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갈라지고 있었다.
성전 지하의 비상 통로를 빠져나온 순간, 벨리알의 시선이 머리 위로 고정됐다. 흑요석 협곡의 까만 하늘을 가로질러 거대한 금속 구조물이 천천히 회전하고 있었다. 여섯 개의 팔을 벌린 기계 장치. 각 팔의 끝에 박힌 성광석이 마계의 어둠을 찢으며 백색의 빛줄기를 토해냈다.
"천공의 쐐기."
에린이 먼저 그 이름을 내뱉었다.
벨리알은 대답하지 않았다. 왼쪽 어깨에서 흘러내리는 검은 피를 소매로 눌렀다. 성검의 잔재가 남긴 영구적 부상이 또다시 괴사와 재생을 반복하며 살을 뒤집고 있었다. 통증은 익숙했다. 저 기계 장치의 규모는 아니었다.
"성황청의 최종 병기야."
에린이 품에서 성물을 꺼냈다. 선대 마왕을 찌른 창의 파편. 그것이 천공의 쐐기를 향해 미세하게 떨렸다. 공명이었다. 지맥 안정기와 처음 울림을 나누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진동이 에린의 손가락 끝을 붉게 달아오르게 했고, 파편의 표면에 가느다란 금이 갔다.
"만져선 안 된다."
벨리알이 에린의 손목을 잡았다. 그녀의 피부 아래로 성광의 맥동이 느껴졌다. 뜨거웠다. 화상을 입힐 정도로.
에린은 손목을 빼지 않았다. 대신 시선을 천공의 쐐기에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저건 단순한 공성 무기가 아니야. 성황청 기밀 문서에서 한 번 본 적 있어. 마족의 영혼을 에너지원으로 쓰는 마계 소멸 장치."
바람이 불었다. 흑요석 협곡 특유의 초속 30미터 칼바람이 두 사람의 옷을 할퀴고 지나갔다. 벨리알의 외투 자락이 찢겼다. 그 안에서 접힌 양피지가 드러났다. 아르스 마그나의 최종 설계도면이었고, 여백에는 죽은 부하들의 이름이 빼곡했다.
벨리알은 그것을 다시 품 안에 밀어 넣으며 천공의 쐐기의 회전 각도를 눈으로 쫓았다.
"저 장치의 중심축."
그가 중얼거렸다.
"육각 대칭의 성광석 배열. 하지만 동력원이 마족의 영혼이라면 출력은 불균일할 수밖에 없어. 영혼마다 마력 밀도가 다르니까."
에린이 고개를 돌렸다. 벨리알의 눈동자가 기계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하늘의 구조물을 읽고, 분해하고, 허공에 손가락으로 대응 설계를 그리는 중이었다.
"벨리알, 저건 아르스 마그나를 노리고 있어."
"알고 있다."
건조한 대답. 그의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에린은 그것을 보았다.
협곡을 따라 남쪽으로 이동하는 동안, 천공의 쐐기가 점점 아르스 마그나 쪽으로 기울어졌다. 여섯 개의 빛줄기가 하나로 수렴하기 시작했다. 그 초점이 향하는 곳은 벨리알이 피와 시간을 쏟아부어 세운 성의 중앙 첨탑이었다.
발밑의 지면이 진동했다. 지하 기단의 미세한 흔들림 따위가 아니었다. 지맥 안정기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벨리알은 그 진동을 발바닥으로 읽었다. 출력이 요동치고 있다. 외부에서 가해지는 성광의 압력이 안정기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중이었다.
"협회장이 직접 왔군."
벨리알이 발을 멈췄다. 협곡 너머, 레테아 강 건너편에 성황청의 군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그 중심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아르카디우스. 성검을 든 대심판관. 지맥을 절단할 수 있는 유일한 인간.
그의 옆에 선 인물이 벨리알의 시선을 더 오래 붙잡았다. 용사 협회장. 아버지를 죽인 진범. 그 사실이 왼쪽 어깨를 관통하듯 쑤셨다.
에린이 벨리알의 곁으로 다가섰다. 그녀의 손에 든 성물이 다시 떨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파편에서 빛이 새어 나왔다. 가느다란 실 같은 성광이 천공의 쐐기를 향해 뻗어 올라갔다.
"추적 신호가 살아 있어."
에린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내가 들고 있는 한, 성황청은 아르스 마그나의 정확한 좌표를 실시간으로 받고 있어."
벨리알은 에린을 보았다. 자신이 들고 다닌 것이 추적 장치였다는 사실을 안 이후로 에린의 손은 성물을 쥘 때마다 경련했다. 버리지 못했다. 그것은 동시에 대심판관의 마법을 무효화할 수 있는 유일한 열쇠이기도 했으니까.
"버려."
벨리알이 말했다.
"뭐?"
"그 성물을 레테아 강에 던져. 추적이 끊기면 천공의 쐐기는 정밀 조준을 잃는다."
에린의 눈이 좁아졌다.
"그러면 대심판관을 막을 수단도 잃어."
"알고 있다."
같은 대답이었다. 이번에는 손끝이 떨리지 않았다. 벨리알은 품에서 설계도를 꺼냈다. 양피지를 펼치고 양 끝을 돌로 눌렀다.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여백에 적힌 이름들이 흑요석 협곡의 희미한 빛 아래 드러났다.
카르닉. 세일라. 마르토. 벨렌.
함정에 잘못 걸려 죽은 부하. 토벌대에 맞서다 쓰러진 골렘 채굴단원. 비탄의 회랑에서 샹들리에가 오작동했을 때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하급 마족.
벨리알의 손가락이 그 이름들 위를 지나갔다.
"성물 없이 대심판관을 막는 방법이 하나 있다."
에린이 설계도를 들여다보았다. 양피지의 중앙, 아르스 마그나의 단면도 한가운데에 붉은 잉크로 그려진 원이 있었다. 성 전체의 모든 함정을 동시에 해제하고 해방된 에너지를 하나의 구조체로 재집중시키는 설계. 벨리알이 숨겨둔 최후의 미학.
"이건…"
에린이 손가락으로 원의 가장자리를 짚었다. 원 안에 적힌 수식이 그녀의 공학적 감각을 자극했다. 렌즈. 성 자체를 하나의 거대한 렌즈로 변환하는 공식이었다.
"미쳤어."
에린의 입에서 짧은 판단이 흘러나왔다.
"모든 함정을 해제하면 성은 무방비 상태가 돼. 용사가 한 명이라도 살아남아 있으면 그냥 걸어 들어올 수 있어."
"그래서 렌즈가 필요하다."
벨리알이 설계도의 한쪽을 접었다. 접힌 면이 만나는 지점에서 새로운 도면이 나타났다. 이중 설계. 양피지 자체가 함정이었다. 한 겹은 아르스 마그나의 방어 설계도, 다른 겹은 공격 설계도.
"지맥 안정기의 출력을 최대로 올리면 아르스 마그나는 부양한다. 칼데라 위로 떠오르는 거다."
"그건 전에도 했잖아."
"이번에는 다르다."
벨리알이 일어섰다. 왼쪽 어깨에서 검은 피가 다시 스며 나왔다. 무시했다.
"부양만으로는 천공의 쐐기를 막을 수 없어. 저 장치는 마계의 영혼을 연료로 쓰고 있다. 출력이 성 하나를 증발시키고도 남아."
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하지만 렌즈는 빛을 모을 수도 있고, 꺾을 수도 있다."
에린의 손이 멈췄다. 그녀는 벨리알의 의도를 이해했다. 천공의 쐐기가 쏘는 성광을 아르스 마그나라는 거대한 렌즈로 굴절시켜 되돌려 보내겠다는 것. 적의 에너지를 적에게 반사하는 구조.
"그러려면 성의 외벽 전체를 반사면으로 바꿔야 해. 모든 함정의 금속과 마력석을 녹여서 표면에 재배치하는 거잖아."
"정확하다."
"시간이 얼마나 걸려?"
벨리알은 대답 대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천공의 쐐기의 여섯 빛줄기가 거의 하나로 합쳐지고 있었다. 수렴까지 남은 시간. 그는 빛의 각도 변화 속도를 머릿속으로 계산했다.
"충분하지 않다."
에린이 성물을 내려다보았다. 파편이 손바닥 위에서 맥동하고 있었다. 성황청으로 좌표를 전송하는 추적기. 대심판관의 성검을 무력화할 열쇠. 아버지를 죽인 창의 잔해.
그녀는 성물을 주먹 안에 쥐었다. 파편의 날카로운 모서리가 손바닥을 갈랐다. 피가 성광과 섞여 기묘한 자줏빛을 띠었다.
"내가 시간을 벌게."
벨리알이 고개를 돌렸다.
"레테아 강 쪽으로 달리면서 추적 신호를 끌고 갈게. 천공의 쐐기의 조준이 나를 따라올 거야. 그 사이에 성을 바꿔."
"강물에 닿으면 기억을 잃는다."
"닿지 않으면 되지."
에린은 이미 뛰고 있었다. 협곡의 바람이 그녀의 외투를 잡아당겼지만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성물에서 뻗어 나온 성광의 실이 하늘의 기계 장치를 끌어당기듯 흔들렸다. 천공의 쐐기의 수렴점이 아르스 마그나에서 벗어나 에린의 이동 경로를 따라 천천히 기울기 시작했다.
벨리알은 그녀의 등을 3초간 바라보았다.
그리고 돌아섰다.
아르스 마그나의 중앙 제어실. 지맥 안정기가 비명에 가까운 진동을 뿜고 있었다. 바닥의 룬 각인이 붉은 빛과 검은 빛 사이를 오갔다. 한계가 가까웠다.
벨리알은 제어실 중앙에 서서 양손을 안정기의 핵심부에 올렸다. 왼팔의 괴사 부위가 기계의 진동과 공명하며 검은 연기를 피워 올렸다. 살이 갈라지고 닫히고 다시 갈라졌다. 생명력이 안정기로 빨려 들어가는 감각이 이번에는 몇 배나 거세게 몸을 잡아당겼다.
성 전체가 울렸다. 비탄의 회랑의 샹들리에들이 일제히 룬 각인을 발광시키며 흔들렸다. 처음 요동치던 바로 그 샹들리에들이었다. 그때는 용사를 맞이하기 위한 살상의 서곡.
지금은 해체의 전주곡이었다.
벨리알의 입이 열렸다.
"전 구역 함정 해제. 1층부터 순차적으로."
명령이 떨어지자 성 곳곳에서 금속이 부서지는 소리가 울렸다. 가시 함정의 철침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회전형 칼날 트랩의 축이 끊어지며 날이 벽에 박혔다. 독가스를 품고 있던 대리석 조각상의 내부 관이 파열되어 녹색 안개가 복도를 채웠다가 환기구로 빨려 들어갔다.
피의 르네상스가 낳은 걸작들이 하나씩 죽어갔다.
벨리알의 이마에 땀이 맺혔다. 손톱 밑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안정기의 출력을 한 단계 더 올렸다. 성의 기저부가 칼데라의 바닥에서 떨어지기 시작했다. 먼지가 수직으로 올라갔다.
아르스 마그나가 떠올랐다.
칼데라의 검은 대지 위로 성이 부양했다. 이번에는 위용을 뽐내기 위한 상승이 아니었다. 외벽의 돌이 갈라지고 있었다. 해체된 함정에서 회수된 금속과 마력석이 벽 틈으로 스며 나와 표면을 덮기 시작했다. 미스릴과 흑철과 영혼석이 뒤섞여 기하학적인 곡면을 형성했다.
반사면이었다.
벨리알의 손가락이 허공을 그렸다. 안정기에서 손을 뗄 수 없으니 시선과 의지만으로 설계를 지휘했다. 첨탑이 안쪽으로 휘어졌다. 외벽이 볼록하게 부풀었다. 창문이 닫히고 그 위를 금속판이 덮었다.
성이 렌즈가 되어가고 있었다.
"파괴는 건축의 끝이 아니다."
벨리알이 중얼거렸다. 안정기의 핵심부에서 올라오는 열기가 양 손바닥을 태웠다.
"새로운 창조를 위한 거대한 여백일 뿐."
설계도 여백의 이름들이 떠올랐다. 카르닉. 세일라. 마르토. 벨렌. 그들이 지킨 성의 함정이 지금 녹아내려 새로운 형태를 얻고 있었다. 살상의 예술이 방어의 과학으로 탈바꿈하는 순간.
하늘에서 빛이 쏟아졌다. 천공의 쐐기의 수렴이 완료된 것이다. 에린이 끌고 간 추적 신호가 충분히 멀어지기 전에 장치가 발사 태세에 들어갔다. 여섯 줄기의 성광이 하나로 합쳐진 백색의 기둥이 아르스 마그나를 향해 수직으로 떨어졌다.
벨리알은 눈을 감지 않았다.
렌즈의 곡률이 아직 3도 부족했다. 반사면의 정렬이 완벽하지 않았다. 0.3도의 오차도 용납하지 못하는 자신이 3도의 결함을 안은 채 빛을 맞이해야 했다.
왼쪽 어깨가 폭발하듯 벌어졌다. 괴사와 재생의 순환이 안정기의 과부하와 맞물려 통제를 벗어났다. 검은 피가 제어실 바닥에 튀었다.
그때 성의 남쪽 외벽에서 자줏빛이 번졌다.
에린의 피와 성광이 섞인 빛. 성물의 파편이 원격으로 아르스 마그나의 지맥과 공명하고 있었다. 처음 시작된 그 공명이 지금 성의 남쪽 곡면 3도를 보정했다.
렌즈가 완성됐다.
백색의 기둥이 아르스 마그나의 표면에 닿았다. 꺾였다. 반사된 성광이 천공의 쐐기의 장갑판을 정면으로 때렸다. 수천 도의 열이 집중된 빛이 흑철 장갑을 붉게 달구더니 순식간에 백열 상태로 끌어올렸고, 녹아내린 금속 표면 사이로 내부의 증기 기관이 노출됐다. 과열된 증기관의 압력 밸브가 연쇄적으로 터지며 기계 장치의 중심축 전체를 뒤흔드는 폭발이 세 차례 이어졌다.
금속이 찢어지는 소리가 마계의 하늘을 가득 채웠다. 여섯 개의 팔 중 셋이 동시에 부러져 떨어졌다. 나머지 셋이 불균형하게 회전하며 흑요석 협곡 쪽으로 기울었다.
벨리알의 무릎이 꺾였다. 안정기에서 손이 떨어졌다. 바닥에 무릎을 짚는 순간 토해낸 피가 룬 각인 위에 번졌다. 시야가 흐려졌다.
성은 떠 있었다. 렌즈의 형태를 유지한 채.
제어실의 모니터링 룬이 하나씩 깨지고 있었다. 그 사이로 새로운 신호가 잡혔다. 벨리알은 피로 젖은 손을 바닥에 짚고 룬의 잔상을 읽었다.
레테아 강 건너편. 아르카디우스의 성검이 지면을 찌르고 있었다. 칼데라의 지맥이 끊어지는 진동이 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그리고 그 옆에서 에린의 추적 신호가 멈춰 있었다. 강변에서. 움직이지 않는 채로.
벨리알의 손이 안정기의 핵심부를 다시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