을 가죽 통에 밀어 넣고 성벽 안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비탄의 회랑 샹들리에를 재가동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