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날이 쇄골 아래를 스쳤다. 뜨거운 것이 목줄기를 타고 흘렀다.
"…룬 문자 세 번째 줄, 역순 배열."
벨리알은 피를 흘리면서도 에린의 검을 왼손으로 맞잡았다. 검신에 새겨진 성광 문자가 손바닥 살을 태웠으나, 그의 시선은 칼날 위를 더듬고 있었다. 글자를 읽고 있었다. 피부가 타들어가는 동안에도.
에린의 눈동자에 빛이 없었다. 동공이 희끄무레하게 풀려 있었고,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호흡이 규칙적이었다. 규칙적인 호흡이 장치의 가동음처럼 서늘하게 울렸다.
검이 다시 움직였다. 에린의 손목이 기계적으로 회전하며 벨리알의 손아귀를 비틀어 빠져나갔다. 두 번째 베기가 수평으로 날아왔다. 벨리알은 뒤로 물러서며 작업대를 사이에 두었다.
설계도 뭉치가 바닥에 쏟아졌다. 양피지 위에 적힌 이름들이 흩어졌다. 죽은 부하들의 이름. 여백에 빼곡히 적어두었던 것들이 피에 젖어갔다.
"네 번째 줄부터 구문이 바뀐다."
벨리알의 입술이 움직였다. 검의 룬 배열을 소리 내어 읽는 것이었다. 에린의 검신에 새겨진 문자는 단순한 강화 마법진이 아니었다. 성황청의 구속 술식이었다. 대상의 자아를 매개로 삼아 육체를 원격 조종하는 상위 계열.
에린이 세 번째로 검을 들어올렸다. 찌르기였다. 작업대의 모서리가 갈라졌고, 검끝이 벨리알의 옆구리를 스치며 뒤쪽 벽의 설계 도면을 꿰뚫었다.
왼쪽 어깨에서 괴사와 재생이 반복되는 오래된 상처가 욱신거렸다. 선대 마왕을 죽인 성검의 여파. 그 잔해가 지금 에린의 손에 들린 성물과 공명하고 있었다.
벨리알은 뒤로 두 걸음 물러서며 작업실 벽에 등을 붙였다. 도면 고정용 흑요석 핀이 등줄기를 찔렀으나 움직이지 않았다. 에린의 검이 다시 다가왔다. 검신 위의 룬 문자가 핏빛으로 맥동했다.
"제어 회로의 핵은 성물이야."
혼잣말이었으나 확신에 찬 음성이었다. 에린의 가슴팍에 매달린 창 파편. 선대 마왕 벨제파르를 찔렀던 무기의 잔해. 그것이 에린의 신경계를 장악한 술식의 중추였다.
파괴하면 된다. 단순한 답이었다.
벨리알의 손가락이 멈췄다. 성물은 에린의 생명력과 결합되어 있었다. 지맥 안정기를 수리할 때 확인한 공명 패턴이 떠올랐다. 성물의 마력파와 에린의 심박이 완벽히 동기화되어 있었다.
파괴하면 에린이 죽는다.
검이 다시 날아왔다. 벨리알은 몸을 비틀어 피했으나 왼쪽 팔뚝이 베였다. 괴사 조직이 드러난 왼쪽 상반신의 상처와 새 상처가 겹쳤다. 시야 끝이 흔들렸다.
"설계도에는 오차가 있을 수 있어."
피가 손끝에서 떨어지며 바닥의 양피지를 적셨다. 죽은 부하의 이름 위에 자신의 피가 번졌다.
"하지만 너라는 존재는 내 계산 밖의 유일한 진실이다."
에린의 검이 멈추지 않았다. 대답할 의식이 없었으니까. 그러나 벨리알은 계속 말했다.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
작업실 한쪽 벽에 걸린 도면이 그의 등에 밀려 찢어졌다. 비탄의 회랑 초기 설계도였다. 샹들리에의 룬 각인을 배치했던 원본이 피 묻은 등판에 눌려 형체를 잃어가고 있었다.
벨리알은 에린의 다음 공격을 피하지 않았다. 대신 왼손을 들어 검날을 다시 잡았다. 성광이 손바닥을 관통했다. 뼈가 드러나는 통증이 팔 전체를 관통했으나 검을 놓지 않았다.
에린의 몸이 기계적으로 검을 당겼다. 벨리알의 손바닥에서 피와 살점이 떨어져 나갔다. 그래도 놓지 않았다.
"구속 술식의 갱신 주기가 있어."
이를 악물고 내뱉었다. 룬 문자의 맥동에는 패턴이 있었다. 0.7초 간격으로 빛이 약해지는 순간이 존재했다. 그 찰나에 술식의 명령 전달이 끊긴다.
벨리알은 세었다. 하나, 둘, 셋—
빛이 약해졌다. 에린의 검을 쥔 손에서 힘이 빠지는 0.7초. 벨리알은 검을 비틀어 빼내는 대신 자신의 몸을 검날 쪽으로 밀었다. 검이 왼쪽 갈비뼈 사이를 파고들었다.
고통이 척추를 타고 올라갔다. 입 안에 쇠맛이 번졌다. 이 거리에서만 가능한 것이 있었다.
에린의 가슴팍에 매달린 성물. 창 파편의 표면에 새겨진 미세한 균열들이 보였다. 이 거리가 아니면 읽을 수 없는 각인이었다. 성황청의 인장. 용사들의 유품 속에서 발견했던 것과 동일한 문양이었다.
"성황청 특수 인장, 제7계열 구속인."
벨리알의 왼손이 에린의 성물을 잡았다. 성광이 손가락 마디마디를 태웠다. 괴사 조직이 있는 왼쪽이라 통증 감각이 둔했다. 그것이 지금은 축복이었다.
"파괴할 수 없다면 덮어쓰면 된다."
마도 건축술의 원리였다. 기존 구조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설계를 위에 얹어 기능을 전환하는 것. 함정을 만들 때 벨리알이 가장 자주 쓰는 기법이었다.
오른손이 에린의 성물 위에 겹쳐졌다. 왼손은 피투성이인 채로 파편을 감싸고, 오른손은 그 위에서 마력 회로를 그리기 시작했다. 손가락 끝에서 어둠빛 마력이 가느다란 선으로 흘러나왔다.
문제는 마력의 양이었다.
에린의 성물에 박힌 구속 술식은 성황청 대심판관급의 마력으로 각인된 것이었다. 덮어쓰려면 동등하거나 그 이상의 마력이 필요했다. 벨리알에게는 공격 마법 회로가 없었다. 태생적 결여. 마력 자체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동력실 지하에 잠든 거대한 마력원이 있었다. 벨리알의 생명력과 연결된 것. 지맥 안정기를 통해 성 전체에 마력을 공급하는 순환 회로의 중심에 벨리알 자신이 있었다.
"벨리알."
에린의 입술이 움직였다. 술식의 갱신 주기 사이, 0.7초의 틈에서 새어 나온 에린 자신의 목소리였다. 희미하고 갈라져 있었으나 분명했다.
"하지, 마."
그것이 전부였다. 다시 눈동자가 풀렸고, 에린의 손이 벨리알의 목을 향해 올라왔다. 검 없이도 구속 술식은 육체를 조종할 수 있었다.
벨리알은 에린의 손이 자신의 목을 감싸는 것을 허용했다. 손가락이 기도를 조였다. 숨이 막혔다. 시야 가장자리가 어두워졌다.
양손은 성물에서 떼지 않았다.
마력을 끌어올렸다. 심장 뒤쪽, 척추 기저부에 연결된 지맥 회로에서 마력이 역류하기 시작했다. 성 전체를 유지하는 에너지의 일부를 자신의 혈관으로 끌어당기는 것이었다. 지맥 안정기의 출력이 흔들렸다. 지하 기단의 진동이 격렬해졌다. 작업실 바닥이 울렸다.
벨리알의 혈관이 검붉게 부풀어 올랐다. 피부 아래로 마력의 흐름이 보일 정도였다. 왼쪽 상반신의 괴사 조직이 찢어지며 검은 피가 배어 나왔다. 재생과 괴사가 동시에 가속되었다.
에린의 손이 목을 조이는 힘이 강해졌다. 성물의 구속 술식이 위협을 감지하고 출력을 높인 것이었다. 벨리알의 입 끝에서 핏방울이 떨어졌다.
멈추지 않았다.
마력이 손끝을 통해 성물로 흘러들었다. 성광과 마력이 충돌하며 파편 표면에서 불꽃이 튀었다. 에린의 몸이 경련했다. 구속 술식의 룬 문자가 하나씩 깨져 나갔다.
그리고 벨리알은 보았다.
성물의 균열 사이로 드러난 것. 창 파편의 핵. 그 안에 박혀 있는 것은 성황청의 마법이 아니었다. 선대 마왕 벨제파르의 마력 잔재였다. 아버지의 것이었다.
손이 떨렸다. 에린의 목을 조르는 손 때문이 아니었다. 파편 속에서 느껴지는 마력의 파장이 벨리알 자신의 것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 혈연의 공명. 아버지의 무기에 남은 마지막 조각이 이 여자의 가슴팍에 매달려 있었다.
"아버지."
목이 조여 제대로 된 소리가 나지 않았다. 성물 속의 파편이 반응했다. 벨리알의 마력과 선대 마왕의 잔재가 접촉하는 순간, 파편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작업실 벽에 금이 갔다. 천장에서 먼지가 떨어졌다. 지맥 안정기의 출력 저하로 아르스 마그나 전체가 미세하게 기울었다. 어딘가에서 골렘 채굴단의 경보음이 울렸다.
벨리알은 마지막 힘을 짜냈다. 심장을 흐르는 마력의 전부를 성물로 밀어넣었다. 자신의 것과 아버지의 잔재가 뒤섞이며 구속 술식 위에 새로운 회로를 그려 나갔다. 덮어쓰기. 파괴가 아닌 전환.
성물이 빛났다. 성광의 백색이 아니었다. 마력의 심연 같은 남색이었다. 에린의 가슴팍에서 터져 나온 빛이 작업실 전체를 채웠다.
에린의 손이 벨리알의 목에서 떨어졌다. 풀려난 기도로 공기가 밀려들었다. 벨리알은 기침을 하며 피를 뱉었으나 성물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에린의 눈동자에 초점이 돌아왔다. 희끄무레했던 동공에 갈색 홍채가 번져 나왔다. 입술이 벌어졌다. 숨이 불규칙해졌다. 살아 있는 사람의 호흡이었다.
"벨리…알?"
에린의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0.7초의 틈이 아니었다. 구속 술식의 룬 문자가 전부 소멸한 뒤, 에린 자신의 의지로 발화된 음성이었다.
벨리알은 대답하지 못했다. 무릎이 꺾이며 바닥에 쓰러졌다. 왼쪽 갈비뼈 사이의 상처에서 피가 고였고, 왼손은 뼈가 드러난 채 경련하고 있었다. 마력을 전부 쏟아부은 탓에 시야가 좁아졌다.
에린이 무릎을 꿇었다. 벨리알의 상체를 일으켜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렸다. 손이 떨리고 있었으나 동작은 정확했다. 외투 소매를 찢어 벨리알의 왼손을 감쌌다. 뼈가 드러난 상처 위로 천이 닿을 때 벨리알의 턱이 굳었으나 소리를 내지 않았다.
"왜 그런 짓을."
에린의 목소리에 물기가 섞여 있었다. 벨리알은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지맥 안정기의 출력 저하로 작업실의 마력등이 깜빡이고 있었다. 그림자가 길어졌다 짧아졌다를 반복했다.
"설계의… 문제였으니까."
숨이 가빠 문장이 끊겼다. 에린이 이해하지 못한다는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구속 술식은 성물의 기존 회로를 이용한 기생형이야. 설계 구조를 바꾸면 기생체가 작동하지 못해. 건축에서 기초를 바꾸면 상부 구조물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원리다."
피를 흘리면서도 건축 비유를 쓰는 것이 벨리알이었다. 에린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움직였으나 웃음이 되지 못했다.
"네 생명력을 담보로 한 거잖아."
"오차 범위 안이야."
"거짓말."
에린의 손이 벨리알의 가슴팍 위에 놓였다. 심박을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손끝이 닿는 곳에서 성물의 남색 빛이 희미하게 맥동하고 있었다.
에린이 고개를 숙여 자신의 성물을 들여다보았다. 창 파편의 표면이 달라져 있었다. 성황청의 구속 인장이 사라진 자리에 새로운 문양이 떠올라 있었다. 벨리알의 마력이 새겨 넣은 회로. 그 아래, 파편의 핵에서 드러난 또 다른 각인.
에린의 손가락이 파편을 만졌다. 각인에서 미약한 온기가 전해졌다.
"이건… 선대 마왕의 마력 서명이야."
벨리알이 고개를 끄덕였다. 목이 아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네 아버지의 마력이 내 성물 안에 있었다고?"
"처음부터."
에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성물이 선대 마왕을 찌른 창의 파편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 안에 마왕의 마력이 살아 있을 줄은 몰랐다.
바닥에 흩어진 설계도 뭉치 사이로 한 장의 양피지가 보였다. 성황청 특수 인장이 찍힌 보고서 사본이었다. 벨리알이 용사 유품 속에서 발견하여 보관하던 것이었다. 에린이 그것을 집어 들었다. 보고서 하단의 문구를 읽었다.
"'성물 내부의 마력 잔재는 추적 매개체로 활용할 것. 대상이 마왕의 혈통에 접근할 경우, 공명 반응을 통해 위치를 특정.'"
에린의 목소리가 떨렸다. 자신이 지닌 성물이 성황청의 추적기라는 것은 이미 알았다. 추적의 원리가 선대 마왕의 마력 잔재였다는 사실은 몰랐다.
"나를… 미끼로 쓴 거야. 성황청이."
벨리알은 에린의 무릎 위에서 고개를 돌렸다. 작업실 구석에 쓰러진 도면 선반 너머로 지맥 안정기의 모니터링 룬이 붉게 깜빡이는 것이 보였다. 출력이 정상치의 30%까지 떨어져 있었다.
성물 속의 선대 마왕 파편이 다시 진동했다. 이번에는 약하지 않았다. 남색 빛이 에린의 가슴팍에서 터져 나와 작업실 바닥의 지맥선을 타고 퍼져 나갔다. 지하 기단까지.
벨리알의 눈이 가늘어졌다. 지맥 안정기와 성물이 공명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마력이 성 전체의 순환계에 접속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작업실 바닥 아래에서, 잠들어 있던 거대한 마력원이 눈을 떴다.
에린의 성물이 손아귀 안에서 스스로 부양하더니, 창 파편의 형태가 변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