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색 광휘가 하늘을 삼켰다.
천공의 쐐기에서 쏟아진 정화의 빛줄기가 아르스 마그나의 외벽을 때리는 순간, 성 전체에 박혀 있던 굴절 렌즈들이 일제히 돌아갔다. 금속 축이 비명을 질렀다. 수천 개의 렌즈가 동시에 회전하며 내는 마찰음은 거대한 짐승의 이를 가는 소리와 닮아 있었고, 그 울림이 복도와 첨탑을 타고 성 전체로 퍼졌다. 빛이 꺾였다. 한 번이 아니라 수십 번. 렌즈에서 렌즈로, 복도에서 첨탑으로, 첨탑에서 다시 하늘로. 벨리알이 설계한 광학 미궁이 적의 공격을 통째로 빨아들여 재구성하는 데 걸린 시간은 채 2초가 되지 않았다.
되돌아간 빛은 원래의 열 배로 압축되어 있었다.
성황청 본진의 이동식 동력원, '천공의 쐐기'를 정확히 관통했다. 폭발이 아니었다. 빛이 금속을 녹이고 마력 회로를 태우고 내부의 영혼석 집합체를 산산이 갈라놓는 소리가 칼데라 전역에 울렸다. 날카로운 유리가 부서지는 듯한 고음이었다.
벨리알은 동력실 발코니 난간에 한 손을 걸친 채 그 광경을 내려다보았다.
왼쪽 어깨에서 괴사와 재생이 반복되는 상처가 또 한 겹 벗겨졌다. 피가 소매를 적셨으나 그는 닦지 않았다. 시선은 오직 칼데라 외곽, 연기를 뿜어내며 기울어지는 천공의 쐐기에 고정되어 있었다.
"렌즈 3구역 정렬 오차 0.7도."
혼잣말이었다. 완벽했어야 할 굴절 각도가 미세하게 틀어졌다는 사실이 벨리알의 턱 근육을 굳게 했다. 돌아온 빛의 수속점이 쐐기의 중심핵이 아니라 외곽 장갑에 먼저 닿았다. 중심핵을 직격했다면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벨리알."
에린이 동력실 계단을 뛰어올라왔다. 그녀의 손에는 성물의 파편이 들려 있었고, 그 파편이 뿜어내는 미약한 성광이 지맥 안정기의 파동과 동조하듯 맥박치고 있었다. 선대 마왕을 찔렀던 창의 잔해. 그것이 이 성의 심장과 같은 주파수로 울린다는 사실은 처음 발견했을 때만큼이나 기묘한 감각을 불러일으켰다.
"쐐기가 무너지고 있어. 그런데 뭔가 이상해."
에린이 성물을 들어 올렸다. 파편의 빛이 급격히 불안정해지며 적색으로 변했다.
벨리알의 눈이 좁아졌다. 그는 난간에서 몸을 돌려 동력실 중앙의 지맥 안정기를 살폈다. 미세하게 흔들리던 출력 게이지가 지금은 격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지하 기단에서 올라오는 진동이 발바닥을 통해 정강이까지 전해졌다.
"공명이 깨지고 있는 게 아니야." 벨리알이 안정기의 수정판을 손끝으로 두드렸다. "증폭되고 있어."
에린이 파편을 안정기 옆에 가져갔다. 성물과 안정기 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실이 팽팽히 당겨지듯 공기가 울렸다. 벨리알은 그 떨림의 파장을 읽었다. 외부에서 무언가가 안정기에 접속하려 하고 있었다.
"저건 뭐지?"
에린이 발코니 너머를 가리켰다.
천공의 쐐기 잔해 속에서 형체가 솟아올랐다. 인간의 윤곽이되 인간이 아닌 것. 녹아내린 금속과 영혼석 파편이 뼈대를 이루고, 그 위로 성광이 피부처럼 덮였다. 용사 협회장 아르카디우스의 얼굴이 아직 남아 있었다. 하반신은 이미 쐐기의 동력핵과 융합하여 거대한 마력 덩어리로 변해 있었다.
벨리알은 그것을 보며 한쪽 눈꺼풀을 미세하게 떨었다. 경멸이 아니라 실망에 가까운 반응이었다. 설계도면 위에 커피를 쏟은 조수를 바라보는 것과 같은 종류의.
"동력원과 자가 융합이라."
감정의 온기가 없었다.
"성검의 힘으로 지맥을 자를 수 있는 남자가 기계에 몸을 맡기다니. 구조적으로 3분을 못 버텨."
에린이 벨리알의 옆에 섰다. 그녀의 시선이 괴수화한 아르카디우스와 벨리알 사이를 오갔다.
"3분이면 이 성을 부수기에 충분하지 않아?"
"부술 수 있다면."
벨리알이 동력실 벽면의 패널을 열었다. 그 안에는 선대 마왕 벨제파르가 남긴 설계 노트가 꽂혀 있었다. 표지에 묻은 먼지를 엄지가 쓸었다. 노트 여백마다 빼곡히 적힌 이름들. 죽은 부하들의 이름. 그리고 그 사이에 끼워진 작은 쪽지 하나.
아버지의 필체.
'최후의 코드는 네가 완성해라.'
벨리알은 그 쪽지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으나 그것이 동력실 진동 때문인지 다른 이유인지는 본인만이 알았다.
괴수가 포효했다.
칼데라의 암석이 갈라지며 아르카디우스의 거대한 몸체가 성벽을 향해 돌진했다. 흑요석 협곡의 바람이 초속 30미터로 불어닥쳤으나 동력핵과 융합한 육체는 그 바람을 찢으며 전진했다. 성광과 마력이 뒤섞인 파동이 아르스 마그나의 외벽 렌즈 세 개를 한꺼번에 날려버렸다.
벨리알은 뛰지 않았다.
동력실 중앙으로 걸어가 안정기의 제어판에 손을 올렸다. 지맥의 맥동이 손바닥을 타고 팔뚝까지 올라왔다. 뜨거웠다. 생명력이 빠져나가는 감각이 아니라 생명력이 성에 녹아드는 감각. 마력원과 자신을 연결한 이후 성이 아프면 그도 아팠고 성이 숨 쉬면 그도 숨 쉬었다.
"에린."
"뭐."
"네 성물을 안정기 왼쪽 슬롯에 꽂아."
에린이 움직이지 않았다. 성물을 꽂는다는 것은 성황청의 추적 신호가 이 성의 핵심부에 직접 연결된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추적기로 쓰일 수 있어."
"이미 저 괴물이 여기 있는데 추적이 무슨 의미가 있어?"
에린의 입술이 얇게 눌렸다. 2초간 성물을 내려다보았다. 선대 마왕을 찔렀던 창의 파편이 이 성을 지키는 열쇠가 된다는 아이러니를 씹어 삼키듯 턱에 힘을 주더니, 안정기 왼쪽 슬롯에 성물을 밀어 넣었다.
공명이 터졌다.
성 전체가 울었다. 비탄의 회랑에서 잠들어 있던 샹들리에의 룬 각인이 일제히 빛을 뿜었고, 지하 기단의 진동이 멎으며 오히려 성이 떠오르는 듯한 부양감이 발바닥에 전해졌다. 지맥 안정기의 출력이 안정되는 수준을 넘어 성물의 성광 에너지를 역으로 흡수하여 마력으로 변환하기 시작했다.
벨리알의 동공이 확장됐다.
설계에 없던 반응이었다.
성물의 성광이 지맥 안정기를 통과하며 마력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안정기 내부에 새겨진 아버지의 마법진이 활성화되었다. 벨리알이 한 번도 해독하지 못했던 마법진. 그 문양이 제어판 위에 홀로그램처럼 떠오르며 입력 대기 상태의 커서를 깜빡였다.
"최후의 코드…."
벨리알의 손가락이 허공에서 멈췄다. 아버지가 남긴 노트의 여백에 적혀 있던 숫자열이 좌표가 아니라 코드였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이 순간이 아니면 입력할 수 없는, 성물과 안정기가 공명하는 바로 이 찰나에만 열리는 문.
성벽이 흔들렸다.
아르카디우스의 두 번째 돌진이 외벽 방어 골렘 세 기를 박살냈다. 녹아내린 금속 팔이 성벽을 움켜쥐고 올라오는 소리가 동력실까지 전해졌다. 석재가 비명처럼 갈라졌다.
"벨리알, 빨리!"
에린이 안정기에서 물러나며 발코니 쪽을 막아섰다. 그녀의 손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성물을 안정기에 넘긴 이상 무장 해제된 상태였다. 그럼에도 에린은 발코니 입구의 석재 기둥에 어깨를 대고 버텼다. 괴수의 마력 파동이 밀려올 때마다 부츠가 바닥에서 미끄러졌지만 양발에 힘을 주고 자세를 낮췄다.
벨리알은 등 뒤의 소란을 차단했다.
아버지의 노트를 펼쳤다. 여백의 이름들 사이에 숨겨진 숫자열. 칠흑빛 잉크로 적힌 열네 자리의 마력 코드. 손가락이 제어판 위를 미끄러지며 하나씩 입력했다. 첫 번째 자리. 두 번째. 세 번째.
여덟 번째 자리에서 손이 멈췄다.
코드의 후반부가 지워져 있었다. 아버지의 필체가 흐려진 게 아니라 의도적으로 삭제된 흔적. 그 자리에 작은 도형이 하나 그려져 있었다. 렌즈의 단면도.
벨리알의 호흡이 바뀌었다.
3구역 렌즈. 아까 0.7도 오차가 났던 바로 그 렌즈의 설계 원본이 코드의 나머지를 품고 있었다. 자신이 설계한 줄 알았던 렌즈 배열이 실은 아버지가 미리 심어둔 구조였다는 사실. 어금니가 삐걱거렸다.
자신의 독창적 설계라 믿었던 것이 아버지의 유산 위에 세워진 모방이었다.
그 깨달음이 폐부를 눌렀다. 지금은 삼킬 수밖에 없었다.
벨리알은 렌즈 단면도의 각도 수치를 읽었다. 37.2, 41.8, 55.6, 12.9, 78.3, 90.1. 여섯 자리. 합쳐서 열네 자리.
성벽이 갈라지는 소리가 동력실 천장에 금을 냈다.
입력을 마쳤다.
안정기가 포효했다. 성물의 성광과 지맥의 마력이 하나로 섞이며 아르스 마그나 전체가 거대한 마법진으로 변했다. 바닥의 타일 하나하나에 새겨진 룬이 빛나고 벽면의 조각상들이 눈을 떴다. 비탄의 회랑의 샹들리에가 천장에서 분리되어 공중에 떠올랐고, 침묵의 연회장 바닥 아래서 골렘 채굴단이 일제히 기동했다.
성이 살아났다.
아르카디우스가 발코니 너머로 상체를 들이밀었다. 녹아붙은 금속과 성광으로 뒤덮인 얼굴에서 아직 인간의 눈이 벨리알을 노려보았다. 입이 열렸으나 언어가 아닌 마력의 울부짖음만 흘러나왔다.
에린이 발코니 기둥에서 몸을 빼며 옆으로 굴렀다. 괴수의 팔이 기둥을 부쉈고 석재 파편이 동력실 바닥에 쏟아졌다.
벨리알은 제어판에서 손을 뗐다.
"너의 무덤은 내가 설계하지 않았다."
목소리가 차가웠다. 동력실의 진동이 잦아들며 오히려 정적에 가까운 고요가 내려앉았다. 벨리알은 괴수가 된 협회장을 올려다보지 않았다. 시선은 제어판 위에 떠 있는 홀로그램 설계도에 머물러 있었다.
"너는 그저 무너진 잔해 속에서 잊혀질 쓰레기일 뿐이다."
안정기가 최종 프로토콜을 실행했다.
바닥에서 올라온 마력의 파동이 아르카디우스의 육체를 감쌌다. 성광과 마력이 충돌하는 것이 아니었다. 안정기가 괴수의 체내에 남은 동력핵의 마력을 역으로 흡수하기 시작했다. 아르카디우스의 금속 갑피가 먼지처럼 벗겨졌다. 영혼석 파편이 하나씩 분리되어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괴수가 발버둥 쳤다. 팔을 휘둘러 벽을 갈랐으나 성이 스스로 복원했다. 갈라진 석재 사이로 새로운 타일이 밀려 올라와 틈을 메웠다. 살아있는 건축물. 벨리알이 꿈꾸던 완전체.
에린은 바닥에 엎드린 채 분해되어 가는 괴수를 지켜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괴수의 가슴팍에서 빛나는 것을 포착했다. 성황청의 특수 인장. 용사들의 유품 속에서 발견했던 것과 동일한 문양이 아르카디우스의 핵 위에 각인되어 있었다.
"벨리알, 저 인장—"
"알고 있어."
벨리알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미세한 떨림. 괴수의 핵에서 인장이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인장이 먼지가 되기 직전 그 안에 담긴 정보가 안정기를 통해 홀로그램으로 투사됐다.
성황청의 극비 지령서.
'마왕 벨제파르의 처형은 용사 협회장 아르카디우스에게 일임한다. 단, 마왕의 지맥 연결 회로를 보존하여 성황청 동력원으로 전용할 것.'
글자가 공중에 떠 있었다. 벨리알의 왼쪽 어깨 상처가 타들어가듯 열을 뿜었다. 아버지를 죽인 것은 단순한 토벌이 아니었다. 계획된 약탈이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지맥 회로를 코드로 잠갔다.
아들만이 열 수 있도록.
아르카디우스의 형체가 마지막으로 경련했다. 금속과 영혼석과 성광이 모두 분해되어 미세한 입자가 되었고, 그 입자들이 동력실 바닥으로 스며들었다. 석재 타일 사이로 빨려 들어간 입자들이 성의 기단부와 결합하며 새로운 주춧돌을 형성했다.
협회장의 육체가 마왕성의 뼈대로 치환되는 광경. 복수와 건축이 하나로 합쳐진 순간이었다.
동력실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벨리알은 제어판 앞에 서 있었다. 숨을 내쉬지 않았다. 아버지의 노트를 왼손에 쥐고 오른손은 아직 안정기 위에 얹혀 있었다. 손등에 핏줄이 도드라졌다.
에린이 일어섰다. 무릎에 묻은 석재 가루를 털고 벨리알에게 다가갔다.
"끝난 거야?"
벨리알은 대답하지 않았다. 안정기 홀로그램이 꺼지지 않고 있었다. 극비 지령서가 사라진 자리에 새로운 문양이 떠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에린의 얼굴이 굳었다.
홀로그램에 투사된 것은 지맥 지도였다. 마계의 지맥만이 아니었다. 인간계의 지맥까지 포함된 전역 지도. 그 지도 위에 붉은 점 하나가 깜빡이고 있었다. 성황청 본부 지하. 아르스 마그나의 안정기와 동일한 구조물이 하나 더 존재한다는 표시.
벨리알의 손가락이 그 붉은 점 위에서 멈췄다.
"아버지가 두 개를 만들었어."
에린이 그의 옆에서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손이 무의식적으로 안정기 슬롯에 꽂힌 성물 쪽으로 뻗었다. 성물이 다시 맥박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아까와 다른 주파수. 성황청 지하의 두 번째 안정기와 교신하듯.
벨리알이 노트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다. 거기에 아버지의 필체로 단 한 줄이 적혀 있었다.
'두 번째 열쇠는 네가 죽인 자의 피로 열린다.'
에린의 손이 성물을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