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둥이 갈라졌다.
벨리알의 왼쪽 어깨에서 검은 마력이 뿜어졌다. 성전 천장이 갈라졌다. 균열을 따라 돌무더기가 비처럼 쏟아졌다. 지맥 안정기와 연결된 기단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미세한 떨림이 아니었다. 바닥 전체가 들썩이며 벨리알의 발밑으로 방사형 균열이 퍼져 나갔다.
"거짓말이라고 해."
벨리알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성전 중앙에 투영된 협회장 카를로스의 홀로그램이 잔잔한 미소를 유지한 채 흔들렸다. 마력 통신 매체의 해상도가 떨어진 게 아니었다. 성전의 구조 자체가 요동치고 있었다.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네 아버지 벨제파르는 스스로 무릎을 꿇었다. 성검이 아니라 내가 건넨 계약서에."
홀로그램 너머로 카를로스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벨리알의 왼쪽 상반신에서 괴사와 재생이 동시에 격렬하게 반복되며 검붉은 증기가 피어올랐다. 성검의 여파가 남긴 영구적 부상이 마력 폭주에 반응하고 있었다.
에린은 무너지는 석재 사이로 몸을 낮췄다. 팔뚝만 한 돌덩이가 머리 위를 스치며 귀 옆 머리카락 몇 가닥을 잘라냈다. 뒹굴듯 기둥 잔해 뒤로 몸을 숨기면서도 시선은 놓지 않았다. 홀로그램의 출력원. 성전 북벽에 박혀 있는 마력 결정.
"벨리알."
에린이 불렀다. 닿지 않았다. 지하 성전을 채운 마력의 파동이 공기를 찢고 있었고, 그 소음 속에서 인간의 성대는 너무 얇았다.
에린은 허리춤의 성물을 꺼냈다. 선대 마왕을 찔렀던 창의 파편. 손바닥 반만 한 은빛 조각이 벨리알의 마력 폭주에 반응하여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지맥 안정기와 처음 공명했을 때의 그 진동이 지금은 손가락 뼈를 타고 팔꿈치까지 울리고 있었다.
이를 악물었다. 성물을 북벽 결정에 겨눴다. 마력 통신의 매개체를 부수면 최소한 협회장의 도발은 끊을 수 있었다.
"움직이지 마."
성전 입구에서 금속이 바닥을 긁는 소리가 울렸다. 은빛 갑옷. 가슴팍에 새겨진 성황청의 태양 문양. 실버 팰러딘이었다. 다섯, 여섯, 일곱. 에린이 세는 사이에도 계속 밀려들었다.
선두의 기사가 투구 안에서 낮은 음성을 내뱉었다.
"성황청 직속 실버 팰러딘, 마왕성 잔당 토벌 및 증거 인멸 임무를 수행한다. 에린 조사관, 당신도 포함이다."
에린의 손이 멈췄다. 증거 인멸. 그 단어가 귀를 파고들었다. 조사관인 자신을 토벌 대상에 포함시켰다는 건 성황청이 이 진실을 바깥에 내보낼 생각이 없다는 뜻이었다.
"내가 성황청 소속인 건 아직 유효한데."
"유효하지 않다. 이 시각부로 당신의 조사관 자격은 박탈되었다."
기사의 검이 칼집에서 빠져나왔다. 성광이 칼날을 타고 흘러 지하 성전의 어둠을 찢었다.
벨리알이 고개를 돌렸다.
마력 폭주로 갈라진 눈동자가 실버 팰러딘들을 훑었다. 왼쪽 어깨의 검은 증기가 아직 사그라지지 않았다. 괴사된 피부 사이로 핏빛 마력이 실핏줄처럼 번지고 있었다. 벨리알은 홀로그램이 꺼진 자리를 한 번 보았다. 카를로스의 미소가 사라진 허공을. 그리고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허공에 설계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열둘."
벨리알이 중얼거렸다. 기사의 수가 아니었다. 성전의 기둥 잔해 수였다.
"기둥 열둘. 아치 넷. 바닥 균열 스물셋."
손가락이 공중에서 빠르게 움직였다. 보이지 않는 잉크로 보이지 않는 종이 위에 선을 긋듯. 에린은 그 움직임을 알았다. 벨리알이 함정을 설계할 때의 손놀림.
"뭘 하는 거야, 지금?"
에린이 소리쳤다. 이번엔 닿았다. 마력 폭주의 소음이 줄어서가 아니라 벨리알이 의식적으로 마력을 수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흩어지던 검은 기운이 손끝으로 빨려 들어갔다.
"구조 변경."
짧은 대답이었다.
실버 팰러딘의 선두 기사가 검을 치켜들며 돌진했다. 성광이 칼날에서 뻗어 나와 벨리알의 가슴을 향했다. 직접 공격. 용사의 가호가 보장하는 절대적 물리력.
벨리알은 피하지 않았다. 발을 굴렀다.
바닥의 균열 스물셋 개가 동시에 벌어졌다. 벨리알이 마력을 주입한 건 기사가 아니라 바닥이었다. 지맥 안정기의 잔여 출력이 균열을 타고 흘러 성전의 석판을 재배열했고, 선두 기사의 발밑이 90도 기울어졌다.
은빛 갑옷이 미끄러졌다. 기사는 균형을 잡으려 검을 바닥에 찔렀으나 석판은 이미 두 번째 회전을 시작하고 있었다. 벨리알이 설계한 새로운 구조. 성전의 바닥 자체가 거대한 회전 함정이 되어 기사를 지하 공동으로 빨아들였다.
쿵. 무거운 낙하음. 건물이 만든 낙하. 자연재해. 가호가 반응하지 않는 영역.
뒤따르던 기사 둘이 멈칫했다. 벨리알의 손가락이 다시 움직였다.
"아치 넷."
천장에 매달린 반원형 아치 구조물 네 개가 동시에 경첩처럼 접혔다. 수 톤의 석재가 포물선을 그리며 기사단의 대열 한가운데로 떨어졌다. 먼지가 폭발적으로 피어올랐다. 금속이 찌그러지는 소리와 함께 비명이 섞였다.
"네놈들이 숭상하는 이 질서, 내 손으로 가장 아름답게 부숴주마."
벨리알의 음성에 감정이 실리지 않았다. 설계를 검증하는 기술자의 어조에 가까웠다. 건조했다. 왼쪽 어깨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증기만이 한층 짙어져 있었고, 괴사와 재생의 경계에서 피부가 벗겨지며 붉은 근섬유가 드러났다.
에린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성물을 품에 넣고 무너진 기둥 잔해를 발판 삼아 뛰었다. 목표는 북벽의 마력 결정이 아니었다. 기사단의 포위망 뒤편. 협회장의 홀로그램이 투사되기 전 누군가가 마력 결정을 설치하고 간 통로가 있을 터였다. 에린은 조사관이었다. 침입 경로를 역추적하는 건 본업이었다.
돌무더기를 넘을 때 무릎이 긁혔다. 갑옷 없는 인간의 몸이 얼마나 연약한지 벗겨진 피부가 알려주었다. 멈추지 않았다. 북벽에 도달하자 손으로 석재를 더듬었다. 균열 사이로 외풍이 들어오는 곳. 흑요석 협곡에서 불어오는 강풍이 아니라 인공적으로 뚫린 좁은 통로의 미세한 기류였다.
손끝에 차가운 금속이 닿았다.
에린이 석재를 밀어냈다. 어른 한 명이 겨우 기어갈 수 있는 비밀 통로가 드러났고, 통로 입구에 성황청의 특수 인장이 찍혀 있었다. 용사들의 유품 중 발견했던 것과 동일한 문양.
"여기로 들어왔군."
에린이 중얼거리며 통로 안을 살폈다. 등 뒤에서 성광이 번쩍였다. 살아남은 기사 셋이 에린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벨리알이 손을 뻗었다. 성전 동쪽 벽면에 걸려 있던 샹들리에. 비탄의 회랑 입구를 장식하던 것이 지금은 잔해 속에 반쯤 매몰되어 있었다. 룬 각인이 새겨진 철제 가지들이 벨리알의 마력에 반응하여 붉게 달아올랐다.
샹들리에가 벽에서 떨어졌다. 아니, 날아갔다. 수평으로.
기사 셋이 동시에 방패를 들었다. 샹들리에는 그들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 목표는 기사가 아니라 천장의 마지막 지지대였다. 철제 가지가 지지대를 관통하자 성전 동쪽 구역 전체가 붕괴했고, 기사들은 쏟아지는 석재의 포물선 안에 갇혔다.
세 번의 교환. 바닥, 아치, 샹들리에.
벨리알의 무릎이 꺾였다.
왼쪽 어깨의 괴사가 쇄골 아래까지 번져 있었다. 지맥 안정기에 생명력을 쏟아부은 대가가 아직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마력 폭주까지 겹쳤다. 호흡이 거칠어졌다. 손가락 끝이 떨리며 더 이상 허공에 설계도를 그릴 수 없었다.
먼지가 가라앉았다.
성전은 반쯤 폐허가 되어 있었다. 무너진 기둥 사이로 은빛 갑옷 조각들이 흩어져 있었고, 신음 소리가 간간이 들렸다. 죽은 건 아니었다. 벨리알의 함정은 항상 치명적이었지만 이번엔 설계할 시간이 충분치 않았다. 완벽하지 못한 함정. 그 사실이 벨리알의 턱을 굳게 만들었다.
에린이 다가왔다.
무릎에서 피가 흘러 부츠를 적시고 있었지만 걸음은 단단했다. 벨리알 앞에 쪼그려 앉으며 통로 입구에서 발견한 인장의 형태를 손가락으로 바닥에 그렸다.
"성황청 직인이야. 협회장이 직접 이 통로를 뚫었어. 마력 결정도 외부에서 원격 투사한 게 아니라 물리적으로 설치한 거야."
"그래서?"
벨리알의 음성이 건조했다. 시선은 에린이 그린 문양에 고정되어 있었다.
"협회장이 이 성전의 구조를 알고 있다는 뜻이지. 재건 이전의 설계도를. 아마 네 아버지 시절의 원본을."
벨리알의 손가락이 멈췄다. 설계도 여백에 죽은 부하들의 이름을 적던 그 손이. 아버지의 원본 설계도. 벨리알이 아르스 마그나를 재건하며 뼈대로 삼은 근본 구조였다.
"알고 있으면서 뚫지 않은 거야."
에린이 말을 이었다. 목소리가 낮아졌다.
"할 수 있었는데 안 한 거야. 왜?"
침묵이었다. 먼지 입자가 마력의 잔향 속에서 천천히 가라앉았다. 무너진 석재 사이로 스며든 차가운 공기가 벨리알의 드러난 근섬유 위를 지나갔다. 이를 악물었다. 통증 때문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성이 파괴된 것도, 자신이 재건한 것도, 모두 협회장의 손바닥 안이었을 가능성.
에린의 품에서 성물이 진동했다.
처음엔 미약했다. 지맥 안정기와 공명할 때의 익숙한 떨림. 진동의 패턴이 달랐다. 에린이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성물이 스스로 빛을 내고 있었다. 은빛이 아니었다. 금빛. 성황청의 태양 문양과 동일한 색.
"이건 내가 하는 게 아니야."
에린이 성물을 꺼냈다. 손바닥 위의 창 파편이 맥박처럼 뛰고 있었다. 빛의 간격이 점점 짧아졌고, 에린의 손이 성물을 쥔 채 제 의지와 무관하게 들어 올려졌다.
"벨리알, 물러나."
에린의 경고와 동시에 성물이 금빛 광선을 쏘았다. 벨리알을 향해서가 아니었다. 성전의 잔해를 관통하여 천장 너머로. 성황청의 위치를 알리는 신호탄처럼.
에린의 몸이 따라 움직였다. 오른팔이 성물을 쥔 채 벨리알의 목을 향해 뻗어 나갔다. 왼손이 자신의 오른 손목을 붙잡았다. 손목뼈가 삐걱거렸다.
"제어당하고 있어. 성물이, 외부에서."
에린의 이가 부딪혔다. 왼손의 힘만으로 오른팔을 억누르고 있었지만 성물의 금빛이 강해질수록 오른팔의 힘도 커졌다. 발이 바닥을 긁으며 벨리알 쪽으로 한 발짝 끌려갔다.
벨리알이 에린의 눈을 보았다.
공포가 아니었다. 분노도 아니었다. 자신의 몸이 타인의 설계도 위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굴욕. 기술자만이 이해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거기 있었다.
벨리알은 바닥에 손을 짚었다. 떨리는 손가락으로 균열 하나를 더듬었다. 지맥 안정기의 잔여 출력이 흐르는 맥. 미약하지만 아직 살아 있는 선.
균열에 마력을 밀어 넣자 에린의 성물이 요동쳤다. 지맥과 성물의 공명. 대심판관의 마법을 무효화했던 그 원리. 이번엔 반대였다. 협회장이 성물의 공명 주파수를 역이용하여 제어권을 빼앗고 있었다.
에린의 오른팔이 왼손을 뿌리치고 앞으로 뻗어졌다.
성물의 끝이 벨리알의 목에서 한 뼘 거리에 멈췄다. 에린의 왼손이 자신의 오른 팔꿈치를 잡아 꺾은 것이었다. 관절이 비명을 질렀다. 입술 사이로 숨이 새어 나왔다.
"설계도에 뭐가 있어."
에린이 끊어지는 숨 사이로 말했다.
"네 아버지 설계도 여백에. 인간의 언어로 된 주석. 그게 이 성물의 제어 암호야."
벨리알의 동공이 흔들렸다. 에린이 발견했던 인간의 언어. 아버지의 설계도에 왜 인간의 문자가 있는지 벨리알은 한 번도 답을 찾지 못했었다.
에린의 팔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번엔 왼손의 힘으로도 막을 수 없었다. 성물의 금빛이 에린의 팔 전체를 감싸며 근육을 직접 조종하고 있었다.
벨리알이 입을 열었다.
"놓지 마."
에린이 이를 악물었다. 대답 대신 왼손으로 바닥의 깨진 석판을 집어 자신의 오른 손등을 내리쳤다. 뼈가 울렸다. 성물이 손에서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금빛이 꺼지지 않았다. 바닥에 떨어진 성물이 스스로 회전하며 벨리알을 향해 미끄러졌다.
에린이 부러진 석판 조각을 성물 위에 내리꽂았다. 금빛이 석판 틈으로 새어 나왔지만 이동은 멈췄다. 에린의 오른손에서 피가 흘러 석판을 적셨다.
숨소리만 남았다.
먼지가 내려앉은 성전에서 둘의 거친 호흡이 겹쳤다. 벨리알은 에린의 피 묻은 손을 보았고, 에린은 바닥에 눌린 성물의 금빛 맥동을 보았다. 석판 아래에서 성물이 규칙적으로 빛났다. 한 번. 두 번. 세 번. 누군가에게 신호를 보내듯.
벨리알이 허리를 숙여 바닥의 균열에 귀를 대었다. 지맥을 타고 흐르는 미세한 진동이 성물의 맥동과 정확히 같은 간격이었다.
"응답하고 있어."
벨리알이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천장 너머를 향했다. 무너진 성전 위, 아르스 마그나의 심장부를 향해.
"지맥 안정기가 성물에 응답하고 있어. 내가 설계한 게 아닌 주파수로."
에린이 벨리알을 보았다. 그의 손가락이 다시 허공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번엔 설계도가 아니었다. 아버지의 원본 구조를 기억에서 더듬는 동작이었다.
석판 아래에서 성물의 금빛이 한층 강해졌고, 에린의 오른팔이 제 의지 없이 석판을 향해 다시 뻗어 나갔다.